[1그룹] 무엇이 아름다울까요?
‘당신은 무엇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나요?’ 이는 아름다움의 주관성(혹은 상대성)을 드러내는 질문입니다. ‘당신’ 스스로가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을 ‘생각’한다는 점에서 아름다움의 고정된 기준이 없다는 것을 암시하지요. 과거와 현재에서 경험하는 아름다움의 가장 큰 차이는 지배적인 패러다임의 유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미시사적인 연구를 고려한다면 그 결과는 달라질 수 있겠지만 과거 한 시대를 살아간 사람 사이에는 아름다움에 대한 공통된 관념이 있었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비례와 조형이, 중세시대에는 신과 신의 속성인 빛이, 르네상스에 이르러서는 인간이 아름다움의 절대적인 기준이었지요. 하지만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은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무엇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나요?’라고 물어본다면, 공통적인 대답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아름답다고 여기는지 살펴봅시다.
애플은 단순한 IT 회사를 넘어서서 브랜드로서 자신만의 이미지를 구축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애플을 세련되고, 진취적이며, 아름답다고 여깁니다. 이러한 이미지를 구축해낸 사람은 애플의 창립자 스티브 잡스입니다.
스티브 잡스는 자신이 만든 제품을 ‘beautiful’, ‘gorgeous’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는 아름다운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했지요. 이러한 노력은 아이팟, 아이폰의 깔끔한 디자인으로 결실을 보았습니다. 물론 아름다움에 집착한 나머지 G4 큐브라는 불편한 PC를 만들기도 했지만 애플은 디자인을 강조한 제품을 만들면서 사람들의 판매를 유도했습니다. 이제, IT 제품을 선택함에 있어서 ‘아름다움’은 무시할 수 없는 요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품은 단순히 기능만 잘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하드웨어 디자인에서부터 시작해서 사용자 친화적인 인터페이스까지 고루 갖추어야 합니다.
미술은 항상 세련되고 우아한 길만 밟아왔다고 착각하기 십상이지요? 현대 미술을 경험하는 순간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은 깨지기 마련입니다. 현대 미술은 기존의 규칙을 깨는 데서 아름다움을 찾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아는 비너스는 우아한 모습입니다. 고대 그리스에 조각되었던 밀로의 비너스는 균형미를 가졌고, 르네상스 시대의 보티첼리는 육체적인 아름다움의 비너스를 묘사했습니다. 하지만 우아한 비너스의 모습이 현대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니키 드 생팔은 연작 <나나>를 통해서 페미니즘 작가로서 자신의 세계관을 구축했는데, <나나>는 우리가 가진 기존의 사고를 벗어난 여성상을 묘사합니다. 작가는 날씬한 몸매, 조신함, 우아함과는 철저한 거리 두기를 통해 <나나>를 표현했습니다. 그녀의 세계관은 밀로의 비너스를 패러디하는데 이르렀지요. 그녀는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상징을 밀로의 비너스에 페인트 칠함으로써 표현했습니다. 이처럼, 현대의 작가는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 기존의 작품을 재해석합니다.
고전 패러디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마르셀 뒤샹은 20세기에 르네상스 작품을 패러디했지요. 그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에 수염을 달았습니다. 또한, 그림에 LHOOQ라는 부제를 작품 아래에 달았는데 이는 ‘그녀의 엉덩이는 뜨거웠다’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모나리자에 대한 패러디는 뒤샹뿐 아니라 뚱뚱한 모나리자, 작품을 벗어난 모나리자, 레고로 만든 모나리자 등 여러 방법으로 나타납니다. 이처럼 기존의 작품을 파괴하고 재해석하는 작업은 현대 미술에서 종종 보이는 작업입니다. 기존의 아름다움이라 했던 것들이 자신의 주관에 맞게 재해석되는 과정에서 종종 기존 미술에 대한 파괴행위가 발견됩니다.
미용 광고는 가장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사람을 모델로 사용합니다. 이러한 현상에 미용 용품 회사 Dove는 끊임없이 도전했는데요. 긴 금발, 날씬한 몸매, 깨끗한 피부와 같이 아름다운 여성상에 대해서 다른 광고가 말하는 것에 대해 끊임없이 반문을 던졌습니다. 2004년부터 Dove는 Real Beauty 캠페인을 진행했고,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아름답습니다.’라는 슬로건과 함께 아름다움에 대한 가치는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정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2013년 칸 국제광고제 Film, Brand Contents & Entertainment 부문에서 금상을 받은 Real Beauty Sketch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찾는 모습을 담았습니다. 화가는 실험자를 보지 않고 인물화를 그리는데요. 화가는 두 가지 버전의 그림을 그리는데 하나는 자기 자신을 묘사한 것을 토대로,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을 묘사한 것을 토대로 그림을 그립니다. 캠페인은 다른 사람이 묘사한 얼굴에서 좋은 점이 더 눈에 띈다는 결과를 보였다고 합니다. 광고는 각자 스스로가 인지하지 못하는 아름다움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Dove의 광고는 기존의 광고에서 나오는 아름다움에 반문을 하면서 진정한 자신의 아름다움을 찾으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도브 광고(https://www.youtube.com/watch?v=oWUsews2gtg)
오늘날 다양한 분야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아름다움을 말하고 있습니다. 소비자에게 있어서 아름다움이 중요한 선택 기준이 되었으며, 예술가들은 기존의 정해진 아름다움에 반기를 들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아름다움의 가치는 스스로 정하는 것이라고 역설합니다. 이처럼 아름다움이 삶의 중요한 기준이 되면서 동시에 정해진 것이 없으므로 스스로가 정하는 개념이 되었습니다. 과거에서 보았던 하나의 패러다임이 사라지고 그 공백을 상대적인 아름다움이 메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아름다움의 기준이 정해지지 않은 사회에서 더 개방적입니다. 스스로가 생각하는 아름다움과 타인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이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서로 이해하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다름은 비난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개성이라고 강조합니다. 하지만 상대적인 아름다움이 순기능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아름다움에 절대적인 기준이 필요한 것이 아닌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현대 미술은 난해합니다. 특히 현대 추상 미술전시에서 해설 없이 작품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요. 점, 선, 면으로 표현한 작가의 세계관을 따라가기가 버거울 때도 있습니다. 심지어 작품의 제목을 당당히 ‘무제’라고 정하거나, 회화의 기본 요소마저 없어 보이는 작품도 있습니다. 추상 미술은 현대 미술 중 하나의 장르로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분야이기에 '아름답다'라고 표현되는 것이 타당하겠지만 감상하는 사람의 관점에서는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위의 작품 리스트는 추상미술회화 작품들의 모음입니다. 주목해야 할 점은 위의 작품들 모두가 사람의 작품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위 작품들 중 일부는 원숭이의 작품입니다. 문제는 이를 분간해내기 어렵다는 데에 있습니다. 무엇이 침팬지가 그린 것이고 무엇이 사람이 그린 것인가, 이에 대한 질문은 곧 우리가 아름다움을 어디까지 인정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동물이 그린 작품임에도 추상미술로서의 아름다움을 인정할 수 있는지, 혹은 사람의 창작물과 구분할 수 없는 창작물임에도 불구하고 화가가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가치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지 질문하게 됩니다.
예술의 과정에서는 희생해야 하는 것들이 생기기도 합니다.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때로 가정을 등지게 되고,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힘들다고 하지요. 아름다움에 대한 열망은 건강을 쇠약하게 하고 급기야 어떤 예술가들은 단명하거나 인간성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예술을 위해 인간성을 포기하는 모습은 작품의 소재로써 자주 사용됩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이 불러낸 참혹한 결과는 독자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것 같습니다. 김동인의 단편 소설 광염 소나타는 작곡가가 아름다운 곡을 만들기 위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과정을 담았습니다. 방화에서 시작한 그의 기행은 살인으로까지 이어집니다. 아름다움을 위해서 인간성을 잃어가는 모습은 아름다움의 폭주를 두렵게 만듭니다.
유미주의 혹은 탐미주의로 표현된 이러한 집착은 인간성보다 아름다움을 우위에 두면서 생깁니다. 유미주의의 시작은 예술에 대한 독립적인 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시도에서 나왔습니다. 즉, 사회적, 도덕적, 실용적 가치에 영향을 받지 않는 순수한 예술을 하고 싶다는 소망에서 시작된 것이지요.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신조 하에서 유미주의는 발전했는데, 의도는 좋았지만 제어되지 않는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이 불러오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아름다움에 대해, 상대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시대적 흐름을 거슬러서 절대적인 기준을 마련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패러다임을 구축하고 강요하는 시도는 자율성을 강조하는 현대사회의 가치와 충돌합니다. 그럼에도 상호 주관성의 관점에서 아름다움을 살펴보려는 시도는 필요한 것 같습니다. 자신과 타인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겠지만, 분명 둘 사이에 공유되는 부분은 존재합니다. 이처럼 나의 주관성과 상대의 주관성이 일치하는 부분을 '상호 주관성'이라고 합니다. 아름다움을 무제한적으로 허용하는 대신, 적당한 범위 내에서 과도한 난해함과 폭주를 경계하는 아름다움을 이해 가능한 수준으로 표현함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침팬지의 그림인가 사람의 그림인가
침팬지 콩고는 1954년에 태어나서 2~4살 무렵에 400점의 유화와 데생을 남겼습니다. 동물행동학자 데스먼드 모리스는 콩고의 그림을 모아 전시했으며 침팬지가 예술을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을 저서 ‘털 없는 원숭이’에 남겼는데, 콩고의 그림은 경매장을 통해 대략 1130~1500달러의 가치를 가진다고 평가받았습니다.
침팬지 피에르 브라소는 프랑스 예술가로서 스웨덴에 소개되었습니다. 스웨덴 전시에서 작품은 호평을 받았고, 이전까지 들어본 적이 없는 예술가의 등장에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었습니다. 하지만 전시회가 끝나고 작가가 침팬지라는 사실에 다들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평론가들은 자신이 극찬한 작품이 침팬지의 작품이라는 데에 분노했습니다. 피에르 브라소는 예술 평론가의 실체를 드러내기 위해서 현직 기자 악셀손이 계획한 사기극으로 평가됩니다. 평론가들을 속여 넘긴 침팬지의 그림은 추상 회화에 대해 심도 있는 질문을 남겼습니다.
김동인. (2012). 광염 소나타. 서울: 책나무 출판사
[1]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PowerMac_G4_Cube.jpg
[2]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Aphrodite_of_Milos.jpg
[5] https://en.wikipedia.org/wiki/Niki_de_Saint_Phalle#/media/File:Farbenfrohe_Nana_Februar_2012.JPG
[6] https://pxhere.com/ko/photo/971721
[7]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Duchamp,_LHOOQ,_1919.png
[8] https://en.wikipedia.org/wiki/File:Chimpanzee_congo_painting.jpg
[9]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Congo_painting_2.jpg
[10] https://theartstack.com/artist/jackson-pollock/yellow-grey-black-1948-1
[11] http://cultstories.altervista.org/pierre-brassau/quadro/#main
[12] http://reverent.org/Images/Ape_quiz/4.jpg
[13] http://reverent.org/Images/Ape_quiz/5.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