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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이젠 독일

희미한 인생길도 사랑하는 이 함께라면 용기가 생깁니다.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삼합점을 다녀와서

by 수평선

독일 아헨에 와서 미루고 미루던 곳에 드디어 다녀왔다.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3국의 국경선이 만나는 지점이다.

일요일이라 버스도 많지 않아 30분 걸어가는 코스를 선택했다.

지도 앱이 가르쳐주는 대로 어느 정도 걸어가니 지도 위에 방향만 있고 아무것도 없다.

계속 걸어가다가 그 이유를 알았다. 우리가 가는 길은 산길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가는 길은 오르막이라 30분, 오는 길은 내리막이라 20분으로 표시가 되어 있었구나.)

아침부터 안개가 자욱하더니 산으로 올라갈수록 신비의 세계가 펼쳐진다.

쭉쭉 뻗은 나뭇잎 끝에 춤추듯 매달렸던 빗방울들이 바람 불 때마다 우수수 떨어져 정수리에 꽂힌다. 차가운 기운이 뼛속까지 떨게 한다. 간혹 도토리 열매가 어깨를 두드리기도 한다.


희미한 안갯속을 뚫고 산길을 올라다. 깊은 산중이라 지도 앱이 멈춘 지 오래.

지나가는 이도 없는 깊은 산속을 아들과 단 둘이 오르고 있다. 가는 길이 외길이면 좋으련만 두 갈래로, 때로는 세 갈래로 나뉘어 있다. 어렴풋 지도 앱에서 보았던 길을 추측하며 올라간다.

얼마쯤 갔을까.

나무 위에 신발 한쌍이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다. 꽤 높은 곳에 이정표인 양 산행하는 이들을 지켜보고 있다. 아이작 세비스 싱어의 '바르샤바로 간 슐레밀'이라는 책이 떠올랐다.
게으른 슐레밀은 자신이 살던 켈름을 떠나 위대한 도시 바르샤바로 가고 싶어 했다. 게으르고 능력도 없어 아내에게 늘 잔소리만 듣는 현실을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을 반겨 줄 새로운 세상 바르샤바를 향해 길을 나선다. 한나절을 걷던 슐레밀은 장화를 벗어 가던 방향으로 장화 코를 향해 놓고 낮잠을 잔다. 이를 지켜보던 대장장이가 그의 장화 코를 오던 방향으로 돌려놓는다. 장화 코만 보고 길을 가던 슐레밀은 다시 켈름으로 돌아오게 된다.

전과 똑같은 아내, 자식들, 마을 사람들을 본 슐레밀은 세상은 어디나 다 똑같다는 생각을 하며 자신이 이름 붙인 제2 켈름에서 적응하며 살기로 한다는 얘기다.

나무 위에 매달린 신발의 코는 두 방향으로 놓여 있다. 직진 길과 좌측 길. 어느 쪽 방향으로 가든 목적지는 같다는 얘기일까. 지금까지 그래 왔듯 직진을 택했다. 더욱 가파른 산이 둘렀던 목도리를 벗어던지게 했다.

평지에 오르니 세 나라 국기가 나란히 안갯속에서 우리를 반기고 있다. 그러나 아직 삼합점은 보이지 않는다.

축축한 낙엽이 쌓인 숲길을 한동안 걸었다. 안갯속이라 시야가 넓지 못했지만 지도 앱을 살피느라 꽁꽁 언 아들의 손을 꼭 쥐고 함께 걸으니 이것도 좋은 추억이라.


네덜란드 최고지대를 지나 드디어 삼합점 도착!

제법 차가운 날씨인데 꽤 많은 사람들이 왔다. 연인끼리 온 이들은 각 나라 경계선에 서서 마치 멀리 떨어진 듯 사진을 찍고 가족과 온 사람들은 한 사람씩 경계선 위에 서서 사진을 찍는다. 순식간에 한 바퀴를 돌고 세 나라를 다녀왔다며 웃는 아이들, 숨바꼭질하듯 몸을 숙이며 우스꽝스럽게 찍는 사람들...
별것 아닌 뾰족 바위 앞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즐거운 추억을 남긴다.

아들과 나도 라마다 돌며 시진을 찍는다. 돈 안 들이고 세 나라를 다녀온 기분이다.

산길을 오르느라 추운 줄 몰랐다가 정상에 오르니 한기가 느껴지며 다리도 아파왔다. 피곤한 몸을 쉬며 몸을 녹일 곳이 필요했다.

삼합점 주변에 있는 독일, 벨기에 음식점은 모두 문을 닫았는데 네덜란드 카페들은 세 곳 모두 불을 밝혀 놓았다. 아들과 운치 있는 카페에서 따뜻한 커피 한잔으로 몸을 녹인다. 벽난로의 장작이 활활 타오르며 언 몸을 녹여주었다.

돌아오는 길은 내리막길이라 수월했다. 안개는 더욱 짙어 몽환적인 분위기로 우리를 이끌었다.


혼자가 아니라 다행이다. 희미한 인생길도 사랑하는 이와 동행한다면 용기가 생기는 것이다.


한번 갔던 길은 안갯속이라도 앞이 보인다.
내가 갈 길을 알고 간다면 망설임도 필요 없다. 당당하게 앞으로 걸어가다 보면 어느새 목적지에 도달하게 된다.


버스를 기다리다가 30분 거리의 교회까지 걷기로 했다. 거의 도착할 때까지도 우리가 타야 할 버스는 지나가지 않았다.


내가 가야 할 방향이 정해졌다면 때로는 빠르게 갈 방법을 기다리는 것보다 쉬지 않고 걷는 것이 빠를 수 있다.


오래 걸어 피곤하지만 오래 남을 추억 한 자락 건져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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