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처럼 날씨가 좋은 날은 밖으로 나가야 한다. 커다란 유리창 밖 파란 하늘이 나뭇잎을 흔들어 깨우고 노랗게 물든 나뭇잎이 하나 둘 떨어지며 아쉬운 작별을 고한다. 가을이 다 가기 전에 여행을 즐기라고 창문까지 두드리며 재촉을 한다. 햇살은 파란 하늘을 더욱 푸르게 만들고 구름 조각 조차 자취를 감추었다.
“이런 날은 무조건 밖으로 나가고 봐야 해.”
독일에 온 지 한 달이 넘어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다. 어둠침침한 날이 많은 독일 사람들에게 강렬한 햇빛은 유혹인 것이다.
독일에 처음 왔을 때 뜨거운 여름 태양빛을 피하기 위해 양산을 쓴 우리 모녀를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그들의 눈길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맑은 하늘은 햇빛이 그리운 이들에게 밖으로 나오라는 초청장인 것이다.
머리를 감고 로션을 두드려 바른 다음 청바지에 가벼운 점퍼 하나 걸치고 외출 준비 끝.
“이러고 나가시게요?”
화장도 하지 않은 맨 얼굴로 외출을 하려는 나를 보고 아들이 의아스럽다는 듯 묻는다.
“응. 여긴 나를 알아볼 사람이 아무도 없잖아. 어서 가자.”
아들은 학교로, 나는 전날 공부해 둔 거리를 향해 힘찬 발걸음을 옮긴다.
조금 걸으니 아들이 다니는 대학 카페가 있다. 학생들로 가득한 카페는 열띤 대화로 훈훈하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지만 그들의 표정과 몸짓으로 대화를 짐작해 본다. 옆 테이블에는 황금색의 기다란 생머리 아가씨, 턱수염을 길러 학생인지 교수인지 가늠할 수 없는 남자, 화려한 레게머리가 돋보이는 흑인 아가씨, 초록 눈동자와 기다란 속눈썹이 매력적인 여성이 열띤 토론 중이다.
카페 안을 더 둘러보니 반팔 티셔츠에 두꺼운 목도리를 두른 사람, 몇 겹의 옷을 걸쳤는지 몸 밖으로 삐져나온 옷들도 세 개나 되는 데 몸을 잔뜩 움츠린 사람, 히잡을 두르고 조용히 커피를 즐기는 사람 등 정형화된 옷차림은 아무도 없었다. 이곳에서는 누구를 의식할 필요도, 이유도 없이 자연스럽고 편안하다.
카페를 나와 두 번째 목적지를 찾아갔다. Dom이라고 쓴 이정표가 내 발걸음을 가볍게 해 준다. 아헨 대성당은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수수한 자태로 여행객들을 맞이한다. 많은 사람들이 둘러보고 사진을 찍으며 아헨 성당의 건축물에서 추억을 남긴다. 아무도 아는 사람 없고, 그들의 대화도 이해할 수 없지만 여행객들을 바라보는 것도 재미있다.
전에 보지 못했던 곳을 살펴보고 사진을 찍다가 낯익은 듯 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한국인들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굴 모습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은 멀리 떨어져 있어서 말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입고 있는 옷, 신발들이 한국인이라는 느낌에 더욱 확신을 갖게 했다. 가까이 다가왔을 때 비로소 그 확신이 맞았음을 알았다.
“여기서 한 장 찍어줘. 얘들아 같이 찍자. 멋진 포즈를 취해 봐.”
낯익은 한국말이다. 중년으로 보이는 여고 동창생들이 패키지여행을 온 듯하다. 울긋불긋 화려한 옷차림과 그녀들의 손에서 흔들리는 명품백이 반짝반짝 빛을 낸다. 챙이 넓은 모자에 검은 선글라스가 얼굴을 반쯤 감추고 있어서 그들의 표정을 알 수가 없다. 그들도 내게 말을 붙이지 않았다. 아마 아시아 쪽 어느 나라에서 온 사람이려니 하겠지. 그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듯 편하게 관람을 했다.누군가를 의식하지 않아도 된다는 편안함이 내 마음을 더욱 자유롭게 한다.
며칠 전 아들이 다니는 한인 교회에 가기로 한 날이었다. 분명 나를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텐데 일찍부터 머리 손질을 하고, 화장에 정성을 들이며 옷매무새에 신경을 썼다. 교회에 가는 길이지만 한국인들을 만난다는 부담감이 나도 모르게 외모에 신경을 쓰고 있었나 보다.
“독일 올 때 구두도 챙겨 올 걸 그랬다. 이 옷은 너무 화려한 거 아냐?”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교회로 가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었다. 한국인을 만나는 날은 왜 내 겉치레에 신경을 쓰게 될까. 곧 다시 한국에 돌아갈 텐데 오늘처럼 편안한 마음과 몸가짐으로 사람들을 대할 수 있을까.
성당 내부로 들어가자마자 그 화려함에 놀랐다. 지금껏 보아 온 여느 성당에 비해 화려하고 규모 있는 아름다움을 성당 안에서 볼 수 있었다. 꾸미지 않은 듯 한 순수함과 화려한 내면을 갖춘 성당이기에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가 보다.
평소 2층은 무료개방을 하지 않는데 오늘은 무료에 사진까지 찍을 수 있다. 눈에 다 담아 놓을 수 없는 아름다움에 취해 연신 사진을 찍어댔다. 꾸미지 않는 순수함도 매력 있지만 화려한 모습 또한 황홀감을 느끼게 한다.
아헨 대성당은 카를 대제의 아들 루드비히가 대관식을 거행한 이후 600년 동안 독일의 왕과 황제들이 대관식을 했던 곳이다. 2층에는 대관식에 썼던 의자가 전시되어 있는데 커다란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평범해 보인다. 샤를마뉴의 화려한 유골함에 비해 평범하고 차가운 느낌의 이 의자가 지니고 있는 의미가 무엇일까. 여섯 개의 계단을 올라 그 의자에 앉은 황제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2층에서 내려다 보이는 아래층은 작아 보였다. 1층 장의자에 앉아 2층과 천장을 바라보며 황제들과 예배드리는 서민들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이른 오후지만 따사로운 햇볕이 작별을 고할 즈음 슬금슬금 헤집고 나오는 인공 불빛의 화려함이 도시를 다른 모양으로 장식한다.
서둘러 돌아가는 사람도 없다. 어두우면 어두운 대로, 야외 테이블에는 사람들의 대화로 무르익어 간다. 고흐가 그린 밤의 테라스가 그대로 연출되는 시각이다.
작은 도시에서 꽉 찬 느낌을 안고 아들의 자취방으로 돌아간다. 나 홀로 여행은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자유로워서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