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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이젠 독일

1리터 물병을 통째로?

독일인들의 큰 가방이 궁금했는데

by 수평선

"아저씨 아저씨 우체부 아저씨 큰 가방 메고서 어디 가셔요. 큰 가방 속에는 편지 편지 들었죠. 시집간 언니가 내일 온대요."

어릴 적 동네 친구, 언니들과 고무줄놀이를 하며 목이 터져라 불렀던 노래다.
오후 3시쯤 되면 자전거를 타고 오는 아저씨가 있었다. 그는 늘 큰 가방을 둘러메고 "띠 롱 띠 롱" 하며 입으로 신호음을 내며 달려온다.

고무줄놀이하던 여자 아이들도, 딱지치기나 구슬치기 하던 남자아이들도 달려드는 순서대로 허리에 손을 잡고 기차가 된다. 아저씨는 우리에게 보조를 맞추느라 천천히 페달을 밟으셨고 인간 기차 줄은 점점 길어진다.

마을 중심에 다다르면 아저씨는 자전거에서 내려 큰 가방을 열고 편지에 쓰인 어르신들 이름을 부른다. 아버지나 언니 오빠들의 이름이 불리면 당첨이라도 된 듯 아저씨가 들고 있는 하얀 봉투를 낚아채 간다. 아무것도 받지 못한 아이들은 옆집 사람 이름이라도 들리면 다행이라는 듯 "제가 전해 드릴게요." 하며 심부름을 자처한다.

집에 어르신들 생신 때가 되면 집집마다 돌며 식사하러 오시라고 초청을 해야 하기 때문에 시골 아이들은 마을 사람들 이름을 꿰고 있다.

심부름을 해주는 아이들을 위해 아저씨의 큰 가방은 다시 열린다. 아이들 눈은 큰 가방으로 몰리고 큰 가방 속 사탕 봉지가 찢기며 아이들 입엔 어느새 달콤한 사탕 하나씩 물고 다시 노래를 한다.

"아저씨 아저씨 우체부 아저씨~"

아저씨는 손을 흔들며 다른 마을을 향해 힘차게 페달을 밟는다.


독일 거리에 많은 사람들은 큰 가방을 메고 다닌다. 말쑥하게 차려입은 숙녀들 조차 작고 예쁜 핸드백보다 커다란 가방을 짊어지고 다니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저 큰 가방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어릴 적 우체부 아저씨의 큰 가방을 떠올리며 그들 가방 속이 궁금해졌다.


독일의 기차나 버스는 마주 앉는 자리가 있다. 키 큰 사람과 마주 앉기라도 하면 무릎이 맞닿기도 한다.

아헨에서 퀠른까지 가는 기차는 약 한 시간 정도 소요한다. 외투를 벗고 마주 보는 자리에 앉았는데 자리를 찾던 숙녀가 내 앞자리에 앉는다. 그녀는 독일에서 보기 드문 핑크색 외투를 입었는데 밝은 얼굴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조심스레 외투를 벗고 등에 메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는다. 전화기를 붙들고 누군가와 통화를 하던 그녀가 큰 가방을 열었다. 커다란 도시락통을 내 얌전히 만들어진 샌드위치를 먹는다.

잠시 후 가방에서 1리터짜리 물병을 꺼내 벌컥벌컥 마신다. 그리고 다른 통에 담긴 당근 세 조각으로 식사를 마무리한다. 그녀는 잠시 핸드폰 확인을 하더니 약 삼사백 페이지 되는 책을 꺼내어 읽기 시작한다.

그녀뿐만 아니라 옆에 있던 신사분도 1리터 물병을 꺼내 물을 마신 후 빈 병을 가방에 다시 넣는다.


작고 예쁜 물통을 들고 다니던 나는 물병채로, 그것도 작은 것이 아닌 1리터짜리 병을 갖고 다니는 그들의 모습이 낯설었다.

독일은 물값이 비쌀 뿐만 아니라 물을 살 때 병값을 함께 지불한다. 그래서 마트에 가면 가방 가득 빈 병을 들고 오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다시 돌려주면 병값을 환불받는다.


독일에서 대학을 다니는 딸은 아침 8시부터 수업을 하는데 쉬는 시간이 5분에서 10분 정도란다. 다른 강의실로 이동을 할 때면 바쁘게 뛰어야 하며 이렇게 3시까지 계속 수업할 때도 있다고 한다. 점심시간이 딱히 없을 때에는 빵이나 간식거리를 싸 갖고 다니며 요기를 해야 한다고 한다. 더구나 대학이든 관공서든 물을 마실 곳이 없어 하루 종일 밖에서 생활하려면 작은 물병을 들고 다니기보다는 큰 병 채 가지고 다니는 게 편하다고 한다. 딸의 가방에도 1리터짜리 물병이 군림하고 있다.

중. 고등학교 때는 예쁜 텀블러를 갖고 다니고 싶어 하던 딸이 그들의 삶에 익숙해져 가는 모습을 보니 독일인의 소박하고 털털함이 몸에 배어가는 듯하다.


20대는 화려한 것을 좋아하고 소비를 미덕으로 살아갈 나이인데 어쩌면 다행일까. 소박한 독일인이 되어가는 딸에게 크고 튼튼한 가방 하나 사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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