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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이젠 독일

내가 비어 있는 자리

문학이후 신인상 시상식이 있던 날

by 수평선

까만 어둠을 가르며 기차가 달린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가 달리는 소리도 조심스럽다. 밤새 지나다녔을 텐데 다행스럽게도 꼭 이 시각에만 내 귀를 거스른다. 소리와 함께 불빛도 달린다. 한대가 달리고 나면 한동안 적막이 꿈틀댄다.

습관적으로 휴대폰을 연다. 어둠을 가르며 파란 불빛이 방안에 퍼진다. 다행이다. 아들은 이 빛을 느끼지 못했다. 새근거림이 낮게 울려 퍼진다.


휴대폰 카톡 알림에 58이라는 숫자가 쓰여 있다. 밤새 무슨 일이 있었을까. 톡을 열어 보니 축하 메시지와 사진들이 마구 튀어나온다.

'아, 오늘 문학이후 신인상 시상식 날이구나!'

독일 시각으로 오전 6시이니 한국 시각으로는 오후 2시.

이미 시상식이 끝나고 모두 집으로 돌아가 축하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다.

사진 속에 낯익은 얼굴들, 반가운 얼굴들이 시상식 단상 꽃바구니 속에 행복하게 앉아 있다.

그중에 나를 부끄럽게 하는 사진 한 장이 눈에 띄었다.

'수필가 김정해 '라는 자리에 빈 의자 하나 놓여 있다.


지난 5월. 문학이후 신인상 작품 공모전에 도전을 해 보라는 권고를 받았다. 하지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준비되지 못한 마음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신호였다.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다며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리고 그 저지름에 신인상을 수상하게 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얼떨결에 당선소감까지 내고 책으로 나온 다음에야 내가 저지른 일에 대한 책임을 느껴야 했다. 이 부끄러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꼬.

다행히? 시상식은 미뤄지고 미뤄져 11월 말이나 12월 초에 한다고 했다. 확실한 일정이 정해지지 않아 11월과 12월의 달력을 비워 놓아야 했다. 달력의 빈 공간을 보면 뭔가로 채워야 직성이 풀리는 나는 하얗고 허전한 달력을 보며 펜을 들었다 놨다만 했다.


8월 말에 독일에 유학 중이던 아이들이 방학을 맞아 한국에 왔다. 오랜만에 온 아이들과 추억을 만들기 위해 바쁜 나날을 보냈다.

아이들이 독일로 떠나기 일주일 전. 갑작스레 나도 독일로 떠나기로 했다. 신인상 시상식 일정이 정해지지 않아 귀국 날짜를 고민하다가 12월 7일로 표를 끊었다. 그리고 9월 27일 아이들과 훌쩍 독일로 와 버린 것이다.

시상식은 상반기와 후반기를 함께 하게 되어 수상자가 9명이나 되었다. 적당한 장소와 모든 사람들 일정 맞추기가 어려웠을게다.

11월 24일로 시상식 날짜를 정했는데 참석 못해도 괜찮겠냐는 연락이 왔다. 긴 시간 독일에 있기로 작정한 이상 시상식에는 참여하지 못할 것을 예상했기에 쿨하게 괜찮다고 했다. 진짜 괜찮았다. 아니 준비되지 못한 마음에 그 자리에 앉는다는 것이 너무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이렇게 먼 곳으로 오래도록 도망쳐야 했는지도 모른다.

막상 화려한 시상식 사진을 보니 그 자리가 부럽기도, 아쉽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얼굴 내밀지 못한 내 모습에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가장 컸다.

좀 더 다져진 뒤, 내 가슴 한켠에 수필이라는 단어가 꿈틀댈 때 조용히 나 여기 있노라고 손짓하리라. 땅을 파고 돌을 다듬고 잡초를 제거하는 숱한 노동의 고통을 즐겨보리라. 준비되지 않은 거친 땅에 피 눈물 흘리는 노동의 수고를 더하리라.

내 빈자리를 채워 갈, 글 농군이 되기 위한 고통으로 몸부림 치리라. 내 빈자리가 더 이상 초라하지 않도록.


(이 글을 쓴 지 어느새 1년이 지났다. 난 그동안 무얼 하고 지냈노. 문학이후 회원들이 여러 권 책을 내는 동안 나는 지금 필리핀에서 바쁜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바쁘다고 말하지만 글로부터 은둔해 있었던 것이다.

이 브런치가 없었다면 글과는 단절된 삶을 살았을 것이다. 1년 전에 쓴 글을 하나씩 올리면서 나는 아직 글을 쓰고 있다고 자위하고 있다.


나는 지금 필리핀에 있다. 50여 명의 학생들과 기숙사라는 울타리 안에서 함께 웃고 울며 풋풋한 삶을 꾸려가고 있다.

독일에서 썼던 글들을 서둘러 정리하고 이제 현실의 글을 쓰리라.

10대학생들과 기숙사에 함께 살면서 느끼는 생생한 이야기를,

50살이 넘어 영어 공부를 시작한 늦깎이 영어 체험 이야기를,

가족을 떠나 홀로 타국살이하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내 이야기를 쏟아내리라.

게으르지만 않다면 매일이라도 쓸 수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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