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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평선 Apr 21. 2020

한국으로의 도피

자가격리 일주일을 보내며

 자가격리 일주일째 되는 날이다. 하늘은 푸르고 햇살은 따사롭다. 어제 내린 비 때문일까? 마당에 수줍게 핀 꽃은 진하던 향기가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영롱한 빛을 받아 보랏빛이 더욱 화사하다. 창문을 열어 퀴퀴한 방 안의 공기를 바꾸고 청소기를 돌리고 나니 우울했던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일주일 전. 유령도시 같던 바기오를 빠져나왔다.
코로나 19로 전 세계가 비상일 때 필리핀 바기오시에서도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했다. 한 가구당 시에 등록된 한 명만 외출이 가능했다. 그것도 주 3회, 오전 9시부터 12시까지만 시의 허가를 받아 외출할 수 있다. 
우리 기숙사에서는 일찌감치 생필품을 준비하여 깐띤(매점)을 운영했다. 아이들도 외출을 할 수 없어 깐띤에서 간식거리와 생필품을 구매하고 기숙사 내 프로그램을 잘 따라주었다. 
이런 철저함 덕분일까. 바기오는 확진자 없는 안전한 도시로 알려졌다. 그러나 마닐라에 확진자 수가 늘어 감에 따라 바기오도 더욱 철저한 외출 금지령이 내려졌다. 언제 금지령이 풀릴지 모를 상황에서 부모님들은 조심스럽게 아이들의 귀국을 문의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비교적 안전한 바기오의 기숙사에 남는 것을 고려하던 부모님들도 차츰 확산되는 필리핀 상황을 보고 전원 한국으로의 철수에 동의를 했다. 그래서 우리는 한국으로의 도피를 계획해야만 했다.

바기오시에서는 모든 출국자가 같은 날 동일한 시간대의 비행기를 탈 것을 권유했고 금요일 오전 10시에 나가도록 허가해 주었다. 바기오로부터 가까운 클락 공항은 이미 폐쇄되어 5시간이 넘게 걸리는 마닐라로 가야만 했다. 버스도 운행이 중지된 상황이라 우리 68명은 10대의 밴을 타고 마닐라로 향했다. 

3주 동안 기숙사 밖으로 나갈 수 없어서 그동안 외부 상황이 어떤지 궁금했다. 달리는 차창밖으로 보이는 바기오는 유령도시 같았다. 모든 상점은 문을 닫았고, 거리에는 차도,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이색적인 소나무가 자라는 바기오는 필리핀 사람들이 꼭 한번 가보고 싶은 관광도시다. 그래서 늘 사람과 차로 붐볐는데 이렇게 조용한 도시가 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마치 유령도시를 촬영하기 위해 마련된 커다란 세트장 같았다. 쭉쭉 뻗은 소나무들만 떠나는 우리를 배웅해 주었다.

마닐라까지 가는 동안 세 번의 검문소와 세 번의 차량 소독이 이루어졌다. 휴게소마다 문들은 굳게 닫혔고 화장실을 지키는 사람만이 위태롭게 우리를 경계하고 있었다. 출발하기 전에 물과 주먹밥, 그리고 바나나를  준비했기에 우리는 차 안에서 점심식사를 할 수 있었다. 마닐라까지 가는 길은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들판은 온통 초록빛이지만 가끔씩 보이는 주황 꽃들을 보니 마음이 따뜻했다.

오후 5시. 예상보다 빠른 시각에 마닐라에 도착을 했다. 밤 11시 반 비행기라 9시쯤 공항에 도착해도 될 텐데 뻥 뚫린 마닐라 거리는 우리의 차들을 흡입하듯 맞아들였다. 공항에 오래 머무는 것은 코로나에 노출될 위험이 있을 것이라는 판단하에 차 안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정차된 차 안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방법을 찾아야 했다. 1번 차에 탄 사람들부터 10번 차까지 50m씩 거리를 두고 산책을 하였다. 시원한 바기오와 달리 마닐라의 거리는 후덥지근하였다. 하지만 오랜 시간 오므리고 있었던 다리를 펼 수 있어 잠깐의 외출에도 행복했다. 

상점마다 굳게 잠긴 마닐라에서 저녁거리를 구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다행히 필리핀 패스트푸드점인 졸리비에서 저녁거리를 주문할 수 있었다. 기사님 들것까지 80개의 식사를 주문하려니 시간이 오래 걸렸다. 하지만 늦게 나오는 것에 오히려 고마워했다. 

공항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열리지도 않은 티켓팅 부스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우리 팀이었다. 차 안에서 시간마다 소독을 하고 마스크도 세 번째 바꿨지만 공항에서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긴 시간 공항에 머물러야 하기 때문에 틈틈이 소독제와 알코올로 손을 소독하게 하고 무리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주의를 주었다. 아이들은 인솔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었고 무사히 탑승을 했다. 물론 비행기 안에서도 마스크를 벗지 않을 것과 시간마다 손을 소독하도록 당부했다.

긴 시간 비행을 마치고 인천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기쁨보다 걱정이 앞섰다. 돌아갈 집이 넓은 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우리 아이들을 일일이 인솔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부모님들이 마중할 수 없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고 해외 입국자들이 자가격리 장소로 이동하는 방법이 지역마다 다르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지방까지 혼자 가기에는 아직 어린아이들도 있기 때문이다. 기숙사에 있을 때 집으로 가는 방법을 숙지한 아이들은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자가격리 앱을 깔고 무사히 공항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일본이나 인도네시아, 미얀마에서 온 몇몇의 학생들이 문제였다. 그들 중 몇 명은 한국에 거주지가 없기 때문에 시설로 가야 하는데 그들의 신원을 확인하는 전화를 받을 사람이 없어 심사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었다. 일일이 전화로 확인하고 정확한 주소지를 입력하느라 입국심사는 길어졌다. 다른 비행기로 온 입국자들이 몰려오자 줄은 한없이 길어지고 정신없는 가운데 어렵게 입국 심사대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우여곡절 속에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며칠 전에 이사하여 낯선 새 집에 짐을 풀어야 했다. 

지선이는 일본에서 유학 온 아이다. 지선이 부모님은 일본이 한국보다 위험하다며 지선이를 한국의 시설로 보내기를 원했다. 하지만 아직 어린 지선이를 시설로 보내는 것이 안타까워 우리 집으로 동행을 했다. 지선이는 안방에, 나는 좀 작은 방에서 지내기로 했다. 
우리를 담당한 동사무소 직원이 하루에 한 번씩 전화를 해서 우리의 상태를 점검한다. 둘째 날에는 주황색 가방을 주고 갔다. 거기에는 일회용 체온계와 마스크, 소독제와 알코올, 그리고 붉은 봉투 2장이 들어 있다. 매일 두 번씩 체온을 체크하고 건강상태를 자가격리 앱에 올려야 한다. 5일째 되는 날에는 묵직한 택배 박스가 도착을 했다. 쌀 5킬로와 라면, 햇반, 김, 참치캔, 고추장과 된장 등 꽤 많은 구호물품이 들어 있었다.

학기를 마치지 못하고 돌아온 우리 아이들의 학업을 위해 온라인 수업을 시작했다. 학년마다 담당 스탭을 지정해  관리를 하기로 했다. 자율공부시간과 과제하는 시간, 영상 공부시간을 체크하며 아이들의 일정을 관리하느라 일주일이 빠르게 지나갔다.

 이틀 전 갑작스러운 천둥과 함께 쏟아지는 빗소리가 거세게 들렸다. 방안에만 있으니 우당탕 거리는 소리가 폭우를 연상케 했다. 살짝 문을 열었는데 마당을 뒹구는 건 빗물이 아니라 우박이었다. 창문으로만 보았던 꽃잎이 우박 세례를 받고 마당에 떨어져 있는 것을 보니 안타까웠다. 봄꽃은 감상도 못했는데 벌써 지고 있다니…

남은 1주 동안 해야 할 일을 정리하고 보니 생각보다 그 기간이 길지 않았다. 오히려 소중한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아깝기만 하다.
이제 꼭 반이 지났다. 앞으로 남은 한 주 동안 건강을 잘 지켜 봄맞이 준비를 해야겠다. 
그. 런. 데.
운동부족으로 찌는 살은 어찌할 것인가. 휴~


텅빈 탑승구

갑작스레 쏟아진 우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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