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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평선 Jun 21. 2020

천천히 돌려야 콩물이 곱다.

엄마의 손두부가 그리운 날

저녁무렵 장을 보러 나갔다가 북적대는 시장 한켠에서 조그마한 좌판대에 앉아 있는 할머니를 보았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큼직하게 써 놓은 글귀가 내 발걸음을 잡았다.
'내가 직쩝 농사 한 콩으루 매똘로 가라 맹그러써요.'
무슨 뜻인가 한참 생각다가 손두부 다섯모가 대야에 담겨 있는 것을 보고 피식 웃음이 나왔다. 문득 요양원에 계신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 이게 마지막이지? 진짜 더 없는거지?"
대야에는 불린 콩으로 그득했다. 노랗게 불은 콩에서 비릿한 냄새가 났다. 대답 대신 콩을 한국자 떠서 맷돌 입구에 넣는 엄마를 보며 심통이 났다. 어처구니를 붙잡고 빠르게 돌리는데 엄마는 급한 내 손을 지그시 잡았다. 천천히 돌려야 곱게 갈린다며 제멋대로 튀어나온 콩들을 조심스레 담아 넣는다.
콩은 맷돌 입구로 들어가 하얀 물이 되어 검정  맷돌을 타고 흘러 나온다. 한손은 돌리면서 다른 한 손으로 콩을 넣는 엄마의 모습이 신기했다. 나도 엄마처럼 국자로 콩을 떠 맷돌 구멍에 넣어 보고 싶었다. 그런데 콩을 신경쓰다 보면 맷돌을 갈던 다른 한 손은 멈춰 버린다. 아무래도 두 가지를 동시에 하는건 국민학교 2학년이었던 나에게 무리였나보다.
대야를 몇 번 더 교체한 후에 콩 갈기는 끝이 났다. 이제는 콩물을 짜내야 한다. 입으로 자루를 물고 양 손으로 붙들고 있으면 엄마는 갈아놓은 콩물을 자루에 붓는다. 입구까지 차면 자루를 묶고 짜기 시작한다. 뽀얀 콩물이 자루밖으로 뿜어져 나온다. 떡반죽 주무르듯 자루를 누르고, 주물러 짜면 투박했던 엄마의 손은 곱디 고운 새색시 손이 된다. 오랫동안 눌러 짠 자루속에는 굵은 콩 입자들만 남는다. 그렇게 모아진 비지도 큰 대야에 한가득이다. 이 녀석은 오늘 저녁 우리 동네 저녁 밥상에 오르게 되겠지.

아버지는 큰 가마솥을 말갛게 씻어 놓고 아궁이에 장작 불을 붙이고 있다. 빨갛게 타들어가는 장작 불에 콩물이 끓기 시작하면 커다란 주걱으로 저어줘야 한다. 팔팔 끓는 콩물은 넘실대는 하얀 파도가 되어 까만 가마솥을 뱅글뱅글 돈다. 구수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한다.
콩물이 끓으면 굵은 장작을 끄집어 내고 간수를 넣어 다시 저어준다. 콩물이 몽글몽글 뭉치기 시작하자 엄마는 대접에 떠서 고소한 양념장을 곁들여 마당에 차려 놓는다. 두부 주변에는 간수물이 남아 있어 살짝 연둣 빛깔이 돈다. 뜨끈한 초두부가 입안에 퍼질 때 그 고소한 부드러움은 콩을 갈던 수고로움까지 모두 잊게 한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 콩물이 제법 엉기면 자루에 붓고 입구를 묶은 다음 맷돌을 올려 놓아 간수 물을 짜낸다.

콩물이 빠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엄마는 구수한 순두부찌개를 끓인다. 고추기름이 동동 뜬 매콤한 순두부는 콧등에 작은 땀방울을 만든다. 늘 소량의 식사를 하던 아버지도 밥 한그릇 뚝딱 비우고 빈 그릇을 내민다. 아버지는 꾹꾹 눌러 담은 밥 한 그릇에 살짝 눈을 흘기면서도 맛있게 비워낸다.

저녁무렵 엄마는 자루에서 흰 덩어리를 꺼내 큼직하게 잘라 한덩이씩 비닐에 담아 준다. 동네분들께 두부와 비지를 나눠드리고 돌아오는 길에 해는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 간다. 윗동네와 아랫동네까지 동행해 주었던 친구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집으로 가는데 대문 밖까지 묵은지 볶는 냄새가 침샘을 자극한다.
오늘 저녁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두부김치 두루치기이다. 학교에서 막 돌아 온 오빠들도 둥근 식탁에 모여 앉았다.
잘 볶아진 시큼한 김치는 손으로 찢어야 제맛이다. 자루의 주름 모양이 선명한 손두부 한 점을 올려 둘둘 말아 입에 넣으면 감탄사가 절로 난다.
시큼하고 매콤 짭쪼름함이 고소한 손두부와 어우러져 다섯식구를 행복하게 한다. 내 어린 시절 추억은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았다.  

할머니에게 손두부를 몽땅 달라고 했다. 두부 다섯덩이를 담아 주시며 묵은지는 덤이라고 하시는 할머니의 미소가 정겹다.
내일은 엄마를 위해 두부김치 두루치기를 해야겠다. 입맛이 없어서 통 못드신다던데 추억의 맛이라도 드시게 해야지.
바쁘다고 찾아뵙지 못했던 무심함을 용서바라는 마음으로 엄마를 모시러 간다. 맷돌을 돌리듯 운전대를 잡은 마음이 바쁘다.
'서두르지 마라. 천천히 오렴.'
천천히 돌려야 콩물이 곱다던 엄마의 잔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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