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평선 Jan 15. 2021

그곳에 가고 싶은데

화장실 문화

찬 음료를 여러 잔 마신 탓이다. 여행 다녀온 이야기를 쉼 없이 하는 그녀의 말을 끊어야 했다. 가고 싶은 마음이 큰 만큼 그곳은 더욱더 멀게 느껴졌다. 미로를 찾아가듯 뱅글뱅글 돌아 안으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나를 맞아주는 하얀 비데가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반갑다.

  속이 편안해져서 일까. 아니면 좋은 향기 덕분일까. 급했던 마음에 여유가 생기니 그제야 주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작은 꽃병에 담긴 노란색 프리지어와 고풍스러운 액자가 두루마리 화장지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다. 소지품을 올려놓는 선반 위에는 한국어, 영어, 일어, 한자로 잊은 물건이 없는지 주변을 살펴보라는 글귀가 앙증맞게 쓰여 있다. 주변을 둘러보다가 피식 웃음이 나왔다. 변기 위에 발로 올라앉지 말라는 글과 올바른 화장실 사용법이 자세히 그려져 있었다. 문득 우즈베키스탄 학생들이 생각났다.



  십여 년 전, 우즈베키스탄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다. 한국 기업에 취직하기를 원하는 그들은 우리말 배우는데 열심이었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그들에게 한글의 모음과 자음, 인사법, 존댓말을 가르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유치원 아이들에게 글자를 가르치듯 그림카드를 만들고 몸으로 표현하며 재미있게 가르쳤다. 그들은 한국어를 빠르게 익혔고, 나에게 '최고의 선생님', ' 한국 엄마'라고 불렀다.

  어느 날 그들에게 저녁식사 초대를 받았다. 넌 non이라고 하는 그들의 주식인 빵과 양고기에 양파, 양배추, 감자, 당근 등을 넣어 만든 ‘슈르빠’ 우리의 볶음밥과 비슷한 ‘쁠롭’을 차려 놓았다. 고기와 야채를 빵에 싸서 먹는 것이 낯설었지만 느끼한 고기와 구수한 빵이 어우러져 담백하고 맛도 좋았다. 학생들은 한국에 살면서 느끼는 여러 가지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동안 배운 것을 복습하기도 했다.

  늘 조용하던 학생 바띠오르가 수업시간처럼 손을 번쩍 들었다.

  “한국사람들은 왜 다 먹어요?”

 한 손에 넌을 들고 고기를 막 올려놓던 손길을 슬그머니 멈췄다.

  “한국사람들은 밥 먹어요, 나이 먹어요, 마음먹어요. 밥 먹으면 밥 없어져요. 나이 먹으면 애기 돼요? 마음먹으면 어게 되는 거예요?”

 웃음이 나왔지만 진지하게 묻는 학생에게 그 말의 의미를 알려주었다.  아무런 고민 없이 써 왔던 우리말들이 그들에게 생소하게 들렸다는 것이 신기했다.

  느끼한 음식을 많이 먹어서 그런가 속이 점점 불편해 왔다. 뒤를 보기 위하여 학생들의 기숙사 화장실을 찾아갔다가 기겁하여 다시 나오고 말았다. 화장실 여기저기 신문지가 널려 있고 앉아야 할 변기에는 흙 묻은 신발 자욱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더구나 한쪽 구석에는 사용하던 신문 조각들도 수북이 쌓여 있었다. 바로 나온 나를 보며 화장실에 무슨 문제가 있냐고 묻는다. 나는 학생들에게 좌변기 사용법을 알려 주고 신문지 대신 화장지를 이용할 것을 당부했다. 그들은 좌변기에 앉아서는 볼일을 볼 수 없다고 불편을 호소했다. 그리고 우즈베키스탄에서는 화장지가 매우 귀해 뒤를 처리할 때는 신문이나 공책을 뜯어 그것을 구겨 사용한다고 했다. 그들의 말에 웃음이 나왔지만 웃을 수가 없었다. 나도 어렸을 때 수세식이 아닌 부춛돌 뒷간에서 신문지를 사용했다.

  서양에서 두루마리 화장지는 toilet paper 또는 toilet roll로 불리며 오로지 화장실에서만 사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서양인들은 우리나라 식탁에 놓여있는 두루마리 화장지를 보면 경악을 금치 못한다고 한다. 사실 한국인이 쓰는 두루마리 화장지도 화장실 전용이다. 두루마리 화장지의 포장지에 쓰여 있는 사용상 주의사항에 보면 ‘화장실용으로만 사용할 것, 식당이나 가정 등에서 냅킨 용도로 사용하지 말 것’이라고 쓰여 있다. 하지만 우리 집에도, 대부분 한국인들의 집에도 두루마리 화장지는 식탁 위에 버젓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어쩌면 변기 위의 선명한 신발 자국도 문화 차이 일 뿐이다. 이것을 보고 미개하다느니 더러운 사람들이라는 말로 그들을 폄하할 수 있을까.

  

우리집 식탁에 있는 두루마리 화장지
       제주 똥돼지                                     남자소변기 (호자 )                                    


  우리나라 옛 선조들은 뒷간을 자연과 생활환경에 따라 다르게 만들었다고 한다. 농촌 지역에는 구조가 단순하며 농사짓기에 쓸모가 있는 부춛돌 뒷간을 만들었는데 볼일을 본 뒤 왕겨를 뿌려주어 냄새를 막아주었다. 이렇게 발효된 것은 농사짓는데 없어서는 안 될 훌륭한 거름이 되는 것이다. 양반들은 땔감도 넉넉하고 불 때는 방도 많아 이층 잿간을 지었는데 재는 알칼리 성분이 많아 산성화 된 땅을 살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제주도의 똥 돼지 간 역시 주변 환경을 잘 이용하여 과학적으로 만든 뒷간이다. 제주도는 뱀이 많아 천적인 돼지를 볼일 보는 장소에 키우게 되었고 돼지는 인분을 먹으며 자란다. 이렇게 자란 똥돼지, 즉 제주 흑돼지는 비계가 적고  누린내가 나지 않아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다고 한다.

  전통 뒷간은 조상들의 지혜가 담긴 화장실이다. 인간과 동식물이 살아가는 동안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원리를 이용한 자연 친화적인 장소이다. 하지만 청결한 수세식 화장실이 우리의 생활에 스며들어왔고  언제부터인가 좌변식이 아닌 곳을 불편하게 느끼고 있다.

  친구들과 일본에 여행 갔을 때이다. 자유여행을 하면서 일본인들이 살고 있는 집을 임대하는 에어비엔비로 일본 집에 머물게 되었다. 작지만 아늑한 다다미방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더욱 인상 깊었던 것은 바로 화장실이었다. 변기를 사용하고 물을 내리면 변기 물통 부분에 작은 수도꼭지가 있어 거기서 물이 나와 손을 씻을 수 있게 만들어져 있다. 이렇게 손을 씻은 물은 모아져서 변기 물을 내리는데 재 사용되는 것이다. 우리가 편리하게 사용하고 있는 수세식 화당실은 한번 사용할 때마다 9리터의 막대한 물을 사용한다. 을 아끼려는 들의 지혜를 본받아야 하지 않을까.

  최초의 수세식 변기는 16세기 말 영국에서 발명하여 지금의 모양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수세식 변기가 잘 발달된 유럽에서도 불편함을 겪어야 했다. 독일에서 유학 중인 딸, 아들과 유럽 여행을 할 때였다. 여름이라 햇볕은 따갑고 많이 걷다 보니 찬 음료를 자주 마셔야 했다. 하지만 딸은 음료를 아껴먹는조금 후에 그 이유를 알았다. 독일은 공중화장실에서 사용료를 받는다. 요금은 50센트에서 1유로 정도인데 우리나라 돈으로 약 650원에서 1300원 정도 하는 금액이다. 백화점, 기차역 등 우리나라에서는 편하게 다니던 곳이 갈까 말까 하는 고민의 장소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은 화장실 가는 것을 참았다가 기차를 탄 후 볼일을 보기도 했다. 한국의 곳곳에 설치된 무료 화장실을 마음껏 사용하던 내게는 큰 불편함이었다. 그곳에 가면 근심을 덜어주어야 하는데 유럽의 그곳은 근심이 쌓이는 곳이라는 인상을 갖고 돌아왔다.

변기모양의 화장실 박물관 (경기도 수원)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수원은 어느 곳보다 화장실 문화가 발달되어 있다. 수원 곳곳에 세워진 공중 화장실은 모습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깨끗하고 좋은 향기가 나며 아름다운 음악까지 들을 수 있어서 오래 머무르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그것은 고 심재덕 전 수원시장이 ‘아름다운 공중 화장실’ 운동을 벌인 덕이 크다고 한다, 그는 살던 사택을 변기모양으로 만들 정도로 화장실 운동에 힘을 썼다. 지금은 그 사택을 개조하여 '해우재'라는 화장실 박물관을 만들었는데, 이는‘걱정을 해결해 주는 곳’이라는 절의 해우소 뒷간에서 따 온 말이다. 화장실은 변소, 측간, 뒷간 등 여러 이름이 있다.

'해우소'는 이름도 예쁘고 의미도 좋은 것 같 우리집도 해우소라 부른다.

  카페 해우소에서 볼일을 마친 후 친구에게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다. 마음의 모든 근심이 풀린 듯 귓등으로 듣던 그녀의 여행 이야기를 다시 제대로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작가의 이전글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