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돗물은 하얀 거품을 뿜어내며 욕실 바닥을 적셨다. 물을 처음 본 사람처럼 오래도록 수돗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찬 수돗물에서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것 같다. 이대로 샤워라도 하고픈 기분이다.
며칠 전 한파주의보 문자가 연일 날아들었다. 평소 준비성이 철저한 남편은 잠자기 전에 수돗물을 한 방울씩 떨어뜨리라고 당부를 하고 출장을 떠났다.
똑 똑 또르르……. 똑 똑 또르르…….
수돗물 소리는 리듬을 타고 꿈속에서 조차 장단을 맞췄다. 덕분에 영하로 떨어지는 추운 아침에도 수돗물은 시원스레 쏟아져 밤새 속삭였던 리듬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했다. 외출 준비를 마치고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사람들의 등 뒤에서 힘없이 나풀거리던 모자 깃털들도 동그랗게 얼굴을 감싸 안고 바람과 맞서 싸운다. 옷을 몇 겹이나 겹쳐 입었는지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듯 칼바람은 비집고 들어갈 빈틈을 찾는다. 얼어붙은 거리엔 건물들조차 추워 떨고 있다. 옷깃을 단단히 여미고 목적지로 향했다. 수돗물을 꽉 잠그고 나와서 걱정은 됐지만 몇 시간 후면 돌아갈 것이기에 여유를 부렸다.
열두 시쯤 집에 돌아와 손을 씻으려고 수도꼭지를 틀었다. 앗! 물이 나오지 않는다. 그새 수도가 얼었던 것이다. 뜨거운 물 두 양동이를 부었지만 동장군 위세에 눌려 항복을 한 듯 꽉 다문 입은 열리지 않는다. 삼한사온이란 옛말도 무색하게 며칠째 기온은 계속 내려가니 미동 없는 언 수도 녹이기를 일찌감치 포기했다. 물 없이 산 지 삼일 째. 화장실에 가야 하는데 문득 김용택 시인에게 들은 강의 내용이 떠오른다.
“화장실 갈 사람, 선착순.”
30여 년 시골 초등학교 교사를 하면서 섬진강 살리기 운동을 하고 있는 그의 집은 아침마다 세 사람이 모여야 화장실 물을 한번 사용할 수 있다고 했다. 그의 강의를 듣고 우리 집도 한때 이것을 실천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그런데 그 일을 다시 해야 할 현실이 오고 말았다. 어렵게 구해 온 물을 함부로 쓸 수 없으니 이 규칙을 적용해야만 했다.
날씨가 조금 누그러지자 남편과 수도 녹이기 미션을 시작했다. 양동이 가득 물을 구해 와서 끓여 붓기 시작했다. 보통 두 양동이 물을 부으면 얼음이 풀어지는데 네 양동이의 물을 부어도 꿈쩍하지 않는다.
“수돗물이 나오기 전에 내 몸부터 얼겠다. 이게 마지막이야.”
다섯 번째 양동이의 물을 붓는 순간 쿨럭 대던 수도에서 봇물 터지듯 물이 터져 나왔다. 심봉사가 눈을 떴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터졌다. 수돗물이 터졌어.”
샤워도 하고, 빨래도 하고, 화장실도 갈 수 있다는 생각에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뜨거운 물 다섯 양동이를 먹고서야 물을 토해내니 뜨거운 물은 시원한 수돗물을 끌어올리기 위한 마중물이었나 보다.
초등학교 때 동네에 우물이 하나 있었다. 이 우물 하나로 동네 사람들의 식수를 해결해야 하니 빨래는 개울에서 했고, 그나마 우물물도 빨리 긷지 않으면 바닥이 드러나 물을 아껴 쓰던지 이웃집에서 꾸어 와야 했다. 남들에게서 꾸어오는 걸 싫어하는 아버지는 우리 집 마당에 펌프를 놓기로 했다. 몇 길 땅을 팠을까. 수맥은 보이지 않고 깊은 바닥엔 커다란 바위가 드러누워 있었다. 더 이상 땅을 파는 건 헛일이라고 모두가 입 모아 말할 때 아버지는 그 바위를 쪼개서라도 더 파야한다고 주장했다. 혀를 차며 억지로 바위를 쪼개던 기술자가 깊은 구덩이에서 소리를 쳤다.
“터졌다. 물이 터졌어.”
새 펌프에 물을 붓고 빠르게 펌프질을 하니 시원한 물줄기가 마당을 적시도록 세차게 뿜어져 나왔다. 우리 집 암반수는 물맛도 좋을 뿐 아니라 시원하기까지 하여 동네 사람들의 갈증을 덜어주는 일등공신이 되었다. 펌프 옆에는 늘 양동이 가득 마중물을 채워 놓아야 했다. 먼지가 앉은 깨끗하지 못한 물이건, 흙물이건 물을 마신 펌프는 곧 시원하고 깨끗한 생수를 뿜어내었다. 그러나 물을 넣고도 정성스레 펌프질을 하지 않으면 그 물은 마중물 역할을 하지 못하고 펌프 속으로 꼬르륵 들어가고 만다. 어릴 적에 힘이 약한 내겐 펌프질도 연습이 필요했다. 모아 놓은 물을 다 쓰고도 땅속 깊숙이 잠자고 있는 물줄기를 끌어올리지 못했던 것이다.
펌프로 물을 끌어올리려면 마중물과 정성스러운 펌프질이 필요하듯 누군가를 맞이하기 위해선 그의 깊숙한 곳까지 손을 뻗을 한 바가지의 다가섬과 정성스러운 진실함이 필요하다.
은수를 만난 건 사 년 전 필리핀 국제학교 기숙사 사감으로 있을 때였다. 먼 나라로 유학을 온 은미(가명)는 사춘기를 겪으며 방황하던 아이였다. 그래서 누구든 다가오기만 하면 찔러버리겠다는 듯 날카로운 가시를 품고 있었다. 어느 날 한국에 있는 은미 어머니로부터 연락이 왔다. 은미가 며칠 동안 카톡 문자도 보지 않아 걱정이라며 수업은 잘 따라가고 있는지, 기숙사 생활은 잘하고 있는지를 묻는 내용이었다.
은미와 기숙사 옆 산책로를 걸었다. 우리는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찬 기운이 고요함마저 얼려버릴 것 같다.
“제 앞에서 공부 얘기는 꺼내지도 마세요. 지금도 간신히 버티고 있는 거라고요.”
어떤 위로의 말도 얼음에 꽉 막힌 수도보다 더 풀릴 것 같지 않았다. 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은미를 바라봤다. 온몸 가득 반항의 기운을 품고 있던은미는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그냥. 엄마 마음은 똑같은데 어떤 말이든 잔소리로만 들릴 것 같아서.”
은미가 와락 안겨 운다. 가슴속에 꼭꼭 숨겨왔던 눈물샘이 터져 버렸나 보다. 함께 울었다. 친구들에게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훌쩍 떠난 유학, 낯선 나라에서 선후배가 함께 어울려 지내야 하는 기숙사 생활, 더구나 수업은 온통 영어로 하니 어린 은미에게는 모든 것이 짊어지기 버거운 짐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한참 울고 나더니 은미는 씩씩해졌다. 아니 씩씩해진 척했다. 그러다 버거울 때면 눈물 터트릴 가슴을 빌리곤 했다. 그러면 우리는 함께 울었다. 은미에게는 따뜻한 위로의 말이 아니라 함께 울어 줄 가슴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힘겹게 견뎌온 은미에게서 전화가 왔다. 대학 합격소식을 전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명랑하다. 따뜻한 봄날. 우리는 다시 만나 호탕한 웃음을 날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