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평선 Mar 01. 2021

'책비'가 되어~

책 읽어주는 사람

   “오늘은 여기까지. 뒷이야기는 다음 주에 계속됩니다.~"

 책 읽어주는 소리에 조용히 귀 기울이던 아이들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진다.

 

 "아~안돼요. 그래서 주인공은 어떻게 되었어요?"

“에이, 뭐예요. 끝까지 읽어 주세요.”


 뒷이야기가 어떻게 될지 상상해 오라는 숙제를 내주면 아이들은 실망 반, 기대  표정 하며 가방을 둘러멘다. 문을 나서는 아이들은 어느새 뒷이야기 나누며 조잘조잘 참새 무리가 된다. 아이들 어떻게 이야기 꾸며갈지 궁금하다.

 

 책에 관심을 갖 시작한 것은 처음으로 여선생님이 담임이 되었던 초등학교 4학년 때다.

햇볕에 그을린 시골 아이들의 구릿빛 피부와 달리 서울에서 온 선생님은 새하얀 얼굴에 밝은 색 원피스를 즐겨 입었다. 뜨거운 여름 태양도 노란 양산 속에 숨은 선생님의 뽀얀 얼굴을 태우지 못했다. 씻는 것을 싫어했던  만질만질한 조약돌로 얼굴이며 손등을 문지르고 또 문질러 댔다. 선생님처럼 하얀 살결을 갖고 싶었으리라.

 시골 아이들의 우상이던 선생님이 책을 읽어 줄 때면 장날 같던 교실도 쥐 죽은 듯 조용다. 시냇물 소리 같은 선생님의 목소리는 우리 반 친구들을 책 속 배경으로 데리고 갔다.

‘알프스 소녀 하이디’를 읽어 주면 우리는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알프스의 푸른 산자락을 뒹굴었고, ‘보물섬’을 들으며 보물지도를 하나씩 들고 멋진 탐험가가 되었다. ‘플란다스의 개’를 읽어 줄 땐 서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소맷부리로 눈물, 콧물을 훔치곤 했다. 선생님 덕분에 학교 도서관 책들은 반 아이들의 친구가 되었다. 쉬는 시간도 아이들 손은 공깃돌 대신 책을 들고 넘기느라 바빴다.

드라마 "신입사관 구해령'


 조선 후기에 한글 소설이 쏟아져 나오면서 일반 서민들까지 책에 관심이 많아졌다. 하지만 그 시대는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아 일일이 손으로 써야 했기에 책이 귀했다. 또한 글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 책 읽어주는 사람이 필요했다.  당시 책 읽어 주는 남자 '전기수'는 조선의 인기 연예인이었다. 그가 나타나면 사람들은 그의 재담을 듣기 위해 모여든다.

 조선 정조 때 종로 담뱃가게에서 벌어진 일이다. 전기수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그는 임경업전을 읽었다. 임경업 장군이 역적 김자점의 흉계로 목숨을 잃게 되는 대목에서 갑자기 한 사내가 칼을 들고 뛰어든다. 이야기가 절정에 이르자 이야기와 현실을 혼돈한 사람이 담배 써는 칼로 전기수의 목을 내려친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전기수의 실감 나는 입담이 불러온 황당무계한 사건이었다.

 인기가 많은 전기수는 부녀자들에게까지 불려 갔다고 한다. 양반집 부녀자들에게 가려면 여장까지 하고 가야 했기에 자연스레 등장한 것이 ‘책비’라는 책 읽어주는 여자이다. 책비는 비록 신분은 낮았지만 책 읽어주는 대가로 돈을 버는 조선대 직업여성이었다.

드라마 '신입사관 구해령' 부녀자들 앞에서 책 읽어주는 책비

 전기수나 책비가 책을 읽어줄 때 인기를 얻기 위해서는 그냥 글만 읽어서는 안 된다.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의 희로애락에 감정을 실어 구성지게 읽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책에는 웃고 우는 대목, 높낮이와 표정, 손짓 발짓의 모양새까지 부호로 표시해 두었다고 한다. 관객을 몇 번 울리느냐에 따라 그들의 인기에 등급을 매겼다고 하니 그들이야말로 그 당시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독서 전문 직업인인 것이다.      

  

 요즘 우리나라 아이들은 일찍 한글을 뗀다. 책 읽기에 대한 중요성을 아는 부모들은 아이들이 글자를 익히는 순간 책을 안겨 준다. 읽는 것이 아이들만의 몫인 양 책 읽기의 중요성만 강조하다 보니 아이들에게 책 읽기는 또 다른 숙제가 되고 만다.

 읽는 것보다 듣는 것이 상상력을 더 자극하고 흥미롭다고 한다. 특히 아빠의 목소리로 읽어줄 때 아이의 마음이 안정되고 평안함을 느낀다고 한다. 또한 책 읽어주기는 아이들이 듣기를 싫어할 때까지 들려주어야 한다고 독서 전문가들은 말한다.


 “오늘은 잠들지 않을 거예요.”

딸은 눈가에 그렁그렁한 눈물을 매단 채 책을 덮는 내 팔에 매달린다. 아이들이 잠자기 전 매일 여섯 권의 책을 읽어 주었는데 그 날 마지막에 읽어준 책은 ‘소가 된 게으름뱅이’였다. 매일 게으름을 피우며 잠만 자다가 소 탈을 쓰고 소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딸의 눈은 소 눈처럼 커다래졌다. 매일 아침 동생보다 늦게 일어나는 자신을 떠올렸나 보다. 딸은 졸린 눈을 비비며 여섯 권의 책을 또 들고 온다.

  “잠자다가 늦게 일어나면 소가 될지도 모르잖아요.”

 잠을 안 자고 버티겠다더니 한 권을 다 읽기도 전에 딸은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평소 좋아하던 '노란 양동이'를 듣다 잠이 들었으니 꿈속에서도 주인공 여돌이와 함께 양동이의 주인을 기다릴 것이다.

 딸은 지금까지 책을 좋아하는 이유가 매일 밤 책을 읽어 주던 엄마의 목소리를 따라 마음껏 상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딸의 칭찬에 행복한 엄마가 된다.

 

  나는 오늘도 책 잘 읽어주는 선생님. 책비가 되고자 아이들에게 달려간다. 아이들의 상상 속 뒷이야기를 듣는 것도 내겐 큰 즐거움이다.

작가의 이전글 차가운 거리에서 만난 '엉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