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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무슬림 선원

by 연후 할아버지

4) 무슬림 선원


인도네시아는 무슬림 국가다. 1997년 IMF 사태는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라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국가들도 덮쳐 심각한 경제적 위기에 휩싸이게 했다.


서울에서 육상 근무를 하고 있던 내가 인도네시아로 나가게 된 게 그 무렵이었다. 낡은 대형 유조선(VLCC)을 사서 유조 탱크가 없거나 부족한 항구의 외항에 띄워 놓고, 원유 탱크 대용으로 빌려 주고 돈을 벌던 회사였다.


항해를 하지 않는 선박이라 선원들도 특별한 능력이나 자격증이 필요치 않아서 현지에서 조달했으며, 월급도 은행을 통하지 않고 배에서 직접 지급했다.


월급날 오후, 현지 선원 한 명을 시내에서 봤다. 오전에 지급받은 달러를 인도네시아 돈으로 환전해 가족에게 보내려고 상륙한 것 같았다. 그런데 모스크(이슬람 사원)를 짓겠다고 모금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한참을 망설이던 그는 결단을 내린 듯 씩씩한 걸음걸이로 그 사람들에게 다가가더니 손에 들고 있던 뭉칫돈을 그대로 주고 나서는 귀선하려고 통선장으로 향했다, 일부만 주고 나머지는 가족에게 붙인다면 은행을 들렸다가 가는 게 맞는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가 되지 않는 이상한 장면이었다.


그걸 내 눈으로 직접 봤으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선원을 불러 대화를 나눠 봤다.

“방금 그들에게 준 건 월급 전액인가? 일부분인가?”

“전액입니다.”

“가족들에게는 한 푼도 보내지 않았나?”

“그렇습니다.”

“그러면 자네 가족들은 한 달 동안 어떻게 사나?”

“제가 돈을 벌지 않을 때도 살았으니. 알라께서 보살펴 주시리라 믿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헌금하는 걸 보며 저도 평생에 한 번은 그렇게 해 보고 싶었습니다.”


누가 그들을 야만인이라 할 것인가? 이 사람보다 확실한 신념을 갖고 종교를 믿는 사람을 나는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내 주머니를 털어 가족에게 송금하라며 그에게 줬다. 그는 알라의 보답으로 여겼겠지만 그건 내가 상관할 문제가 아니었다.


이 선원을 보고 나서 나는 이슬람교도들에 대한 나의 편견이 심했음을 인정하고 반성을 많이 했다. 무슬림은 무조건 야만인이고 테러리스트라는 공식을 만든 건 서방 언론들의 세뇌 교육의 결과물이란 걸 깨달았던 것이다.


그들이 믿는 종교의 교리에 동의하거나 개종을 할 생각은 조금도 없지만, 적어도 악의적인 선전에 속거나 부화뇌동해서 편파적인 시각은 갖지 않아야 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아무튼, 이런 일이 있고 나서 인도네시아의 다른 무슬림 선원들과도 대화를 나눠 보니 그들의 영혼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맑고 순수한 것을 발견했다.


그런데 그들과 이야기해 보면 평생에 한 번이라도 메카로 성지순례를 가고 싶다는 것이 한결같은 소원이었다. “휴가 중에 잠시 다녀오면 되겠네.” 했더니 “불가능하다”고 했다. 성지순례는 도보로 다녀와야 하는데 휴가기간이 그렇게 길지 않단다. “인도네시아는 섬나라이고 메카는 대륙에 붙어 있는데, 어떻게 걸어가느냐?”라고 물었더니 “싱가포르까지는 배를 타고 가서 출발하면 된다.”고 했다. 내 생각으로는 배나 비행기나 뭐가 다를까 싶었지만, 섬에서 자란 사람들은 배를 타는 건 걸어가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인도네시아 국민이라고 모두 무슬림은 아니고 통계를 보면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도 1할 정도 된다고 나와 있다. 그런데 선원들 가운데에는 가톨릭 신자가 3할도 넘는 것 같았다. 그 원인을 물어봤더니 이 나라에서는 무슬림이 아닌 이교도로 낙인찍히면 공무원은 물론 기업체 취직도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선원의 길로 들어섰단다.


그들과 함께 성당을 가 봤더니 담장 높이가 10미터는 넘어 보였고 정문에서 신분 확인이 되지 않으면 출입도 자유롭지 않다고 했다. 신도들을 보호하기 위한 고육지책이라고는 하지만, 밖에서는 십자가도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서 미사를 드린다니 포교 활동인들 제대로 되겠나? (내 눈에 이 나라 출신 가톨릭 선원이 특별하고 예뻐 보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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