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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몬테니그로 1기사, 베라 니코

by 연후 할아버지

5) 몬테니그로 1기사, 베라 니코


<검은 산>이라는 뜻을 가진 <몬테니그로>는 <아드리아 해>의 동남쪽에 있는 면적은 경기도와 비슷한데 인구는 60만 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 작은 나라다, 유고 연방이 쪼개질 때는 세르비아에 포함되었는데, 그 후에 분리 독립하여 독자적인 공화국이 되었다.


지형은, 북쪽의 <보스니아>와 동쪽의 <세르비아> 사이는 험준한 산악 지방이라 내왕이 거의 불가능하고, <아드리아 해>와 접한 서쪽도 깎아 놓은 듯한 절벽이 이어져 항구로 사용하기가 어려운데, 오직 남쪽에만 약간의 평야 지대가 있어서 농사가 가능한 천연 요새처럼 생긴 나라다. (그런 자연 덕분에 요즘은 제법 유명한 관광지로 변했다는 말은 들었다.)


이런 지리적 특성 때문이었는지 일찍부터 서로마보다는 동로마와 가깝게 지내 정교를 믿었고, 동로마제국이 망하자 최후의 보루처럼 버텼는데, 오랜 싸움에 지친 <오스만 튀르크> 술탄도 마침내 정복을 포기해서 독자적인 세력으로 남았고 지금까지 역사를 이어왔다.


무슬림과의 오랜 전쟁의 여파인지 지금도 <몬테니그로>는 작은 나라이지만 다른 유럽인들은 그곳에서 ‘축제가 끝나면 하늘의 새가 남아나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그 나라 남자들을 거칠고 강한 투사의 대명사처럼 여긴다. 하지만 그 당사자들은 이런 폐쇄된 공간에서 탈출하고 싶은 욕망이 강해서, 작은 인구에도 불구하고, 세르비아나 크레이샤를 통해 선원 시장에 진출한 <몬테니그로> 사람들은 상당히 많다.


1기사 <베라 니코>도 그중 한 명이었다. 덩치는 산만 하고 힘은 좋았지만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해서, 다른 기관장들은 동승을 꺼리던 친구였는데 내가 살펴보니 영리하고 이해력은 빨라 조금만 도와주면 되겠다 싶어서 개별 교습에 들어갔다.


가르쳐 보니 과연 예상했던 대로 스펀지처럼 흡수력이 좋았다. 기대를 않고 시작했는데 의외로 좋은 재목이었다. 게다가 체력이 좋아서 내가 하다가 지쳐 중단한 작업을 며칠 밤을 새더라도 혼자서 끝내 놓으니 미워할 수가 없었다.


당시는 세계에서 가장 덩치가 크다는 배에 승선하고 있을 때라, 수영장도 있었고, 선원들끼리 부서 대항 농구나 축구 시합도 자주 했는데, 녀석은 운동에도 만능이었고 성격도 원만해서 기관실 일 이외에도 내가 총애할 요소는 많았다.


동족들의 유전자를 이어받은 그는 생긴 모습은 야생 곰처럼 험상궂었지만 마음은 비단결처럼 곱고 온유한 품성을 지녔으며. 끈질기고 단호한 면도 있었으니 나에게는 안성맞춤인 젊은이였다.


한동안은 <베라>라는 이름으로 불렀는데, 한번은 내가 농담 삼아 ‘베라완은 인도네시아어로 쓰레기란 뜻이고 니코는 사내아이라는 말인데 어느 쪽이 네 참이름이냐?’ 하고 물었더니 “니코”라고 대답한 후에는 모든 선원에게 <베라>라는 이름의 포기를 선언하고 아무도 그렇게 부르지 못하게 했다. (하선 후 개명했는지도 모르겠다.)


폐쇄된 지역 출신답게, 편협한 시각과 고정관념 때문에 엉뚱한 면도 가끔 있었다. 평소에는 전연 느끼지 못하고 있다가 특이한 행동이나 돌출 발언을 할 때면, 다른 별에서 방금 도착한 외계인을 보는 듯한 생소함을 느끼기도 했다.


예를 들면, <몬테니그로>가 지정학적으로는 유럽과 세계의 중심이고, 자신이 믿는 <올소독스>는 세계에서 신자 수가 가장 많은 종교라고 우긴다. 게다가 <정교>라는 뜻 그대로 ‘절대적인 진리’를 표방하므로 가장 좋은 종교라고 나에게 선교까지 하려고 든다.


지도에서 몬테니그로가 세계의 중심으로 보이는 건, 그 나라를 한가운데 놓고 그렸기 때문이고, 정교 신자가 많아 보이는 건 주변에 정교 신자밖에 없기 때문이라 설명해 줘도 이해를 하지 못했다. 아니, 할 생각 자체도 없는 단순한 친구다.


그는 물론 철저한 정교 신자이고, 자신의 믿음대로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는 면은 있다. 그렇다고 나의 신앙을 버리고 그를 따라가지는 않으리라는 것 정도는 눈치로도 알 수 있을 텐데, 그가 보기에는 진리를 외면하는 내가 안타까운 것이다. 그의 정성어린 설명을 통해 나도 그 종교에 대한 시야를 조금 넓히기는 했다.


가톨릭이 로마의 국교로 정착한 후 그 중심지도 로마교회였는데, 콘스탄틴 대제가 지금의 이스탄불에 새로운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건설하고 천도한 후에는 무게 추가 그곳으로 옮겨지며 갈등이 시작되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 당시는 황제를 모시는 지역 교구로서 콘스탄티노플이나 로마가 같은 지위였지만, 전자는 황제의 힘을 등에 업었고 후자는 베드로로부터 내려온 전통을 내세우며 서로 수위권을 주장하는 다툼이 계속되었다. 니코의 주장대로 도시의 크기도 차이가 났으니 신도 수도 그쪽이 많았을 것은 자명한 이치다.


그러나 오스만 튀르크 술탄의 침입으로 동로마제국이 망하고 그곳에 살던 신도들이 뿔뿔이 흩어진 다음의 상황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야윈 놈은 쳐다만 봐도 섧다는데, 유랑하는 입장에서는 다시 중심이 되어 설치는 로마교회가 꼴 보기 싫었을 것은 뻔한 이치다.


부부도 마찬가지다. 큰 일이 닥치면 합심하고 노력하며 싸우지 않는데 대부분의 이혼 사유는 작은 것에서 출발한다고 하듯이, 가톨릭과 정교가 분리된 표면적인 이유도 사소한 문제라 대화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분쟁은 16세기에 로마교회에서 새로운 달력을 제정하면서 북반구의 태양 절기에 맞춘다는 명분으로 날짜를 13일이나 조정한 데서 발생하였다. 예수님의 탄신일인 크리스마스도 당연히 앞당겨졌다. 당시의 로마에서는 동지(태양절)을 전후한 축제를 열었는데 그 시기와도 거의 맞아떨어지는 정점은 있었다.


동방교회에서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인간으로 강생하신 날을 무엄하게도 인간이 편리한 대로 변경할 수 없다며 당연히 반대했고 자기들은 <카이사르 시저>가 제정한 <율리우스력>을 계속 쓰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다 보니 거룩하게 지내야 할 크리스마스가 새로운 달력에서는 1월 7일이 되어 이중과세 비슷하게 되어, 해가 바뀌어 산뜻하게 출발해야 하는 신년이 어수선해져 버렸다.


그때부터 <로마>와 인근한 서유럽 교회를 제외한 동쪽의 교회들 중에서 동로마제국에 속했던 나라와 교회들은 가톨릭이라는 명칭 뒤에 올소독스(Orthodox)라는 말을 붙여 부르다가, 차츰 앞쪽은 생략하고 뒤쪽만 남겼다는데, 이 말에는 영어로 ‘절대적(absolute)’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를 중국에서 번역하며 정교(正敎)는 말이 만들어졌다.


콘스탄티노플에서 탈출한 신도들이 가장 많이 모여 살던 러시아나 그리스 교회들이 주축이었는데, 동방정교라고도 부르는 건 그들이 대부분 로마에서 볼 때는 동쪽에 위치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뿔뿔이 흩어져 있어서, 일사분란하게 움직일 입장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로마교회처럼 중앙집권제가 아닌 철저한 지방분권제를 시행할 수밖에 없었는데, 당시의 전통이 아직도 유지되어, ‘완벽하다’는 호칭과는 다르게 지역마다 전례의 형식이 약간 다르기도 하고 통일된 의견의 도출도 쉽지 않다고 한다.


<몬테니그로>처럼 끝까지 항거하거나 점령당한 지역에 남아 자신들의 신앙을 지킨 곳들도 있었다. <세르비아>나 <루마니아> <불가리아> 같은 동구권 나라들인데, 중간에 소련의 위성국이 되어 종교의 자유를 억압받았던 적도 있지만, 해방되자 옛날의 신앙을 되찾았다. 하지만 이 모든 나라 정교 신자들은, 세월이 지나 달력은 자신들이 속하는 국가의 시책에 따라 <그레고리>력 쪽으로 따라 갔지만, 크리스마스만은 아직도 가톨릭보다 2주일 쯤 늦은 날로 고수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다음의 시빗거리는 성호를 긋는 순서와 방향이었다. 성부와 성자는 하늘과 땅을 가리키니 문제될 게 없었지만, 성령이라는 표시를 오른손으로 오른쪽부터 찍는 게 부자연스럽고 어색하다. 그래서 로만 가톨릭에서는 왼쪽부터 찍기 시작했지만, 정교 신자들은 그것도 못마땅하여 시비를 걸고 자신들은 오른쪽을 먼저 찍는 옛날 방식을 오늘날까지도 유지하고 있다.


초기 기독교가 형성되면서 혼란했던 시기에 요한은 성모님을 모시고 이즈미르(지중해와 쪽에 있는 터키의 제2항구) 근처로 피신해 살았다. 로마교회가 베드로와 바오로가 순교했던 전통을 들며 적통을 주장한다면, 정교는, 코린도와 에페소 교회가 로마나 황제보다도 먼저 형성되었고, 요한이 성모님을 모시고 정착했던 역사 등을 내세우며 반박할 수는 있겠다.(그러고 보니 이콘 등 성모상이나 그분에 관한 성물들은 정교 쪽이 훨씬 더 다양하고 많았다.)


최근 뉴스에 몬테니그로가 언급되기에 갑자가 <니코>의 안부가 궁금해서 그에게 전화를 해 본 적이 있는데, 받지 않는 걸 보니 아직도 승선 중인 것 같았다. 오랜 세월이 지났으니 그도 이미 고참 기관장이 되었거나 지금은 은퇴해서 안락한 노후 생활을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기억 속의 니코는 영원히 젊고 건장한 나의 1기사다.


다음에라도 연락이 되면 그 나라로 여행을 한 번 가야겠다. 그 기회에, 그곳에서는 거리가 그렇게 멀지 않으니 튀르키예도 잠시 둘렸다 오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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