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삶 안에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소명을 받는데, 이런 하느님의 거룩한 부르심을 ‘성소’라 한다. 뜻 그대로 넓은 의미로 해석하면 혼인 생활, 직업 등 하느님의 뜻을 실천해 나가는 일은 모두 그것에 포함된다.
구약에서는 아브라함과 이사악, 모세와 예레미야가 모두 성소를 받은 기록이 있는데, 비슷한 경우였다고 할 수 있겠다. 신앙심이 깊어 사명을 받아 수행했지만, 특별한 조건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신약시대에는 일반인들보다는 성직자들에게 주로 쓰게 되었는데, 영어로는 vocation, 라틴어는 vocati라는 이 단어의 어원은 목소리(voice/vox)라고 하니, 양들이 목자의 부름을 알아듣고 따르는 것처럼 성직자도 하느님께서 불러 선택하신다는 뜻인 것 같다.
어떤 신부님께서는 고등학교 다닐 때, 가족 여행을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어머니가 중상을 입었는데, ‘하느님, 살려만 주신다면 제가 신부가 되어 평생 당신을 모시겠습니다.’ 하는 맹세를 한 후, 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는 고백을 하셨다.
바로 이런 게 성소다. 신자들의 가정에서는 자녀들이 성소를 받으면 영광으로 알고 순명하는 게 의무라고 알고 살지만, 그게 정말 성소였는지 아닌지가 분명하지 않아서 헷갈리는 경우도 종종 있다.
가톨릭 가정에서 자란 자녀들은 대부분 몇 번씩은, 혹시 주님께서 자신에게 성소를 보내고 계신 것은 아닌지, 만약 그렇다면 자신이 정말 성직자의 길을 갈 수 있는 인물인지를 두고 고민을 한다.
내 자식들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는, 속으로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성소에 대해 고민하는 표시를 내거나 드러내 놓고 그런 상의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하나씩 그 이야기를 하기 시작해서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냥 무시하고 넘어갈 수도 없는 일이었고, 황당하고 난감했지만 부모로서 신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처신과 역할에 대해 묵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차에 어떤 분이 예수회 일본 관구의 교구장님께서 아르헨티나 분이신데, 성소 상담에 능하시기에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래서 일본으로 전화를 드렸더니, 기다리고 있을 테니 언제든지 방문해도 좋다고 하셨다. 본의 아니게 삼 형제를 나란히 일본 관구가 있는 나가사키로 여행을 떠나보냈다.
면담 결과, 한 명만 성소 가능성이 절반쯤 있다고 하셨다. 성소가 없다는 두 명은 간 김에 규슈 관광만 잘하고 한국에 돌아와 취업해서 자신의 길을 갔다.
비록 나일론 신자 생활을 오래 했지만 이제는 연륜도 쌓여서 순명하는 게 도리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고, 당사자 앞에서는 표시도 낼 수 없는 입장이었지만, 혼자 기도할 때는 주님께 따지고 반항하기 일쑤였다.
“왜 하필 저고 제 자식입니까? 평생을 떠돌이가 되어 혼자 살게 하신 것도 부족하셨습니까? 저는 그 고통이 어떤 것인지 누구보다 더 잘 압니다. 그 짐을 제 아들에게서 벗겨 주실 수는 없으십니까?”
나의 이런 기도와 입방정이 문제가 되었는지, 절반쯤 가능성이 있다던 한 명이, 갑자기 가톨릭 교계에서 일하는 것으로 성소를 대신하겠다고 마음을 바꾸었다.
성소는 이렇게 받기도 쉽지 않다. 그런데 이 길을 끝까지 걷는 건 얼마나 어려우랴. 그래서 나는 신부님과 수녀님만 보면 무조건 고개를 숙이고 존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