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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레지나

by 연후 할아버지

1) 딸이 된 사연


레지나는 초등학교 입학 전후까지 우리 옆집에 살던 꼬마 숙녀였다. 처음에는 모르고 있었는데, 고아였다가 입양된 아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 때문이었는지 그 부모는 아이를 데리고 이민을 떠났고, 그 후에는 오랜 기간 동안 잊고 살았다.


나는 아들이 세 명이다가 네 명이 되었다가 한다. 둘째 요셉 때문이다. 장모님께서 내 아내를 출산한 후 25년 만에 두 번째로 낳은 아이니 나와는 전혀 피가 섞이지 않은, 생물학적으로는 아들이 아니라 처남이다. (의사 선생님들의 말씀으로는 의학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운 기적이 일어났다고 연구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며 병원비도 거의 내지 않고 태어난 아이였다.)


그런데 녀석이 내 아들 행세를 했던 것은 누나의 젖을 먹고 컸고, 내 아들들을 조카가 아닌 형제로 알고 그 아이들 틈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가짜 형제들(실제로는 조카들)을 따라 누나를 엄마라 부르고 나에게도 아빠라는 호칭을 자연스럽게 사용했던 것이다.


그런 환경 속에서도 요셉은 씩씩하고 튼튼하게 잘 자라서 대학생이 되었는데, 교환학생으로 선발되어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대학으로 유학을 갔다.


그 대학 교정에서 레지나를 다시 만났는데,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한눈에 알아봤단다. 그들은 결국 서로 사랑에 빠져서 결혼했고 그곳에서 취직하고 가정을 꾸몄다.


그때부터 그들은 한국인이 아니라 캐나다 국민이 되었고, 나를 할아버지라 부르는 계집아이를 두 명이나 낳아 기르며 한 쌍의 비둘기처럼 알콩달콩 살았다.


레지나도 요셉과 나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지만, 어렸을 때의 기억 때문인지 그녀의 남편을 따라 시누이를 엄마로 부르고 나에게는 아버지라는 호칭을 사용했는데, 거절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우리 부부의 첫딸로 행세하게 되었다.


2) 사고


그때는 내가 선급협회 검사관으로 근무하고 있던 때였다. 한밤중까지 자다가 깨어난 아내가 눈이 내리다가 멈춘 창밖을 바라보더니 갑자기 산속에 있는 성지로 기도하러 가겠다며 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 나는 날이 밝으면 출근을 해야 했지만, 내뱉은 말은 쉽게 거두지 않는 고집을 아는지라, 당장 아내 걱정이 우선순위였다.

그래서 나도 슬리핑백을 챙겨 들고 따라나섰고 그녀가 원하는 장소에 함께 도착했다. 기도는 그녀의 몫이고 나는 안전 요원에 불과했으므로 귀퉁이에 있는 벤치에 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샛별이 구름 사이에서 빠져나와 바람에 휘날리는 모습을 감상하고 있는데, 십자가 아래에서 기도하던 아내가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일어나 뛰어가 봤더니, 내 손을 잡으며 말한다.


“여보, 우리 성희 어떡해?”

“뜬금없이 레지나는 왜 찾노?”


그녀의 생모라는 분이 흰옷을 입고 와서 울다 갔단다. 쐐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녀의 발언에 동의하고 맞장구칠 수는 없었다.


“그 사이에 또 졸았구먼. 날씨도 궂은데 고생을 사서 하면서.”


기도를 많이 해선지, 아내는 가끔 환시를 보기도 하고 가끔 예지를 할 때도 있다. 그런 경우 겸사겸사 연락을 해 보곤 한다. 이번에도 국제전화를 해 보려고 핸드폰을 켰지만, 산속이라 신호가 잘 잡히지 않았다.


눈발이 더 굵어져서 우리는 짐을 챙겨 들고 집으로 내려오지 않을 수 없었다. 도착하자마자 다시 한번 통화를 시도해 봤지만,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런데 몇 시간 후 새벽에 국제전화가 걸려 왔다. 밴쿠버 경찰서라는 것이다. 당시에는 요셉 부부가 따뜻한 곳으로 옮긴다고 그곳으로 이사 가서 살고 있었다.


“당신의 딸이 심하게 다쳐서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연락처가 이 번호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다쳤습니까? 심각한가요?”


뭐라고 열심히 설명하기는 하는데 잡음이 섞여 알아듣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그 속에서 ‘자살(suicide)이란 단어가 들려서 깜짝 놀랐다. 교통사고라도 난 줄로 상상했더니 그게 아닌 것 같다.


큰놈은 유치원 다니고, 작은놈은 돌잔치 한 지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아이를 둘이나 가진 어미가 자살을 기도하다니, 믿을 수가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아이들은 어쩌고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뭐라고 대답하기는 하는데, 발음도 이상하고 소음도 많아서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문자로 병원 주소를 보내 주시면 고맙겠다.”는 말을 끝으로 일단 전화를 끊었다.


대강 짐을 챙긴 후, 아내의 손을 잡고 공항으로 나갔다. 몇 시간을 고생한 후에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별별 상상이 들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니 부딪쳐 가며 최선의 방법을 찾아보는 수밖에 없다.


병원에 도착해 보니 면회 수속이 복잡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부유한 나라의 자살미수 환자였기 때문인지 전담으로 당직을 서는 간호 인력이 병실마다 여러 명 있었고, 의료 시설은 약간 낡아 보였지만 잘 정리되고 정돈된 것처럼 느껴졌다.


레지나는 중환자실에 홀로 누워 의식이 없었다. 기록을 읽어보니, 그녀는 새벽 2시쯤 음주 후 밴쿠버 다리 위에서 강물이 아닌 시멘트 바닥으로 떨어졌다고 적혀 있었다.


간호사들의 얘기로는 과거에도 비슷한 일이 가끔 일어났지만, 이런 경우에는 생존율이 1%도 되지 않는데, 기적적으로 살아났다고 했다. 입고 있던 두꺼운 치마와 외투가 낙하산 역할을 했던 것인지 약간의 찰과상과 손목과 엉덩이 주변의 뼈만 약간 손상을 입었을 뿐이란다.


병원에 이미 입원해 있는 어미보다 집에 남겨진 아이들이 더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사방을 뛰어다니며 확인해 보니 시설에 보낸 게 아니라, 지역 유지들의 집에서 나눠 보호하고 있다고 했다.


가족이라도 그들을 만나려면 수속이 복잡하고 시간이 걸리는데, 관계를 증명할 준비마저 되어 있지 않은 우리가 그 아이들을 만나고 그들의 신변을 인수할 방법은 거의 없단다.


그렇다고 먼 길을 날아와서 아이들을 보지도 못한 상태로 돌아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사방을 뛰어다니며 하소연하다가 지역 신문 기자를 만났는데 딱한 사정을 듣더니 기사로 썼다. 마침 그날 뉴스거리가 부족했던 것 같다.


그 기사 덕분에 아이들을 보호하고 있던 가정을 찾을 수 있었다. 두 곳이었는데, 시의원을 하고 있는 젊은 부부와 교장 선생님을 하다가 은퇴했다는 노부부 집이었다. 그들에게 전화를 했더니 만나자는 약속을 해 줬고, 면담이 이뤄졌다. 그리고 그들이 적극적으로 협조해 줘서 걱정했던 것보다 쉽게 아이들을 찾아올 수 있었다.


의료진들에게 물어보니 레지나가 회복할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곳에 오래 머물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기에, 우선 아이들만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두어 달쯤 지난 후에야 아이들의 아비인 요셉이 돌아온 탕아처럼 피폐한 모습으로 나타나 함께 아이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질이 나쁜 교포들을 만나 사기를 당해서 그들을 찾아 헤매다가 한동안 귀가하지 못했는데, 이런 불상사가 생겼다며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또다시 두어 달이 더 흐른 후에는, 요셉은 취직이 되어 지방으로 발령이 났는데 아이들을 딸려 보낼 형편이 아니어서, 그들은 다시 우리 부부의 전담이 되었다.


그렇게 지내고 있던 어느 날 레지나로부터 전화가 왔다. 애들이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어서 곧 나오겠다는 통보였다. 치료가 완료된 건 아니지만 한국에서 병원에 다녀도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단다.


그녀가 돌아오고부터는 식구가 늘어 조금 복잡하기는 했지만 평화를 되찾았다. 아직 다쳤던 부분이 완벽하게 치유되지 않아서 가끔 병원 신세를 지곤 했지만, 마음이 안정되니 회복도 빨랐다.


3) 별리


몇 달이 또 흘렀다. IBM 프로그래머로 근무하다가 휴직을 하고 있던 레지나는 복직이나 퇴직을 선택해야 하는 시점이 왔고, 그들의 큰딸(가현)은 초등학교에 입학 시기가 닥쳤다.


그들 부부를 불러 모아 놓고 함께 캐나다로 돌아가라고 종용했더니, 레지나는 그렇게 하겠다는데 요셉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뜸을 들였다. 취직한 회사가 마음에 들어 사직하기가 망설여진다는 게 표면적으로 내세운 이유였다.


아내보다 벌이가 적다는 죄로 직장을 그만두고 몇 년간 육아에만 전념했다는 남편의 고충이 이해되지 않는 바는 아니었지만, 네 명의 식구가 이역만리 먼 땅에서 이산가족이 되어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한다는 현실은 내 상식으로는 인정할 수 없는 비극이었다.


많은 말이 오갔지만 고장 난 축음기를 반복해서 터는 것 같아서, 화를 내며 요셉을 돌려보내고 말았다. 며칠 더 생각한 후 다시 오라고 했지만 그때부터는 그가 나를 피해 도망쳐 다녀서 만날 수도 없었는데, 기다리다 지친 레지나가 어느 날 내게 말하였다.


시일이 되어 어쩔 수 없이 가현이만 데리고 캐나다로 돌아가려 하니 용서해 달라며, 가진이(둘째)를 부탁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타국에서 혼자 직장을 다니며 아이 두 명을 키우는 건 어려운데, 가현이는 학교에 보내야 하니 어쩔 수 없이 데려가고, 가진이는 아직 몇 년이 남았으니, 상황을 더 지켜보며 기다리겠다는 뜻이었다.


가현이와 어미가 떠나고 나니, 우리 부부의 품에는 어린 가진이만 남았다. 내가 집을 비우는 사이에 아비 요셉이 가끔 와서 잠시 만나고 가기도 한다는 말을 들었지만 한동안 나는 모르는 체했다.


아이가 무슨 죄인가? 조실부모하고 조부모 품에서 자라는 아이처럼 불쌍해서 부둥켜안고 눈물을 쏟은 적도 많았는데, 이런 세월이 길어지자 이건 모두를 위한 길이 아니라 판단되었다. 그래서 “삶아 먹든 구워 먹든 네 자식은 네가 키워라” 하고 호통치며 독한 마음을 먹고 아이를 제 아비에게 보냈다.


결국 그 부부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혼을 했고, 가진이도 취학연령이 되자 레지나가 데리고 갔다는데, 그녀는 그때 이후로는 우리에게도 연락을 끊었다.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겠지 하는 기대만 품고 살았던 세월도 꽤 오래되었다.


경과가 어떻게 되었건 아직도 그녀는 나의 아픈 손가락이고 잃어버린 딸이다. 지금은 세월이 많이 흘렀으니 가현이는 대학생이 되었고 가진이도 고등학교에 다닐 텐데, 모두 어떻게 살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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