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리 불던 소년, 한우는 나의 대학 동기였다. 워낙 말이 없고 내성적인 성격이라 4년을 함께 기숙사생활을 했는데도 피린가 퉁소를 청승맞게 잘 불었다는 것 이외에는 떠오르는 게 거의 없었다. 해맑은 얼굴에 동그랗고 큰 눈망울이 언제나 밝게 빛났고, 웃을 때 하얗게 드러나는 덧니가 매력적이던 외모는 기억났다.
졸업 후 헤어졌다가 그를 다시 만났던 건 우리의 나이가 불혹으로 접어들 무렵의 동기회에서였는데, 내가 기억하던 그 소년이 맞나 싶을 정도로 그는 세련되고 활달하고 멋있는 남자로 변해 있었다.
나에게 전화번호를 적어주면서,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데 지나가다가 기억나면 한 번 들리라 했다. 그러나 곧 잊어버렸고, 한동안 다시 만나지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를 기억 속에서 불러 내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발생했다.
내가 선급 검사관이 되어 차를 몰고 한반도의 중부 지방을 떠돌아다닐 때였다. 장거리 운전을 할 때는 서로 교대하기도 하고 졸릴 때는 말동무가 되기도 해서 아내와 동행할 때가 많았다. 아내는 목적지 근처의 성당이나 성지 등에 내려서 기도하고 있다가, 내 일이 끝나면 다시 만나 동승해서 돌아오곤 하였다.
그날은 군산에서 검사를 마친 후 차를 운전해 서울로 올라가는 도중이었던 것 같다. 옆 자리에 앉아 있던 아내가 불현듯 생각난 듯 말하였다.
“당신 친구 하나가 이 근처 어디선가 산다고 하지 않았소?”
“그런데, 왜?”
“이제 우리도 나이가 들어가는데, 시골에 은퇴 후에 살 전원주택이나 하나 장만해 놓으면 어떨까 싶어서. 바깥 풍경이 참 좋네.”
“그럼, 조금만 더 가면 홍성이란 곳이 나오는데, 그곳에서 잠시 쉬었다 갈까?”
휴게소에 도착해 낡은 수첩을 뒤지니, ‘피리 불던 소년’의 전화번호가 나왔다. 전화를 했더니 마침 그가 집에 있었다. 그래서 갑자기 그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오랜만에 만나 회포를 풀고 잡담을 나누다가, 아내의 계획을 말했더니, 땅은 자기가 가진 게 많으니 그중에서 마음에 드는 걸 고르라 했다. 고르기만 하면 그걸 무상으로 줄 테니 건축만 하란다. 혼자 살기가 적적하고 외롭던 차에 잘 됐다고 무척 반가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까운 사이일수록 금전거래는 하지 말라던 격언이 생각나 적극적인 대답은 회피하였다. 조금 더 연구해 보자고 약속하고 헤어졌는데, 돌아오는 길에 아내가 쐐기를 박았다.
“공짜 좋아하지 마소. 하려면 제값 주고 사야지.”
“맞다 차라리 팔겠다면 모르지만, 계산이 애매하면 차후에 분란이 생길 수도 있다.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 치고 잊어버리자.”
(나중에 내가 치료를 도와주며 그의 삶에 더욱 깊숙이 관여하게 되자 주변의 오해를 살 것 같아서, 토지구입 논의는 더 이상 거론도 못하게 했다. 하지만 훗날 되짚어 생각해 보니, 그때 그 주변에 땅을 구입해 뒀더라면 대박 날 뻔했다. 충남도청이 그쪽으로 옮겨가면서 시골마을이 도시로 변했기 때문이다.)
근데 아내가 엉뚱한 소리를 했다.
“그런데 당신 친구 혹시 암에 걸리지 않았는지 물어보소. 체향이 좋지 않네.”
“쓸데없는 소리는 왜 하누? 내 눈에는 건강하게만 보이더구먼. 그런데, 다른 남자 냄새는 왜 맡냐? 이 여자, 앙큼한 데가 있네!”
반대 의견을 표하면서도 내 마음이 약간 흔들렸다. 아내가 암환자들의 호스피스 자원봉사를 오래 해서 그들 특유의 냄새를 잘 알 거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차를 몰고 다시 친구집으로 돌아가 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자네, 암에 걸렸나?”
부인할 줄 믿었던 그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인다.
“어떻게 알았니?”
“내 마누라가 개 코를 가졌다. 수술은 했나? 치료를 받으려면 병원이 가까워야 할 텐데, 왜 이런 시골에서 살고 있나?”
대장암 말기인데 전이가 되어서 수술이나 치료를 받을 단계는 이미 지났고, 산, 물, 공기가 좋은 곳에서 휴식을 취하는 게 최선의 방법이라는 선고를 받았는데, 지금 살고 있는 집이 병원에서 권한 바로 그런 곳이란다.
“내가 간섭할 일은 아니지만, 판정을 내린 의사가 하느님도 아니고 의술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는데, 한 번 그런 판정을 받았다고 포기하고 팔짱 낀 채 죽을 날만 기다린다는 게 말이 되냐? 오진이었을 수도 있고 그동안에 새로운 치료법이 나왔는지도 모르지 않나? 다른 병원에도 가보고 좋은 방법이 있다면 시도라도 해 봐야 하지 않겠나?”
속사포처럼 쏘아댔지만, 나도 특별한 대책은 서지 않고 황망해서 의미도 없이 내뱉은 소리였을 것이다. 그는 어느 누가 자기 목숨이 소중하지 않겠느냐며 이미 노력해 볼 만큼 해 봤으니 모두 쓸데없는 짓이라고 머리를 흔들며 쓴웃음만 날렸다.
돌아오는 길엔 녀석의 어두웠던 표정이 계속 생각나서 우울했다. 나의 침묵이 길어지자, 아내도 말없이 앞쪽만 응시하며 운전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동기생 홈페이지에 그날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썼고 “친구들아, 목숨은 자존심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서로 고통을 나누자. 그게 함께 훈련받은 자들의 의리가 아니냐?” 하며 글을 끝냈다. 그날은 금요일 밤이었다.
월요일 아침에 출근을 했더니 동기회 총무에게서 전화가 왔다. 무조건 내 계좌번호를 부르라더니, 주말에 걷힌 상당한 액수의 위로금을 보내 줬다. 그 돈으로 우선 입원시키란다.
나는 연결되는 모든 인맥을 동원해 최고의 병원과 전문의를 찾았고, 수명을 단축할 모험을 감수하고 수술을 시켰으며, 항암과 방사선 치료를 이어가게 했다.
당시에는 아직 상용화되지는 못했지만 표적 치료제가 개발됐다는 소식을 듣고 구해 보려고 노력하는 도중에 무료 임상시험 투약을 해 주겠다는 제약회사를 만나 약을 받아 먹이며 모르모트를 자청하기도 했다.
그런 혼란 중에 별별 사람을 만났는데, 줄기세포니 뭐니 하는 이상한 말을 붙여가며 엉터리 약을 팔아먹으려는 약장수들, 기도와 목숨을 바꾸자며 돈을 요구하는 기도꾼들도 많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치료의 판단은 돌팔이나 사기꾼이 아니라 전문가들이 과학적 근거에 따라 하는 것이라는 원칙을 지켰다.
이런 노력 덕분이었는지 금방 치유되는 건 아니었지만 조금씩 차도가 보이기 시작했다. 주변의 어떤 감언이설에도 흔들리지 않고 나의 의견을 따라 준 그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것은 아마 어렸을 떼 군사훈련으로 단련된 강단과 엔지니어 생활을 오래 하며 몸에 밴 습관과 사고방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약간 창백한 안색과 마른 몸매를 제외하면, 보통사람들과 비슷한 모습으로 퇴원을 했다. 그 후 1년 남짓한 기간 동안은 정기적으로 병원에 가서 검사하고 약을 타는 것 외에는 큰 불편함이 없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죽어 가던 친구를 살려 냈다는 뿌듯함은 있었지만, 그동안에 내 업무가 많이 밀려서 건강을 되찾은 걸 확인하고부터는 그에 대한 관심은 줄였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초겨울 자정 무렵에 그에게서 갑자기 전화가 왔다.
“친구야, 그동안 고마웠다. 자네에게서 받은 친절과 고마움은 죽고 나서도 잊지 않겠다.”
“자다가 느닷없이 봉창 두드리는 소리냐? 조금 나아졌다고 그래서는 안 되는데, 술 마셨나?”
“아니다. 그럴 리가 있나? 이유는 모르지만 갑자기 창자가 꼬이고 막혀서 배가 남산만 해졌다. 아무래도 이게 마지막일 것 같아서 인사라도 하고 가려고.”
“기다려라. 내가 바로 갈 테니, 그동안에 가스를 빼내려고 최대한 노력은 해 봐라.”
“헛수고할 것 없다. 방귀를 뀌어 보려고 하루 종일 헛심만 썼다. 위로 토해 보려고 노력해 봤지만 그것도 헛수고였다. 이제 자네 목소리라도 듣고 가니 그나마 다행으로 여겨지네.”
전화를 끊고 나니 잠이 오지 않았다. 재발한 게 아닌가 싶어서 긴장이 되었던 것이다. 아내를 깨워 외투만 대강 걸치고 함께 그의 집으로 차를 몰고 갔다. 도착하니 새벽 네 시쯤 되었는데, 집안에선 아무 소리도 나지 않고 지나치게 조용했다.
끝났구나 싶어서 그의 방문을 벌컥 열었더니 그는 잠을 자지 않고 앉아 있었다. 먼저 배부터 확인해 봤는데, 임산부처럼 배불뚝이가 되어 있을 줄 알았더니 예상과는 다른 홀쭉이였다.
“오지 마라 했는데 왜 왔나? 친구야, 통화 중에 들려온 반가운 목소리가 명약이었는지 방귀를 한 시간이나 뀌었네. 그 사실을 문자로 보냈는데, 보지 못했구나!”
“답신이 없으면 전화를 주지 그랬냐?”
“자야 할 시간이라, 이렇게 급하게 달려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정말로 미안하다.”
“잘 됐다. 덕분에 얼굴 한 번 더 보고”
어이없는 일이었지만, 서둘다가 일어난 해프닝이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른 새벽부터 서로 얼굴만 마주 보고 있기도 민망해서 집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차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