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띵동-! 00번 고객님, 0번 창구로 모시겠습니다."
내 또래로 보이는 남자 고객이 창구로 다가온다. 코로나 시대임을 확연하게 알 수 있는 징표인 마스크를 착용한 채 내 앞에 착석한 그는 서류 뭉치를 꺼내 든다. 보통 서류 뭉치를 들고 오면 '전세 대출'이나 '주택담보 대출(주담대)'을 상담하러 왔거나 법인 통장을 개설하러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앞서 말한 업무들은 모두 업무 처리에 소요되는 평균 시간이 긴 편이지만 지점의 주거래 고객을 늘리는 데에 일조하는 업무들이기에 반가우면서도 꺼려지는 감정이 공존한다. 사장의 입장에서는 반갑고, 직원의 입장에서는.. 여기까지만 말하기로 하겠다.
서류를 꺼내는 남자의 표정이 밝지가 않다. 마스크를 꼈어도 눈빛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있는데,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그에게서 무거운 분위기가 전해져온다. 짧은 한숨과 함께 꺼내는 한 마디는 다음과 같았다.
"배우자가 사망을 했습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은행에서 근무하면서 사망한 고객의 계좌를 해지하러 오는 상속인들을 볼 기회는 꽤 자주 있다. 그래서 가족이 사망했다며 찾아오는 사람들을 봐도 큰 감흥은 없는 게 사실이다(그렇다고 슬프지 않다는 건 아니다). 사람마다 성격이 다르고, 처한 상황이 다르니 그때마다 응대하는 말투나 분위기 또한 조금씩 달라지지만, 최근에 만났던 상속인들과는 느낌이 좀 달랐다. 배우자가 사망을 한 상황이면 당연히 매우 슬프겠지만 내가 업무 처리를 해줬던 대다수의 상속인 배우자들은 그렇게 슬퍼보이지가 않았다. 그러나 이 남자는 감정을 최대한 억누르는 듯한 말투로 업무처리를 요청했음에도, 목소리에 묻어나는 슬픈 감정이 전달되면서 나는 초 집중모드로 돌아섰다. 그러면서 그의 슬픈 감정에 나도 조금씩 빠져들게 됐다.
그가 건넨 서류 중 '가족관계 증명서'와 '사망 진단서'가 있었다. 상속 업무를 할 때 가장 중요한 서류인데, 이 내용을 바탕으로 상속인을 확인하고 처리를 해야 한다. 감정이 올라온다 하더라도, 업무는 정확하게 해야 하기 때문에 '가족관계 증명서'를 먼저 들여다봤다. 아.. 속으로 탄식이 나왔다. 어린 자녀가 3명이나 있었다. 사망하신 분의 나이가 내 또래였기 때문에 어린 자녀가 있을 거란 추측은 했지만, 이런 상황일 줄은 몰랐다. 무심하게 떠난 배우자와 남겨진 자녀들을 생각하며 내 앞에 앉아있는 남자는 슬픔을 억누르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다음 서류로 눈길을 옮겼다. 보통 '기본 증명서'를 떼면 그 안에 '사망' 여부가 표시돼있는데, 주민센터에 신고를 늦게 한 건지 아직 기록이 돼있지 않아 이런 경우에는 '사망 진단서'가 추가로 필요하다. 남자가 가져온 '사망 진단서'에는, 사망 원인이 '미상'으로 돼있었다. 그리고 그 옆 선택지에는 '사고'와 '질병'이 있었다. 아니.. 사고와 질병으로 사망한 것이 아니라면, 대체 어떤 이유로 세상을 떠났다는 말인가? 순간 머리가 멍해질 뻔 하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업무에 집중했다. 추측은 추측일 뿐이지만, 병원에서 발급해준 사망 진단서가 장난도 아니고, 평범한 죽음을 맞이한 것은 아니란 생각이 들자 그의 우울한 눈빛이 이해가 됐다.
배우자의 사망 원인이 조금 궁금하기도 했고, 그를 위로해주고 싶기도 해서 뭐라도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스스로 괜찮다는 기색을 표하면서 먼저 말을 꺼내지 않는 이상, 이 쪽에서 관련된 이야기를 어설프게 꺼냈다가는 그의 억눌린 감정이 폭발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이런 일은 그에게도 익숙지 않을 테니(익숙해서는 안되겠지만) 나는 입을 열지 않고 조용히 일 처리를 했다. 이런 업무를 할 때는 중간 중간에 손님에게 건네는 멘트의 톤도 매우 조심스럽게 맞춘다. 행여나 평소대로 약간 업된 톤으로 이야기를 건네면 자칫 눈치 없는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렇게 착 가라앉은 분위기에서 모든 업무처리를 끝내고 그에게 '다 됐다'는 신호를 보냈다.
'다 처리되었습니다, 고객님. 많이 힘드시죠? 도움은 안되시겠지만 제가 마음으로 응원해드리겠습니다.'
라는 말이 머릿속에만 맴돌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나긋한 목소리로 건네는 업무 종료 멘트와 '안녕히 가시라'는 작별 인사 밖에 없었다. 뭔가 씁쓸했다. 당연하게도 내가 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인지라, 나와 비슷한 시기를 살아온 또래인지라 더 생각이 난다. 요즘처럼 사람들의 감정이 예민한 시기에 섣불리 공감의 표현, 위로의 표현을 건넸다가 되려 화를 돋우는 건 아닐까 걱정하는 현실이 조금 슬펐다. 이럴 때는 대체 무슨 말과 행동으로 슬픔에 빠진 이들을 위로할 수 있을까. 그저 서류 더미와 모니터를 바라보며 키보드를 두드리는 것만이 내가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일까.
업무를 하다 보면 감정과 이성을 철저히 분리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은행은 영업과 리스크 관리를 동시에 철저히 해야 하는 조직이기에, 정확한 상황 파악과 규정을 적용함과 동시에 고객의 마음을 얻기 위한 감성 영업도 해야 한다. 안 그래도 이성적이지 못한 성격에, 감정 조절도 잘 못했던 나는 입행 후 몇 년간 정말 힘든 시기를 보냈었다. 시간이 지나고 일에 익숙해지면서, 그리고 나름의 노하우가 쌓이면서 멘붕에 빠지는 일은 많이 줄었지만 여전히 감정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간들은 불쑥 찾아온다. 이 날의 경험 또한 그런 시간 중 하나였다.
점차 A.I로 대체되어 갈 금융 시장에서 이런 부분을 해결할 수 있는 건 진짜 인간 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급속도로 성장하는 기술력 속에서 인간이 살아남으려면, 감성 팔이 능력만으로는 부족하다. 기계만큼은 아니더라도 기본적인 실력이 갖춰져야 그 틈에 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만약 운이 좋아 이 업계에서 살아남는 인간 중 한 명이 된다면, 이런 일을 겪는 고객들에게 꼭 따뜻한 말을 건네주고 싶다.
많이 힘드시죠? 너무 괴로워 마세요. 함께 이겨냅시다,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