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에서 출장뷔페 먹어봤어?
"워라밸~ 워라밸~ 나나나나~♬"
오후 5시 50분이 되면 지점 내 스피커에서 음악이 흘러나온다. 경쾌한 리듬에 청량한 여성 보컬의 목소리와 함께 들리는 '워라밸 송'이다. 스피커 볼륨을 작게 설정해놔서(상담할 때 방해가 되므로) 가사가 또렷이 들리지 않지만 멜로디는 꽤나 중독성이 있어서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된다. 은행 입장에서는 나름 성공한(?) 콘텐츠인 듯 하다. 직원들이 따라부르고 있으니 말이다.
보통 오후 6시 10분이 되면 업무용 PC를 더이상 쓸 수 없기 때문에 정리 못했던 서류들과 자리 정리를 하며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정말 특별한 일이 없으면 퇴근을 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불과 1-2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힘들었던 패턴이다. 정부에서 강력하게 추진한 주 40시간(최대 52시간까지만 허용) 근무제도 덕분에 정말 워라밸을 보장받는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물론, 아직도 전국의 수많은 바쁜 점포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은 지금도 승인을 받아서 야근을 하고 있다. 글의 논지에서는 조금 벗어나지만, 고생하는 그들에게 심심한 위로와 응원을 보낸다. (나도 그런 곳에서 근무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오늘은 조금 특별한 날이다. PC를 오래 쓰는 야근은 아니지만, 7시에는 퇴근해야 하는 규정에서 벗어나 지점에 남아서 무언가를 할 예정이다. 7월 1일, 즉 1년의 절반이 지나고 새로운 절반이 시작되는 날이다. 여느 회사들처럼 상반기 마무리를 하고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하는 자리를 마련하게 되는데, 보통 때 같으면 식당을 예약했겠지만 오늘은 '은행'에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왜냐고? 너무 쉽게 예상 가능하지만, '코로나' 때문이다. 회식을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는 코로나 '덕분'이라고 하는 게 낫겠다.
마감 직후부터 곧 도착할 맛있는 음식을 기다리다 지친 지점 직원들은 7시가 다 돼서 도착한 각종 음식들을 보며 군침을 흘렸다(나만 흘렸나?). 지점장님께서 준비해주신 와인도 곁들이니, 꽤나 멋진 상반기 마무리 연회의 모습이 갖춰졌다. 뭔가 썰렁한 분위기를 감지한 나는 최근 구매한 갤럭시 S20+를 꺼내들고, 약정을 통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떠오르는 스트리밍 어플 'FLO'에서 재빠르게 음악을 검색했다. 적절한 음악리스트가 나오지 않자 '파티'라는 검색어를 입력한 후 제목을 보며 괜찮은 리스트들을 추려냈고, 그 중 하나를 재생시켰다.
"Ho ho ho bring a bottle of rum~♪" - Sia, <Ho Ho Ho>
느낌 있는 비트와 함께 느낌 있는 보컬이 부르는 팝이 흘러나오면서 분위기가 업되자, 직원들도 만족스러운 얼굴로 음식을 집어들기 시작했다. 역시, 파티엔 흥겨운 음악이지.
예전 같았으면(라떼는 말이야) 인근 고깃집 또는 횟집 등을 예약해서 양반다리 하고 한참을 앉아 잔을 돌리며 건배사를 쥐어짜내는 식의 회식이 진행됐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하지만 단체로 외부 식당에 모여 식사를 하는 것을 은행 내부적으로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 같은 회식 자리가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 중 가장 오래 근무하신 지점장님마저도, '이런 회식은 처음이다'라며 어색한 미소를 지으셨지만 이내 즐기면서 식사를 하셨다. 출장 뷔페 아이디어도, 소주나 맥주가 아닌 고급 와인을 사오신 것도 지점장님, 부지점장님의 생각이셨다. 참 괜찮은 분들과 근무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됐다.
최근 몇 주 동안 단헐적 간식(? 다시 읽어보면 어색함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을 하고 있어서 이렇게 많은 음식들에 무방비 노출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냥 놓아버리기로 했다. 밥을 먹기에 적당한 설비(?)가 없는 환경상 음식을 테이블 위에 깔아놓고 스탠딩으로 식사를 했기 때문에 먹으면서 열량 소비도 하는, 매우 합리적인 식사 방법이라 위로하면서 1시간 반 가량 저녁식사를 즐겼다.
갈비, 왕새우찜, 육회, 방울토마토&리코타치즈 샐러드, 팔보채, 스테이크, 초밥, 참치회 등의 음식과 갖가지 디저트, 부족할지 몰라 추가구입한 김밥, 라볶이까지.. 눈이 돌아가서 뇌도 돌아버린 듯 했다. 그냥 열심히 먹었다. 나는 운전을 해야 했기 때문에(술을 끊기도 했고) 와인은 마시지 않았지만, 생과일 주스까지 있어서 열심히 마셨다. 참 좋았다(초딩 일기 버전).
9시가 다 되어 자리를 모두 마무리하고 지점을 나섰다. 다들 와인을 마셔서 얼굴이 벌개졌으니, 빠짐없이 대리기사를 불러서 귀가를 하는 걸 보고 나도 차에 올라탔다. 이런 회식을, 또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아마 자주는 아니더라도, 가끔은 이런 회식도 나쁘지 않겠단 생각이 들었다. 끊임없이 변하는 세상과, 그에 맞춰 변화하는 우리가 되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 먹는 이야기만 잔뜩 해놓고 거창한 결론 내기는..
얼른 소화시키고 잠이나 자자. 내일도 출근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