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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jette Apr 02. 2016

침묵의 뿌리

조세희 사진-산문집 

이 책은 절판되었다. 


이 책의 초판은 1985년에 발행되었고, 내가 읽은 판은 도서관에서 빌린, 2000년에 발행된 6쇄다. 이 이후에 얼마나 더 나왔는지는 알 수 없다. 다시 나오게 될 지도 알 수 없다.


250페이지 남짓한 얇은 책에, 상당 부분이 사진으로 채워져 있어서 금방 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통근 버스에서 읽겠다고 무심코 폈다가, 이 책의 무게에 눌려 몇 문장 읽지 못하고 다시 덮었어야 했다. 그러기를 몇 번을 반복하다 포기하고, 집에서 조용히 읽기 시작했다. 그 것도, 몇 번이고 버티지 못해서 중간에 일어나서 소소한 일들을 하다가, 결국 술을 두어 잔 마시고 나서야 다 읽을 수 있었다.


내가 조세희 작가를 처음 접한 것은 국민학교 4학년때였다. 집에 있는 책을 집히는 대로 다 읽다가 한국문학 전집을 읽기 시작했는데, 그 전집에 이 분의 [시간여행]이 실려있었다. 다른 이야기들이 내뿜는 특유의 '기품'에 질려있던 차, 비틀린 칼날에 맺힌 부호같은 눈물이 내뿜는 서늘한 기운은 어린 아이의 마음에 '어디가 아픈 지도 모르겠는' 생채기를 내기에는 충분했다. 그리고 그 묘한 마력에 이 작가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구해서 읽었고, 이 책은 이제 몇 번을 읽었는지 모르겠다. 다만 읽을 때마다 느낌이 달랐고, 아마도 처음의 날카롭고 알 수 없었던 쓰린 느낌은 점차 슬픔으로 변했고, 그 슬픔이 점점 형체를 가지고 크게 다가왔다는 정도로만 기억한다.

이렇게 애매하게 이야기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이 책을 마지막으로 읽은 지도 이젠 10여년을 훌쩍 넘겼기 때문이다. 여전히 '한국 문학 작가들 중 가장 좋아하는 작가'를 물어본다면 아무런 의심 없이 '조세희'라고 대답하지만, 이 책은 이제 가지고 있지도 않고 다시 구할 생각도 없다. 다시 읽기에는 이제는 이 책에 베이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굳어 버렸고, 이제는 상처가 나면 잘 아물지도 않는다. 앞으로도, 이 소설을 다시 읽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도. 


그렇게 작가의 이름만 머릿속에 각인되고, 내용과 감상은 어느덧 압축되어 기억 어느 한 켠에 자리잡고 있던 차, 이 책을 소개한 글을 읽게 되었다. 소개글 자체도 훌륭했고, 아마도 잊어버렸을 작가의 다른 책이어서 별다른 무게 없이 책을 들었다.


내가 '참 근사하다!' 감탄하며 읽는 부분은 법전 앞쪽에 있다. 그것은 정말 근사해 그 부분의 말들을 읽을 때 나는 아름다운 음악을 함께 떠올리고, 몇 해 전부터 보기 힘들어진 민들레 꽃씨의 예쁜 비행 모습을 갑자기 대하게되는 착각에 빠진다. 이른바 자유권적 기본권과 사회적 기본권의 보장을 국민에게 약속하는 부분이 바로 그것인데,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지닌다"는 문장은 큰 감동을 주는 부분 가운데서도 압권이 아닐 수 없다. (중략)
그 뒤에도 나는 몇 번이나 법전 앞 부분을 읽으며 아름다운 음악을 떠올리고, 몇 해 전부터 보기 힘들어진 민들레꽃씨의 예쁜 비행모습을 다시 대하는 착각에 빠져들었다.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써낸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후 10년 만에, '우리의 죄에 대해 말해보자'라는 생각으로 엮은 이 책은 그래서 전과는 다르다. 

산문과 단편소설, 작가가 직접 찍은 사진들로 이루어진 이야기는, 이제는 난장이 가족이라는 곡면의 거울에 비친 현실이 아닌, 작가와 사진가와 일반인으로서의 화자가 뒤얽혀 '사북사태'를 중심으로 비춰지는 어두운 현실을 그려낸다. 우리는 고통을 나누고 이성적이고자 하며, 천성적으로 밝은 곳을 좋아하며 발전된 다른 세계에서 살고자 하지만 이런 미래로 나아가기에는 현실은 석탄 바위같이 어둡고 무거워, 이를 살려달라는 작은 신음밖에 내뱉지 못한다. 아이들의 굴곡진 안구를 통해 슬픔과 아련함이 극대화되어서 비추어진 이야기들도 이런 어둠을 밝히지 않고, 반딧불마냥 잠시 반짝였다 사라지면서 이런 어둠의 공허함만을 남겨놓는다. 책에 실린 단편들은 작가의 기존 다른 소설처럼 유연하게 날뛰지 못하고, 산문과 구분되지 않는 시선을 유지하거나, 혹은 목이 눌린 사람이 억지로 내는 목소리만을 들려준다. 그리고 작가는 말한다.


어느 날 나는 내가 써야 할 많은 말들을 한 순간에 잃어버리고 말았다. 말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해의 우리 땅 계엄령은 단 하나 남아있던 섬, 제주도까지 건너갔다.


그리고 그렇게 잃어버린 말 대신, 자신이 직접 사북에 가서 찍은 사진과 '사북사태 공소장' 전문을 그대로 옮겨놓으면서 현실을 왜곡되지도, 과장되지도 않은 모습 그대로 꾹꾹 박아놓는다. 이 죄많은 시대상의 나열은은 어떤 먹먹한 형태의 슬픔을 불러일으킨다. 덜 수도 없고, 운다거나 해서 해소되지 않는, 막을 수 없이 고요히 퍼져나가는 울림같은 슬픔.


이런 슬픔으로 텅 비어버린 마음에서는 어떠한 글자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렇게 우리는, 작가는, 말을 잃어버리고, 침묵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린다. '우리'의 죄, 그 죄로 만들어진 현실, 아마도 이 것이 '침묵의 뿌리'였을 것이다.


나는 아마도 이 책 역시 다시 읽을 수 없을 것이다. 책이 혹시나 재간된다고 해도 사지 못할 것이다. 다른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수많은 책들 처럼, 시간과 함께 이 책도 기억의 공간 한 구석에 압축되어, 다시는 펴지지 않고 자리잡을 것이다. 그리고 간혹 민들레 꽃씨가 날리는 모습을 보면 법전의 문장이 떠오를 것이고, 간혹 작가가 '학교'에서 본 교훈을 떠올리면서, 불변가치의 힘을 믿고 있는지를 잠시나마 떠올려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주 가끔 입을 다문 채 무심하게 나를 쳐다보던 사진 속 소녀의, 청년의 눈과 처연한 표정의 할아버지의 나무껍질마냥 깊게 패인 주름이 기억날 지도 모른다.

아마도.


가난한 자의 벗이 되고, 
슬퍼하는 자의 새 소망이 되어라


원래는 다른 책들처럼 한 두 줄의 감상으로 이 책을 정리하고 싶었다. 이런 감상을 곱씹으면서, 글자로 풀어낸다는 것은 어렵고, 이를 다듬으면서 이 이야기를 다시 떠올려야 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힘들고, 이 글을 다시 돌아본다거나 고친다거나 할 용기가 나에게는 없다. 다만, 아마도 이 책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을 기회가 없을 것이지만, 말하고 싶은 무언가는 너무나도 많았어서, 짧은 필력으로나마 그런 이야기의 1/10이라도 해보고 싶어서 꾸역꾸역 글자로 남겨보려고 했다. 하지만 이제는 어떠한 말도 할 수 없다. 모든 말은 목에서, 손 끝에서 닫혀버렸고, 이 글은 이 서투른 형태 그대로 남아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읽히고 조용히 묻혀질 것이다. 


이 책을 읽는 계기가 된 [혼자가 되는 책들]의 이 책의 서평에서 가져온 문장을 대신하는 것으로 감상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글 속의 고통은 승화되어서는 안 된다. 고통은 영원한 현재로, 상처 또는 흉터로 잔존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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