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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jette Nov 16. 2015

롱 워크

걷기는 건강에도 좋고, 무엇보다 재미있으니까요. - 존 F.케네디

[헝거게임], [배틀로얄] 등으로 이제는 사람들에게 충분히 익숙해진 리얼리티 틴에이지 서바이벌 엔터테인먼트. 하지만 이를 이미 1960년대에, 그것도 만 19세의 소설가 지망생이, 끝내주게 근사한 소설로 뽑아냈다면, 이건 저런 서바이벌 게임보다도 더욱 현실성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물론, 그게 이야기의 제왕 '스티븐 킹'이라고 하면 그나마 조금 신빙성을 가진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스티븐 킹은 장편과 중편과 단편을 아우르며 거의 쉬지 않고 이야기를 쏟아냈고, 그 중 상당수는 국내에 해적판/정식 출간되었고, 그 중 상당수는 읽었고 늘 감탄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킹의 소설 중 어떤 것을 가장 좋아하냐고 하면 해적판으로 읽었던 이 소설을 꼽고는 한다. 하지만 이 소설이 정식출간이 되지 않고 해적판도 절판되어서(물론 나는 해적판도 갖고 있고 가끔씩 생각날 때마다 꺼내 보고는 했다) 다른 사람에게 추천할 수는 없었는데, 이번에 새로 번역해서 정식 판이 나왔다. 그래서 이제는 자신있게 남들에게도 추천해 줄 수 있다.


이야기는 매우 단순하다. 어느 시기를 알 수 없는, 아마도 근미래로 추정되는 어느 때에, 미국에서는 정기적으로 '롱워크'라는 대회가 열린다. 전국에 실시간 생중계되는 이 게임의 규칙은 단순하다. 10대 소년 지원자들 중 100명을 선출해서, 끊임없이, 6.5km/h 이상의 속도로 걷게 한다. 속도가 떨어지거나 길을 이탈하거나 하면 경고를 받고, 경고가 3회를 넘어가게 되면, 계속 그들을 관리하는 군인들에 의해 바로 총살이다. 그렇게 1명이 남을 때까지 낮이고 밤이고, 주변의 환호와 피와 시체를 지나치며 계속 걸으면 된다. 그게 끝이다. 그리고 그렇게 남은 우승자는,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무한히 밝은 미래를 보상받는다. 무리하지 말 것, 숨을 아낄 것 등의 몇 가지 기본 힌트가 주어지지만, 이건 말 그대로 힌트, 게임 내의 잠언일 뿐이다. 


이게 끝이다. 주요 인물들이 모이고 게임이 시작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되고 게임이 끝나면 이야기도 끝난다. 협력을 해야 한다거나 인물 간의 큰 갈등이 생긴다거나 하는 것도 없다. 그냥 자기 갈 길을 열심히 가면 된다. 옆 사람이 죽어나가든, 발에 쥐가 나든, 미쳐버리든. 

누군가에게는 차분했을 수도, 누군가에게는 화려했을 수도, 누군가에게는 치열했을 수도 있는 그런 삶이 이 '롱워크'라는 이상한 나라에 발을 들인 순간, '걷기'와 '일정한 길'로 횡으로 압축되어 버리고, 시작은 각자 달랐으나 끝은 대부분 그 안에서 맞게 되면서 종적으로도 압축되어 버린다. 그리고 이렇게 이지러진 시공간에서, 10대의 한참 극단으로 치닫는 소년들의 심리는 달뜬다. 말은 거칠고, 본능과 선호가 극명히 드러난다. 눈은 침침해지고, 다리는 풀리고, 이성은 마비되고, 생각은 날뛴다. 제어되지 않는 심신의 상태는, 전파력이 빠른 10대 소년들 사이에서 급속도로 전염된다. 소년들이 흘린 피만큼이나 붉은 이들의 광기 안에서는, 한없이 유치하고 허세스러울 수도 있는 말들을 툭툭 뱉어내더라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모두 살고 싶어하고, 우승자가 되고 싶어하지만, 그들은 이미 마음 한 켠에서 죽음을 향해서 걷고 있음을 안다. 치열하게 빠른 속도로 죽음을 향해서 걷고 있는 것을 알고, 그것이 삶임을 이미 깨닫는 사람들에게 어떤 말이 나올 때 그런 말에서 그 누가 진정성을 의심할 수 있을까. 길에 주저앉아버리거나 군인들에게 대들거나 길 밖으로 나가버리는 소년들의 행동에 대해 그 누가 치기어린 행동이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


그래서 이 이야기는 단순하지만 섬세하고, 거칠지만 치열하며, 차분하지만 광적이다. 어떤 공포의 주체도 없고 그냥 '개인'에 대한 이야기지만 이 거친 게임에서의 각자의 모습은 때때로 사람을 물어뜯는 삶을 함축한 모습인지라, 더욱 섬뜩하고 두렵고, 무엇보다 어딘지 모르게 굉장히 슬프게 다가오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를 이렇게 탄탄하고 잠시도 쉬지 못하고 읽어내려가게 만드는 것은 역시 스티븐 킹이어서 가능한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심지어 이게 처음 쓴 소설이요 60년대에 써서 70년대에 발표한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걷는 것을 좋아한다. 웬만한 길은 걸어다니고, 머리가 복잡할 때도 걷고, 휴가를 내고 3-4일 도보 여행길에 가서 실컷 걷기만 하고 올 때도 있다. 그러면서, 아주 가끔, 이 소설을 떠올리곤 한다. 이미 몇 번 째 읽는 지 모르겠지만, 오늘도 역시 마찬가지였고, 읽을 때마다, 떠올릴 때마다, 매번 다른 장면과 구성이 되는 이야기. 말 그대로 걷기에 대한, 혹은 비틀리고 압축되어 버린 슬픈 인간 군상을, 그리고 또 그렇게 삶은 끝을 향해 천천히 한 걸음씩 계속 나아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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