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세상에 없던 약속
1956년의 가을은 유난히 짧았다. 여름의 흔적이 채 가시기도 전에, 바람은 하룻밤 사이에 차가운 쇠 냄새를 머금고 불어왔다. 그 바람 속에서 강매실의 작은 밭에 돋아났던 푸른 싹들은 성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시간은 더 이상 그녀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이제 그녀의 세상은 또 다른 종류의 기다림 속으로 들어갔다. 그것은 그녀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오직 그녀의 집 뒷간 옆에서 육중한 몸을 불려가는 하얀 돼지의 시간이었다.
돼지의 배는 눈에 띄게 불러왔다. 그것은 더 이상 한 마리의 돼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가능성이자, 동시에 하나의 거대한 위험이었다. 마을 사람들의 시선은 이제 더 이상 노골적인 적의나 경멸이 아니었다. 그것은 훨씬 더 복잡하고 끈질긴 무언가로 변해 있었다. 마치 가뭄 끝에 첫 비를 기다리는 농부처럼, 그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강매실의 집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훔쳐보았다.
그들의 관심은 돼지가 아니었다. 그들은 돼지의 배 속에 든 새끼 돼지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진짜 관심사는 ‘약속’이었다. 과부 강매실과 푸른 눈의 신부 사이에 맺어진, 이 섬의 논리로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그 기묘한 약속. ‘새끼를 낳으면, 가장 튼튼한 놈으로 두 마리를 돌려준다.’ 과연 그녀는 그 약속을 지킬 것인가. 만약 지키지 않는다면, 신부는 어떤 행동을 할 것인가. 만약 지킨다면, 그것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가. 강매실의 선택은 그녀 개인의 것을 넘어, 마을 전체의 낡은 질서를 뒤흔드는 하나의 사건이 될 터였다.
임피제 신부는 그 모든 소용돌이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이상할 정도로 평온을 유지했다. 그는 여전히 아침마다 커피를 내렸고, 낡은 단파 라디오의 다이얼을 돌려 잡음 섞인 존 콜트레인의 색소폰 연주를 들었다. 절규하듯 울부짖다가도 깊은 명상으로 침잠하는 그 선율은, 지금 그가 이 섬에서 실행하고 있는 기묘한 실험과 닮아 있었다. 그는 툇마루에 앉아 멀리 강매실의 집을 바라보았다. 그는 알고 있었다. 이 시스템의 핵심은 강매실의 ‘자발적 선택’에 있다는 것을. 그것만이 이 거래를 자선이 아닌, 하나의 온전한 관계로 완성시킬 수 있었다.
진통은 보름달이 유난히 크고 낮게 뜬 밤에 시작되었다. 바람이 칼날처럼 살갗을 파고드는 밤이었다. 돼지는 불안하게 짚더미를 파헤치기 시작했고,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러댔다. 강매실은 등잔불 하나에 의지해 낡은 마구간으로 들어섰다. 다섯 아이들은 방문 틈으로 겁에 질린 눈을 빛내며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것은 처절한 사투였다. 거대한 몸뚱이가 경련을 일으킬 때마다, 낡은 마구간 전체가 흔들리는 듯했다. 강매실은 끓여놓은 따뜻한 물을 수건에 적셔 돼지의 몸을 닦아주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땀과 분비물로 뒤범벅이 된 채, 거친 숨을 몰아쉬는 생명체 곁을 지킬 뿐이었다.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연민이 아니었다. 차라리 어떤 동질감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그녀는 지금 저 돼지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었다. 새로운 생명을 세상에 내놓는다는 것의 그 숭고한 고통과 절대적인 고독을.
시간은 의미를 잃고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몇 번의 밤과 낮이 섞여 지나갔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거의 탈진 상태에 이르렀을 무렵, 마침내 첫 번째 새끼 돼지가 붉은 피와 함께 미끄러져 나왔다. 작고, 미끈거리며,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생명체.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살아 있었다. 제 어미의 젖을 찾아 본능적으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강매실은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첫째에 이어, 둘째, 셋째… 새끼 돼지들은 마치 오랫동안 닫혀 있던 문이 열리듯, 차례차례 세상 밖으로 밀려 나왔다. 등잔불 아래, 짚더미 위는 어느새 작고 하얀 생명들로 가득 찼다. 그들은 어미의 젖을 빨며 만족스러운 소리를 냈고, 그 소리는 지난 몇 달간 이 집을 짓누르던 침묵과 불안을 밀어내는 듯했다.
모두 열 마리였다. 어미 돼지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자신의 새끼들을 핥아주며 깊고 온화한 숨을 내쉬었다. 강매실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경이로운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이들도 어느새 마구간으로 다가와, 문지방에 쪼그리고 앉아 눈을 빛내고 있었다. 저주받았다던 ‘허연 살’이 만들어낸, 희고 따뜻한 기적. 그것은 너무나 비현실적이어서, 마치 하룻밤의 꿈처럼 느껴졌다.
소문은 다음 날 아침, 첫 연기가 피어오르기도 전에 마을 전체로 퍼져나갔다. 강매실네 허연 돼지가 새끼를 낳았다더라. 그것도 열 마리나 낳았다더라.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러나 숨길 수 없는 호기심을 안고 강매실의 집 주위를 맴돌았다. 이제 그들의 관심사는 오직 하나였다.
‘약속은 지켜질 것인가.’
강매실은 며칠 동안 마구간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녀는 갓 태어난 새끼 돼지들을 돌보는 데 온 신경을 쏟았다. 열 마리의 새끼 돼지들은 그녀의 눈앞에서 무럭무럭 자라났다. 그들은 이제 단순한 가축이 아니었다. 아이들의 굶주림을 해결해 줄 식량이었고, 찢어진 옷을 대신할 새 옷이었으며, 지긋지긋한 가난을 끊어낼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녀는 밤마다 새끼 돼지들을 세어보았다. 하나, 둘, 셋… 열. 이 모두가 자신의 것이라면. 이 열 마리의 돼지가 자라서 또다시 새끼를 낳는다면. 그녀는 처음으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구체적인 상상을 했다. 그 상상은 너무나 달콤해서,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바로 그 달콤함이 그녀를 괴롭혔다. 약속. 푸른 눈의 신부와 맺었던 그 기묘한 약속. ‘가장 튼튼한 놈으로 두 마리.’ 그녀는 열 마리의 새끼 돼지들 중에서 유난히 젖을 잘 빨고, 다른 놈들을 밀치며 씩씩하게 자라는 두 놈을 눈여겨보았다. 저 두 놈만 있다면, 앞으로의 희망은 훨씬 더 단단해질 터였다.
그녀는 갈등했다. 신부에게는 아무도 모르게 가장 작고 약한 놈으로 두 마리를 가져다주면 어떨까. 아니, 아예 새끼가 몇 마리 죽었다고 거짓말을 하면 어떨까. 신부가 마구간에 들어와 직접 세어보기라도 하겠는가. 온갖 비겁한 생각들이 독버섯처럼 피어올랐다.
그녀를 지켜보는 것은 마을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다섯 아이들이 그녀의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특히 말을 되찾은 큰아들 영호의 눈빛은 그 어떤 판관보다도 엄격했다. 아이는 어머니의 갈등을 꿰뚫어 보고 있는 듯했다.
결단의 날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그날 아침, 임피제 신부가 우물가에 나타났다. 그는 채소 소쿠리를 들고 있지 않았다. 그저 물을 길러 온 다른 아낙들과 몇 마디 인사를 나눌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등장은 강매실에게는 하나의 신호처럼 느껴졌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강매실은 집으로 돌아와, 굳은 표정으로 마구간으로 향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가장 튼튼하고 윤기가 흐르는 두 마리의 새끼 돼지를 골라 품에 안았다. 돼지들은 어미와 떨어지는 것이 싫은 듯, 낑낑거리며 발버둥 쳤다. 그 작은 몸부림이 그녀의 마음을 칼처럼 할퀴었다. 이것은 단순한 돼지 두 마리가 아니었다. 그녀의 미래, 그녀의 욕망, 그녀의 가장 달콤한 부분을 잘라내는 행위였다.
그녀는 돼지를 안고 집을 나섰다. 그 순간, 골목 어귀와 돌담 너머에서 숨죽여 그녀를 지켜보던 수십 개의 눈동자가 일제히 흔들렸다. 강매실은 그 시선들을 애써 외면하며, 임피제의 거처를 향해 묵묵히 걸었다.
임피제는 툇마루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강매실이 마당으로 들어서는 것을 보고도, 그는 놀란 기색 없이 조용히 책을 덮었다. 강매실은 그의 앞에 서서, 품에 안고 있던 두 마리의 새끼 돼지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약속한 것입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임피제는 돼지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돼지들의 상태를 살피거나, 약속이 지켜진 것에 대해 기쁨을 표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고요한 눈으로 강매실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시선은 ‘잘했다’는 칭찬도, ‘고맙다’는 감사도 아니었다. 그것은 한 인간이 자신의 내면에서 벌인 치열한 싸움을 끝내고 돌아온 것을 지켜보는, 깊은 이해와 존중의 시선이었다.
“차 한잔하시겠습니까?”
그가 물었다.
강매실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뒤돌아 자신의 집을 향해 걸었다. 발걸음은 이상할 정도로 가벼웠다. 두 마리의 돼지를 잃었지만, 그녀는 그보다 훨씬 더 크고 중요한 무언가를 얻은 기분이었다. 그것은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켜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단단하고 투명한 자존심이었다.
그녀가 사라진 마당에는 두 마리의 새끼 돼지만이 남아 낯선 환경에 어리둥절하며 킁킁거리고 있었다. 임피제는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안으로 들어가 낡은 가죽 가방을 들고 나왔다. 그는 돼지 두 마리를 조심스럽게 가방 안에 넣었다.
그가 향한 곳은 자신의 거처가 아니었다. 그는 마을의 가장 후미진 곳,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오두막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얼마 전 아내를 병으로 잃고, 세 아이와 함께 막막한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는 젊은 홀아비, 김만수가 살고 있었다.
임피제는 김만수의 집 사립문 앞에서 멈춰 섰다. 그는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대신 가방에서 새끼 돼지 한 마리를 꺼내, 문 앞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의 손에는 여전히 한 마리의 새끼 돼지가 남아 있었다.
그날 오후, 마을 원로 고봉수는 사랑방 창문을 통해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강매실이 돼지를 들고 신부에게 가는 모습, 그리고 신부가 그 돼지를 들고 다시 김만수의 집으로 향하는 모습까지. 그의 주름진 얼굴에는 복잡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평생을 이 섬의 법칙, 즉 ‘주고받는 것’의 논리 속에서 살아왔다. 하지만 지금 그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그가 아는 어떤 법칙으로도 설명할 수 없었다. 그것은 주고받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멈춰 있던 강물이 다시 흐르기 시작하는 것과 같았다.
고봉수는 길게 곰방대 연기를 뿜어냈다. 그는 알 수 없었다. 저 푸른 눈의 이방인이 시작한 이 기묘한 흐름이, 과연 이 돌멩이 같은 섬을 적시는 강물이 될지, 아니면 모든 것을 휩쓸어버리는 홍수가 될지. 그의 손에 남은 마지막 한 마리의 새끼 돼지. 그 작은 생명체가 이제 또 어디로 흘러가게 될까. 그는 자기도 모르게, 신부의 다음 행보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