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하얀 강

by 고강아놀자

제9장. 하얀 강

1959년의 봄은, 그러나 더디게 왔다. 세 달이라는 시간은 물리적으로는 명확한 단위였지만,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기묘한 탄성을 가진 고무줄과도 같았다. 이시돌 언덕의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그곳에서는 여전히 쇠와 돌이 맞부딪히는, 원시적인 소리가 났고, 사람들의 등은 땀으로 젖었으며, 그들의 희망은 저 바다 건너 보이지 않는 배 한 척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었다. 반면, 마을 공터의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최 사장의 축사는 하루가 다르게 뼈대를 갖추어갔다. 육지에서 온 기술자들은 도면에 따라 정확하게 나무를 자르고 시멘트를 부었다. 그곳의 시간은 돈으로 환산되었고, 효율이라는 이름의 채찍 아래에서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았다.

최 사장은 이따금, 자신의 검은 승용차를 몰고 이시돌 언덕 아래를 지나갔다. 그는 이제 조롱의 미소조차 짓지 않았다. 그는 마치, 이미 끝난 경기의 스코어보드를 확인하는 사람처럼, 무심한 표정으로 언덕 위를 훑어볼 뿐이었다. 그의 세계에서, 임피제 신부의 도박은 이미 실패로 결론이 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인부들에게 더 이상 임피제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는, 그런 종류의 오만한 침묵이었다.

이시돌에 남아있던 소수의 사람들은 그 침묵의 무게를 견뎌야 했다. 그들은 마을에 내려갈 때마다, 최 사장의 공사 현장에서 일하는 옛 동료들의 시선을 마주해야 했다. 그 시선에는 동정과, 약간의 경멸과, 그리고 ‘거봐, 내 말이 맞았지’ 하는 자족감이 뒤섞여 있었다. 그들은 마치, 모두가 떠나버린 유령 마을을 지키는 마지막 파수꾼들처럼, 점점 더 고립되어 갔다.

“신부님, 정말로 소가 오기는 오는 겁니까?”

어느 날, 흙먼지를 뒤집어쓴 김만수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의심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어린아이의 그것과 같은, 순수한 불안감이 담겨 있었다.

임피제는 대답 대신, 하늘을 가리켰다. “저 구름이 바람을 타고 여기까지 오듯이, 우리의 소도 바다를 건너 여기까지 올 거요. 우리는 그저, 구름이 비를 내릴 땅을 준비하면 되는 거요.”

그의 말은 어떤 논리적인 근거도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사람들을 안심시키는 힘이 있었다. 그들은 다시 곡괭이를 들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파내는 것이 단순한 돌멩이가 아니라, 마음속의 불안과 의심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들의 노동은, 하나의 기도와도 같았다.

기다림이 한계에 다다를 무렵, 마침내 부산항에서 전보 한 통이 날아왔다.

<소, 도착. 상태 양호.>

그 짧은 문장은, 지난 몇 달간 그들을 짓누르던 모든 의심과 불안을 한순간에 날려버리는, 마법의 주문과도 같았다. 이시돌의 언덕 위에서, 사람들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아이처럼 환호성을 질렀다. 강매실은 주저앉아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고, 김만수는 하늘을 향해 알아들을 수 없는 고함을 질러댔다. 그것은 너무나 비현실적이어서, 마치 하룻밤의 꿈처럼 느껴졌다.

임피제는 한달음에 부산으로 달려갔다. 낡은 트럭을 얻어 타고, 덜컹거리는 길을 달려 도착한 부산항의 부두는, 그의 상상과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 그곳은 거대한 소음과, 비릿한 바다 냄새와, 그리고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들이 뒤섞인, 혼돈의 공간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세관의 복잡한 서류 더미와, 관료들의 무심한 표정과, 그리고 보이지 않는 돈을 요구하는 손길들과 며칠 밤낮을 싸워야 했다.

마침내, 그가 마주한 거대한 나무 우리 문이 열렸을 때, 그는 순간 숨을 멈추었다.

그 안에 서 있는 것은, 그가 아일랜드의 농장에서 보았던 그런 평범한 소가 아니었다. 그것은 거의 신화 속에서나 등장할 법한, 거대하고 장엄한 생명체였다. 얼룩무늬 털은 오랜 항해에도 불구하고 윤기가 흘렀고, 커다란 눈은 깊고 평화로웠으며, 육중한 몸은 대지의 중력을 그대로 담고 있는 듯했다. 소들은 낯선 땅의 공기에 잠시 불안한 듯 콧김을 뿜었지만, 그 눈빛만은 총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지막 관문이 남아있었다. 소들을 제주까지 데려오는 일. 그는 어렵게 작은 어선을 빌려, 소들을 싣고 위태로운 남해의 파도를 헤쳐나갔다. 배가 작아, 소들은 거의 갑판 위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었다. 풍랑이라도 만나면 모든 것이 끝장이었다. 그는 밤새도록 소의 곁을 지키며, 마른 짚으로 몸을 닦아주고, 나직한 목소리로 아일랜드의 옛 노래를 불러주었다. 그것은 소를 위한 것이기도 했고, 그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1959년의 늦은 봄. 작은 어선이 한림항의 희뿌연 아침 안개를 뚫고 모습을 드러냈다.

그 소문은 밤새 바람을 타고 마을 전체로 퍼져나가 있었다. 항구에는, 약속이라도 한 듯,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나와 있었다. 이시돌의 사람들뿐만이 아니었다. 최 사장의 공사장에서 일하던 인부들도, 밭일을 나가려던 아낙들도, 심지어 최 사장 자신도, 검은 승용차에 기댄 채, 팔짱을 끼고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람들은 숨을 죽였다. 배에서 내려지는 것은, 단순한 소 두 마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바다를 건너온 편지였고, 이름 모를 사람들의 온기였으며, 절망의 벽을 무너뜨린 기적의 증거였다. 소들은 낯선 땅에 발을 내디디며, 나지막이 울음소리를 냈다. ‘음메-’ 하는 그 깊고 온화한 소리가 한림의 하늘에 울려 퍼지는 순간,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환호성을 터뜨렸다. 어떤 아낙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눈물을 터뜨렸고, 아이들은 신기한 듯 소 주위를 맴돌았다.

최 사장은 말이 없었다. 그의 얼굴에서, 늘 여유롭던 미소가 처음으로 사라져 있었다. 그는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계산으로는, 저 프로젝트는 이미 실패했어야만 했다. 그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즉 임피제가 수 년에 걸쳐 쌓아 올린 ‘신뢰 자본’의 힘을, 어렴풋이나마 목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에게 유쾌하지 않은 경험이었다.

임피제는 소의 고삐를 쥐고, 사람들의 환호 속을 가로질러 이시돌의 초원을 향해 걸었다. 그가 지나가는 길을, 사람들이 홍해처럼 갈라주었다. 소들은 자신들을 위해 마련된 푸른 풀밭과, 정성껏 지어진 우리를 보고는, 안심한 듯 편안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날, 이시돌에서는 작은 축제가 열렸다. 하지만 진짜 기적은, 그 다음 날 아침에 찾아왔다.

임피제는 그 누구보다 먼저 아침을 시작했다. 그는 낡은 양동이 두 개를 깨끗하게 닦았다. 아일랜드의 농장에서 소젖을 짜던 아버지의 모습을 어깨너머로 보며 자랐던 기억이, 마치 오래된 서랍 속에서 낡은 사진을 꺼내듯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는 작은 나무 의자를 들고, 조심스럽게 소에게 다가갔다.

그는 소의 옆구리에 뺨을 대보았다. 따뜻하고 단단한 생명의 감촉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그는 조심스럽게 젖을 쥐고, 일정한 리듬으로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쏴아~’ 하는 소리와 함께, 양동이 바닥으로 새하얀 우유가 가는 물줄기를 그리며 떨어졌다. 그것은 그가 이 섬에 온 이후 들어본 가장 아름다운 소리였다. 그것은 단순한 액체가 아니었다. 그것은 바다를 건너온 약속이었고, 이름 모를 사람들의 온기였으며,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눈물이 응축된 결과물이었다. 양동이는 금세 하얀 거품과 함께 따뜻한 우유로 가득 찼다.

그는 우유가 담긴 양동이를 들고 마을로 향했다. 그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볍고 흥분에 차 있었다. 그는 이 기적의 첫 결과물을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다. 특히 아이들에게, 이 하얀 생명수를 맛보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의 반응은 그의 예상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들은 양동이 가득 담긴 우유를 보고는, 신기해하면서도 누구 하나 선뜻 다가서려 하지 않았다. 그들의 눈빛에는 호기심과 함께, 그보다 더 짙은 의심과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이게… 소젖이라고요?”

“사람이… 이런 걸 먹어도 되는 겁니까?”

그들에게 우유는 음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송아지나 먹는, 미지의 액체일 뿐이었다. 하얀 돼지에 대한 공포가 채 가시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보다 더 새하얀 우유는 또 다른 종류의 불길한 ‘살(煞)’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최 사장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 틈에 자신의 인부들을 심어, 교묘하게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육지에서는 소젖을 잘못 먹고 배탈이 나서 죽은 사람도 있다더라.” “저건 사람이 먹을 게 아니라, 송아지나 먹는 거다.” 그의 말은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뿌리내린, 낯선 것에 대한 원초적인 공포에 불을 지폈다.

임피제는 그들의 눈빛 속에서, 자신이 또다시 거대한 벽과 마주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법이나 행정보다 더 넘기 힘든, ‘관습’과 ‘편견’이라는 이름의 벽이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마을 공동 우물가에 우유가 담긴 양동이를 놓아두고, 자신의 거처로 돌아왔다. 그는 알고 있었다. 설득이나 강요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이 벽을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은 논리가 아니라, 오직 ‘믿음’과 ‘증명’뿐이라는 것을.

그날 오후, 그는 강매실의 집을 찾아갔다. 그녀는 마당에서 말없이 빨래를 방망이로 두드리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우유를 가져왔습니다.” 임피제가 말했다. “아이들에게… 먹여보지 않으시겠습니까?”

강매실은 하던 일을 멈추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빛이 세차게 흔들렸다. 그녀는 하얀 돼지를 받아들임으로써, 마을의 적이 되었다. 이제 이 하얀 우유까지 받아들인다면, 그녀는 아이들의 목숨을 담보로 위험한 도박을 하는 어미가 될 터였다.

“사람들이… 저걸 먹으면 탈이 난다고들 합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임피제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아닐 수도 있습니다. 선택은 부인의 몫입니다.”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작은 주전자에 담아온 우유를 그녀의 집 툇마루에 내려놓고 돌아섰다.

그날 밤, 강매실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수만 가지 생각이 충돌했다. 최 사장이 퍼뜨린 저주의 말들과, 임피제 신부의 고요한 눈빛. 마을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과, 앙상한 막내 아이의 잠든 얼굴. 그녀는 툇마루에 놓인 우유를 바라보았다. 달빛 아래, 우유는 기묘할 정도로 희고 순결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것은 구원일까, 아니면 또 다른 재앙일까.

다음 날 아침. 그녀는 마침내 결심했다. 그녀는 주전자의 우유를 냄비에 붓고, 아궁이에 불을 지펴 정성껏 끓였다. 그리고는 식힌 우유를 작은 사발에 담아, 가장 어리고 약한 막내 아이에게 내밀었다. 아이는 낯선 냄새에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한 모금을 마셨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남은 우유를 단숨에 비웠다. 아이의 입가에 하얀 우유 수염이 생겼다. 강매실은 가슴을 졸이며, 아이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그 소문은 즉시 마을 전체로 퍼져나갔다. 강매실이 아이에게 소젖을 먹였다는 이야기. 사람들은 이제 그녀를 미친 여자 취급했다. 그들은 강매실의 집 주위를 맴돌며, 아이가 당장이라도 배를 움켜쥐고 쓰러지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아이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늘 핼쑥하던 아이의 얼굴에 희미하게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또 다른 기적이 일어났다. 아일랜드에서 온 젖소 중, 임신한 상태였던 한 마리가 진통을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마을 전체의 축제이자, 거대한 사건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이시돌의 외양간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그 공간에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경이로운 순간을 함께하고 싶었다.

어미 소의 고통스러운 비명과, 사람들의 숨죽인 기다림 속에서, 마침내 작고 하얀 송아지가 세상 밖으로 미끄러져 나왔다. 젖은 몸을 털고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그 작은 생명체의 모습은, 그 어떤 설교보다도 강력한 희망의 메시지였다. 그것은 이 땅에 뿌리내린 새로운 생명이었고, 지속 가능한 미래에 대한 명백한 약속이었다. 최 사장조차도, 자신의 사무실에서 그 소식을 전해 듣고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볼 뿐이었다.

송아지의 탄생과, 강매실 아이의 건강한 모습. 이 두 개의 사건은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기 시작했다. 며칠 후, 한 아낙이 조심스럽게 임피제를 찾아왔다.

“신부님… 저희 아이도, 젖이 부족해서… 혹시, 그 우유를 조금만 얻을 수 있을까요?”

그것이 시작이었다. 한 사람이 두 사람이 되고, 두 사람이 세 사람이 되었다. 임피제는 찾아오는 모든 이에게 우유를 나누어 주었다. 하지만 그는 그냥 주지 않았다. 그는 새로운 규칙을 만들었다. 우유를 얻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남자들은 이시돌의 초원을 돌보는 일을 도왔고, 여자들은 외양간을 청소하거나 젖 짜는 일을 거들었다. 아이들은 소가 먹을 풀을 베어 왔다.

이시돌 목장은 더 이상 임피제 신부 개인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을 사람들 모두가 함께 가꾸고, 함께 나누는 거대한 협동조합이 되어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노동의 대가로 우유를 얻어갔고, 그 우유는 아이들의 생명을 살렸다. 닫혀 있던 섬은 그렇게, ‘나눔’과 ‘협동’이라는 새로운 순환을 배우기 시작했다.

어느 맑은 날 오후, 임피제는 이시돌 언덕에 앉아, 아이들이 우유를 마시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아이들의 입가에는 하얀 우유 수염이 훈장처럼 달려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그는 자신의 방에 있는 낡은 단파 라디오를 떠올렸다.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이 섬에서 만들고 싶었던 것은, 어쩌면 하나의 거대한 음악이었을지도 모른다고. 도랑을 흐르는 물소리와, 돼지의 꿀꿀거림, 쇠스랑 소리와 곡괭이 소리, 그리고 마침내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어우러지는. 그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교향곡은 이제 막 1악장을 끝냈을 뿐이었다. 앞으로 어떤 변주와 불협화음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 섬의 시간은, 이제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하얗고, 따뜻하며, 생명의 맛이 나는 강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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