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폐허 위의 아침

by 고강아놀자

제11장. 폐허 위의 아침

태풍이 지나간 아침은, 세상의 모든 소리가 한꺼번에 사라져버린 듯한 기이한 정적 속에서 시작되었다. 밤새 온 세상을 집어삼킬 듯 울부짖던 바람의 괴수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마치 거대한 진공과도 같은 침묵만이 남았다. 하늘은 언제 분노했냐는 듯, 핼쑥한 환자처럼 창백한 잿빛 얼굴을 하고 있었다. 비는 멈췄지만, 세상 모든 것이 흠뻑 젖어 있었다. 나뭇가지 끝에서, 부서진 지붕의 처마 끝에서, 물방울이 뚝, 뚝, 하고 떨어지는 소리만이 유일하게 시간의 흐름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 소리는 마치, 거대한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멈춘 뒤, 어느 한 악기가 미처 거두지 못한 마지막 음표처럼, 텅 빈 공간 속을 외롭게 떠다녔다.

사람들은 밤새 뜬눈으로 공포와 싸운 끝에, 새벽녘이 되어서야 잠시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이 어색한 고요함에 이끌려 하나둘씩 잠에서 깨어났다. 그들은 마치 낯선 행성에서 아침을 맞은 사람들처럼, 조심스럽게 부서진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자신들의 눈앞에 펼쳐진 풍경 앞에서, 할 말을 잃었다.

그곳에는 더 이상 그들이 알던 마을이 없었다. 나지막하고 정겨웠던 돌담들은 대부분 무너져, 밭과 길의 경계를 지워버렸다. 평생을 의지해 살아온 집들은 지붕이 날아가거나 벽이 허물어져, 속을 훤히 드러낸 채 비참하게 서 있었다. 애써 가꾼 밭은 거대한 흙탕물 웅덩이로 변해, 지난 계절의 모든 수고를 집어삼킨 채 침묵하고 있었다. 그것은 전쟁이 휩쓸고 간 폐허와도 같았다. 모든 것이 부서지고, 씻겨 내려가고, 제자리를 잃어버렸다.

사람들은 그저 멍하니 서 있었다.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슬픔이나 분노를 느끼기에는, 상실의 규모가 너무나 거대하고 압도적이었다. 그들의 마음은 마치, 너무 큰 충격을 받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버린 듯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이라는 책이, 간밤의 폭풍우에 흠뻑 젖어 모든 글자가 지워져 버린 것을 발견한 독자와도 같았다.

임피제 신부는 외양간에서 밤을 새웠다. 그는 잿빛 하늘 아래 펼쳐진 폐허를 바라보며, 깊은 무력감에 휩싸였다. 그는 지금껏 자신이 이 섬에서 해온 모든 일들이, 이 거대한 자연의 힘 앞에서 한낱 어린아이의 모래성 쌓기 놀이에 불과했던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가 애써 쌓아 올린 모든 것이, 하룻밤의 파도에 허무하게 쓸려가 버렸다.

하지만 그때, 그의 눈에 한 가지 이질적인 풍경이 들어왔다. 폐허가 된 마을의 한가운데, 이시돌의 언덕 위에는, 외양간이 기적처럼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비록 지붕은 상처투성이였고 벽은 군데군데 뜯겨 나갔지만, 그 뼈대만은 굳건히 땅에 뿌리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는, 밤새 공포에 떨었던 소들이 내는 나지막한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살아남은 것이다.

그 사실이 그의 마음에 작은 불씨 하나를 던졌다. 그는 녹초가 된 몸을 일으켜, 외양간으로 들어갔다. 소들은 온몸이 비에 젖어 있었지만, 다행히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임신했던 어미 소와, 그 곁에 꼭 붙어 있는 어린 송아지도 무사했다. 그는 소들의 몸을 마른 짚으로 닦아주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괜찮다. 다 괜찮아.” 그것은 소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고, 그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의 등 뒤로,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무너진 집을 뒤로하고,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이시돌의 언덕으로 향했다. 그들의 발걸음은 무거웠지만, 그들의 시선은 모두 한 곳, 기적처럼 살아남은 외양간을 향해 있었다. 그곳은 이제 단순한 외양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모든 것이 사라진 폐허 속에서, 유일하게 남은 희망의 증거이자, 그들 모두가 함께 지켜낸 공동의 성채였다.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외양간 주위에 서서, 무사한 소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 강매실이 조용히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양동이를 닦고, 작은 의자를 놓고, 어미 소의 젖을 짜기 시작했다. ‘쏴아…’ 하는 규칙적인 소리가, 폐허의 아침을 깨우는 첫 소리가 되었다. 그 소리는 마치, 멈춰버린 세상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하는 소리처럼 들렸다.

따뜻한 우유가 양동이에 가득 차자, 그녀는 그것을 겁에 질린 아이들에게 먼저 나누어 주었다. 아이들은 따뜻한 우유를 한 모금씩 마시며, 조금씩 안정을 되찾아갔다. 그 모습을 보던 어른들의 굳어 있던 얼굴 근육도 아주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잃었지만, 모든 것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젖소와, 우유와, 그리고 무엇보다도 ‘함께’라는 감각이 남아 있었다.

한편, 마을의 다른 쪽 끝, 최 사장의 가건물 사무실에서도 다른 종류의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그는 밤새 들이킨 독한 위스키 때문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잠에서 깼다. 그는 뻐근한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 앞에서, 그는 평생 처음으로 사고(思考)가 정지하는 경험을 했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자부하던 현대식 축사는, 마치 거대한 거인의 손에 의해 짓이겨진 장난감처럼,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잔해 더미가 되어 있었다. 번쩍이던 아연 도금 강판 지붕은 종잇장처럼 구겨져 저 멀리 밭두렁에 처박혀 있었고, 그 어떤 바람도 견딜 것 같았던 콘크리트 기둥들은 힘없이 부러져 있었다. 그의 ‘효율’과 ‘합리’는, 이 섬의 진짜 바람 앞에서는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한 채, 처참하게 파산해 버린 것이다.

그는 멍하니 서 있었다. 그의 잘 닦인 구두는 어느새 진흙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감정이 아닌, 계산기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손실액, 복구 비용, 예상 지연 기간, 계약 불이행에 따른 위약금. 숫자들이 빠르게 떠올랐다가, 냉정하게 지워졌다.

그의 시선이 저 멀리 이시돌 언덕으로 향했다. 무너졌어야 할 외양간은 서 있었다. 상처투성이였지만,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그 주위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비효율적이고 무질서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최 사장은 그 풍경을 바라보며 입가에 희미한 냉소를 지었다. 그는 자신이 졌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운이 없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예측 범위를 벗어난 자연재해. 그것은 사업의 리스크일 뿐, 자신의 방식이 틀렸다는 증거는 아니었다. 그의 머릿속은 이미 다음 단계를 그리고 있었다.

‘변수가 너무 많아.’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섬은 아직 현대적인 사업을 하기에 적합한 곳이 아니야. 예측 불가능한 자연, 비합리적인 사람들. 이런 곳에 직접 투자를 하는 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다.’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이시돌 언덕의 사람들을 보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들 너머, 더 큰 그림을 보고 있었다.

‘저들이 저렇게 버티는 건, 아직 외부 세계와 단절되어 있기 때문이다. 저들만의 방식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지. 좋다. 그렇다면 판을 바꾸면 된다.’

그는 반성하지 않았다. 그는 분석하고, 전략을 수정할 뿐이었다. 직접 생산자가 되어 이 섬을 지배하려던 계획은 실패했다. 그렇다면, 다음 단계는 유통을 장악하는 것이다. 이 섬에서 생산되는 모든 것이, 결국에는 자신의 손을 거쳐야만 육지로 나갈 수 있게 만들면 된다. 언젠가 저들이 우유를 팔고, 돼지를 팔게 될 때, 그 가격을 결정하는 것은 자신이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저들의 그 숭고한 공동체도 결국 돈 앞에서 무릎 꿇게 될 터였다.

그는 자신의 운전기사를 불렀다.

“차… 빼낼 수 있겠나?”

검은 승용차는 밤새 퍼부은 비로 생긴 깊은 진흙 구덩이에 바퀴가 빠져 꼼짝도 하지 못했다.

“사장님, 아무래도 오늘은 힘들 것 같습니다. 읍내에서 사람을 불러야…”

“됐다.” 최 사장은 말을 잘랐다. “차는 버려. 부산으로 돌아가서 새 차를 사면 그만이야.”

그에게 자동차는 자산 목록의 한 줄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가, 남은 위스키 병과 서류 가방을 챙겼다. 그는 흙탕물에 잠긴 돼지들의 시체나, 무너진 축사의 잔해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그것들은 이미 그의 대차대조표에서 ‘손실’로 처리된 항목일 뿐이었다.

그는 읍내로 향하는 흙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의 번지르르하던 양복은 흙탕물에 젖었고, 오만하게 빛나던 구두는 진흙을 뒤집어쓴 채 비참한 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의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는 이 섬을 떠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잠시, 더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물러서는 것뿐이었다. 그는 몇 번쯤 뒤를 돌아볼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과거는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중요한 것은 오직, 미래의 이윤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한 사람은 길을 나섰다. 이것은 어쩌면, 더 거대하고 교활한 방식으로 돌아오기 위한, 다른 종류의 시작이었는지도 모른다.

고봉수 원로가 임피제에게 다가왔다. 그의 얼굴에는 평생을 지켜온 세계가 무너져 내린 자의 깊은 허탈함과, 동시에 새로운 세계의 시작을 목격한 자의 경외감이 뒤섞여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이 푸른 눈의 이방인을 ‘코쟁이’나 ‘미친놈’으로 보지 않았다.

“신부님.” 그가 입을 열었다. “이제… 우리가 뭘 하면 되겠소?”

그것은 항복 선언이자, 동시에 완전한 신뢰의 표현이었다. 낡은 질서의 리더가, 새로운 질서의 개척자에게 길을 묻고 있었다.

임피제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천천히, 그리고 힘주어 말했다.

“제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이제 함께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의 말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조용한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명령하지 않았다. 그는 길을 제시하는 대신, 함께 길을 찾자고 제안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평생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방식의 리더십이었다.

그날 점심, 사람들은 무너진 외양간 앞에 둘러앉았다. 그것은 마을의 첫 번째 공식적인 회의였다. 의제는 단 하나, ‘어떻게 다시 시작할 것인가’였다. 누군가는 당장 자신의 집부터 고쳐야 한다고 말했고, 누군가는 망가진 밭을 복구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주장했다. 의견은 분분했고, 사람들의 목소리에는 절망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

그때, 지금껏 조용히 듣고만 있던 김만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풍이 오기 전, 다시 술에 의지하며 무너져가던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밤새 비바람과 싸우며, 그는 자신의 내면에 남아 있던 마지막 절망의 찌꺼기까지 모두 씻어낸 듯했다. 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하고 명료했다.

“집도 중요하고, 밭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따로 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우리가 어젯밤, 목숨을 걸고 지켜낸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저 소들입니다. 저 소들이 바로 우리의 미래입니다. 지금 당장, 저 소들이 안전하게 지낼 수 있도록 외양간부터 다시, 더 튼튼하게 지어야 합니다. 우리의 집은, 그 다음에 지어도 늦지 않습니다.”

그의 말은 사람들의 마음을 관통했다. 그것은 지극히 비합리적인 제안처럼 들렸지만, 동시에 그 어떤 논리적인 주장보다 더 깊은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지금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당장의 안락함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희망을 다시 세우는 일이라는 것을.

고봉수 원로가 깊게 고개를 끄덕였다. “김 서방 말이 옳아. 우리 집은 무너져도 다시 지으면 되지만, 저 희망이 무너지면 우리는 영영 일어설 수 없을 게야.”

그의 말에, 사람들은 마치 오랫동안 잊었던 주문을 되찾은 것처럼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눈에는 눈물과 피로, 그리고 어떤 뜨거운 결의가 뒤섞여 있었다.

하지만 그 뜨거운 군중의 가장자리에, 고은영은 서 있었다. 그녀는 사람들의 얼굴을, 그들의 젖은 눈을, 그리고 불끈 쥔 주먹들을, 마치 자신과는 상관없는 연극을 보는 관객처럼, 어떤 감정도 비치지 않는 눈으로 조용히 관찰하고 있었다. 그녀의 집은 이번 태풍으로 마을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집 중 하나였다. 지붕의 서까래가 통째로 날아가, 휑한 구멍으로 잿빛 하늘이 그대로 보였다. 그녀의 시선은 사람들의 얼굴을 지나, 저 멀리 이시돌 언덕 위에 상처 입은 채 서 있는 외양간에 잠시 머물렀다. 그리고는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품속의 작은 수첩에 무언가를 짧게 기록했다. 그것은 숫자에 가까운, 어떤 종류의 계산이었다. 그녀에게 이 상황은 감동이 아니라, 하나의 풀어야 할 문제였다. 그리고 그 문제의 해답은, 그녀의 생각에, 저들이 말하는 ‘희망’과는 전혀 다른 곳에 있는 것 같았다.

그날 오후부터, 거대한 재건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더 이상 흩어진 개인이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의 목표를 향해 움직이는, 거대한 유기체와도 같았다. 남자들은 무너진 집의 잔해 속에서 쓸 만한 목재와 돌을 모아 이시돌로 날랐다. 영호는 어른들 사이를 오가며, 전체적인 작업을 지휘하는 젊은 리더가 되어 있었다. 여자들은 마을의 몇 안 남은 솥을 걸고 공동으로 밥을 지었고, 아이들은 작은 손으로 돌멩이를 나르며 일을 도왔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또 다른 혁신을 발견했다. 각자의 집을 따로 짓는 것보다, 함께 힘을 합쳐 하나의 집을 짓고, 다음 집으로 옮겨가는 것이 훨씬 더 효율적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자연스럽게 역할을 분담하고, 자원을 공유하며, 문제를 함께 해결해나가는 법을 터득하기 시작했다. 이시돌 목장은 이제 단순한 목장이 아니라, 그들의 재건 본부이자, 새로운 공동체의 실험장이 되었다.

며칠이 지났을까. 신당 지붕이 날아가 망연자실해 있던 변씨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조용히 마을을 떠났다. 그는 누구에게도 작별 인사를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이시돌 언덕에서 울려 퍼지는 힘찬 망치 소리와 사람들의 활기찬 목소리를 등진 채, 언덕 너머로 사라졌다. 그의 시대는, 그렇게 소리 없이 막을 내렸다. 그는 새로운 세상의 소음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임피제는 그 모든 과정을, 한 걸음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앞에서 사람들을 이끌지 않았다. 그는 그저 필요한 자재를 구해주고, 기술적인 조언을 건네며, 그들이 스스로 길을 찾아 나갈 수 있도록 돕는 조력자의 역할을 할 뿐이었다.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한 가장 위대한 일은 돼지나 소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 마음속에 ‘우리도 할 수 있다’는 믿음의 씨앗을 심은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태풍은, 그 씨앗이 마침내 싹을 틔우게 한 거친 비바람과도 같았다.

어느덧 저녁이 되어, 이시돌 언덕 위로 붉은 노을이 번져갔다. 사람들은 고된 노동을 마치고,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아 강매실이 끓여준 멀건 죽을 나누어 먹었다. 그들의 행색은 남루했고, 얼굴은 피로에 지쳐 있었지만, 그들의 눈빛만은 그 어느 때보다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들은 폐허 위에서, 서로의 온기에 의지해 내일의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임피제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자신의 방에 있는 낡은 단파 라디오를 떠올렸다. 그는 생각했다. 자신이 이 섬에서 만들고 싶었던 것은, 어쩌면 하나의 거대한 음악이었을지도 모른다고. 도랑을 흐르는 물소리와, 돼지의 꿀꿀거림, 쇠스랑 소리와 곡괭이 소리, 그리고 마침내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어우러지는. 그리고 오늘, 태풍이 남긴 폐허 위에서, 그는 그 교향곡의 가장 장엄하고 아름다운 악장이 연주되는 것을 듣고 있었다.

그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잿빛 하늘 아래, 폐허 위에서, 이 섬의 진짜 기적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이전 11화제10장. 태풍 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