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테쉬폰, 혹은 바람의 집
태풍이 지나간 후, 한림의 시간은 마치 고장 난 시계처럼, 폐허가 된 아침에 멈춰버린 듯했다. 하지만 인간의 시간은 시계와는 달라서, 멈추는 법이 없었다. 사람들은 무너진 집의 잔해 속에서, 젖은 옷을 말리고, 깨진 항아리 조각을 맞추고, 먹을 것을 구하며 하루를 보냈다. 절망할 시간조차 사치였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오직, 살아남은 자의 고된 의무뿐이었다.
이시돌 목장은 그들의 새로운 중심이 되었다. 그곳은 더 이상 단순한 목장이 아니었다. 그곳은 재건 본부였고, 공동 식당이었으며, 밤이 되면 아이들과 노인들이 한데 모여 서로의 온기에 의지해 잠을 청하는 유일한 피난처였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집보다, 공동의 희망이 담긴 외양간을 먼저 일으켜 세웠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나’가 아닌 ‘우리’라는 단어의 무게를 배우고 있었다.
하지만 재건의 과정은 더디고 비효율적이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평생을 살아온 방식 그대로, 무너진 돌담을 다시 쌓고, 부서진 나무 기둥을 이어 붙였다. 그들의 손은 부지런했지만, 그들의 방식은 과거에 머물러 있었다. 임피제 신부는 그 모습을 한 걸음 뒤에서, 깊은 고뇌에 잠긴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 그들의 모든 노력은 마치 시시포스가 영원히 바위를 밀어 올리는 형벌처럼 보였다. 그들은 지금, 다음 태풍이 오면 또다시 무너져 내릴 것들을 필사적으로 다시 쌓아 올리고 있었다. 이 섬의 가장 큰 적은 바람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바람과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네모나고 각진 집만을 고집하고 있었다. 그것은 용감한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것이었다. 마치 거대한 파도를 향해 맨주먹을 휘두르는 것과 같았다.
그는 깨달았다. 진정한 혁신은 단순히 무너진 것을 다시 세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은 무너진 이유를 파악하고, 다시는 무너지지 않을 새로운 시스템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더 이상 돼지나 소를 가져다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이제, 이 섬에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방식’을 제시해야만 했다.
그날 밤, 그는 자신의 작은 방에서 낡은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신학생 시절, 건축사에 관한 수업에서 무심코 넘겨보았던 낡은 원서였다. 그는 책장을 넘기다, 어느 한 페이지에서 손가락을 멈추었다. 그곳에는 메소포타미아의 고대 도시 ‘테쉬폰(Ctesiphon)’에 남아있는, 거대한 아치형 구조물의 흑백 사진이 실려 있었다.
그것은 그가 평생 보아온 어떤 건물과도 달랐다. 기둥도, 대들보도 없이, 오직 부드러운 곡선 하나가 거대한 공간을 떠받치고 있었다. 그 단순하고도 완벽한 형태는, 마치 대지가 스스로 숨을 쉬며 부풀어 오른 것처럼 보였다. 사진 아래에는 짧은 설명이 적혀 있었다. ‘아치 구조는 수직으로 내리누르는 힘을 곡선을 따라 양옆으로 분산시켜, 최소한의 재료로 최대한의 공간과 안정성을 확보하는, 고대의 혁신적인 건축 방식이다.’
‘힘을 분산시킨다.’
그 단어가 그의 머릿속을 강타했다. 그는 깨달았다. 바람과 싸워 이길 수는 없다. 그렇다면, 바람의 힘을 거스르지 않고, 부드럽게 흘려보내면 되는 것이 아닐까. 그는 종이를 꺼내, 펜으로 그 아치 구조를 그려보기 시작했다. 그는 그것을 외양간에, 돼지우리에, 그리고 창고에 적용해 보았다. 곡선은 바람을 타고 미끄러지듯 흘러갈 터였다. 그것은 저항이 아닌, 순응의 건축이었다. 그리고 그 어떤 직선보다도 강인한, 역설의 건축이었다.
다음 날 아침, 마을 회의에서 그는 자신의 구상을 사람들에게 설명했다. 그는 종이에 그린 어설픈 그림을 보여주며, 아치 구조의 원리에 대해 서툰 한국말로 열변을 토했다.
사람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들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신부님, 집이라는 것은 본디 기둥이 지붕을 받치고, 벽이 바람을 막아주는 법입니다. 저렇게 둥그런 것이 어떻게 집이 될 수 있단 말입니까?” 고봉수 원로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의 말은 마을 사람들 모두의 생각을 대변하고 있었다.
“저건… 집이 아니라, 무덤처럼 생겼습니다.” 누군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 말에 사람들 사이에서 불안한 수군거림이 퍼져나갔다. 이 섬에서 ‘무덤’이라는 단어가 가진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바로 그때, 회의장 구석에서 조용한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웅성거리는 모든 소음을 뚫고 사람들의 귀에 선명하게 박혔다.
“신부님 말씀은, 그러니까… 지금 당장 우리에게 필요한 무너진 집 수십 채를 고칠 자재와 노동력을, 저 정체 모를 건물 하나를 짓는 데 전부 쏟아붓자는 말씀이십니까?”
사람들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고은영이 서 있었다. 그녀는 과묵하고 손재주가 좋았지만, 늘 중심에서 한 발짝 비켜서 있는 여자였다. 그녀는 강매실의 헌신이나 다른 아낙들의 떠들썩함과는 다른 종류의 사람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드러나 있지 않았다. 오직, 잘 벼려진 칼날 같은 차가운 이성만이 번뜩이고 있었다.
그녀는 임피제 신부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는, 말을 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
“저 역시 신부님의 뜻을 존경합니다. 하지만, 신부님의 꿈은 너무 멀리 있는 것 같습니다. 제 아이들은 어젯밤에도 비가 새는 지붕 아래에서 잠을 설쳤습니다. 저뿐만이 아닐 겁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미래에도 무너지지 않을 멋진 외양간이 아니라, 당장 오늘 밤의 비를 막아줄 초라한 지붕 한 조각입니다. 신부님의 계획은, 굶주린 사람에게 밭을 가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먼 나라의 밀가루로 만들 케이크의 조리법을 설명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녀의 말은 너무나도 합리적이어서, 누구도 쉽게 반박할 수 없었다. 그녀는 감정에 호소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직, 모두가 외면하고 싶었던 냉정한 현실을 숫자로 환산하여 눈앞에 제시했을 뿐이다. 그녀의 말에, 회의장의 공기는 급격하게 차가워졌다. ‘함께’라는 뜨거운 감정에 휩싸여 있던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나의 손실’이라는 차가운 계산기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고은영은 태풍이 닥쳤을 때, 누구보다 열심히 이시돌의 외양간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 하지만 그녀는 밤새, 공동의 희망을 지키는 동안 자신의 집 지붕이 통째로 날아가 버리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봐야만 했다. 그녀는 공동체의 대의를 이해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대의를 위해 희생된 ‘개인의 손실’을 결코 잊지 않았다. 그날 밤의 경험은 그녀에게 ‘공동체란 결국 개인의 희생을 정당화하는 아름다운 허상’이라는 냉소적인 믿음을 심어주었다.
임피제는 다시 한번 거대한 벽과 마주했다. 그것은 ‘상식’과 ‘고정관념’이라는 벽보다 더 단단한, ‘지극히 합리적인 절망’이라는 이름의 벽이었다. 그는 깨달았다. 백 마디의 설명보다, 한 번의 증명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서 일을 시작했다. 그는 이시돌 목장의 한구석에, 아주 작은 크기의 ‘테쉬폰’을 직접 짓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그의 새로운 ‘프로토타입’이었다.
그는 먼저 나무판자를 이용해 부드러운 곡선 형태의 거푸집을 만들었다. 그 과정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나무는 자꾸만 직선으로 돌아가려 했고, 곡선은 그의 뜻대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며칠 밤낮의 사투 끝에, 그는 마침내 자신이 원하는 모양의 거푸집을 완성할 수 있었다.
다음은 시멘트였다. 그는 모래와 자갈, 그리고 미군 부대에서 겨우 얻어온 귀한 시멘트를 정해진 비율대로 섞었다. 그리고는 그 반죽을 거푸집 위에 꼼꼼하게 펴 발랐다. 마치 빵에 버터를 바르듯, 그는 자신의 모든 희망과 의지를 그 회색 반죽 안에 눌러 담았다.
마을 사람들은 그의 기이한 행동을 멀찍이서 지켜보았다. 그들은 신부가 마침내 태풍의 충격으로 실성한 것이라고 수군거렸다. 고은영은 그 모습을, 자신의 무너진 집 마루에 앉아, 아무 말 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동정이 아닌, 차가운 분석의 빛이 감돌고 있었다. ‘저렇게 낭비되는 시멘트면, 우리 집 벽을 메울 수 있을 텐데.’
시멘트가 굳기를 기다리는 며칠 동안, 그는 거의 잠을 자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작은 창조물 곁을 지키며, 그것이 무너지지 않기를 기도했다. 마침내 약속의 날이 왔다. 그는 김만수와 영호를 불렀다. 세 사람은 긴장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거푸집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나무판자가 하나씩 떨어져 나갈 때마다, 사람들의 숨죽인 탄성이 터져 나왔다. 마침내 마지막 판자가 떨어져 나갔을 때, 그들의 눈앞에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아무런 기둥도, 버팀목도 없이, 완벽한 곡선의 아치가 스스로의 힘으로 서 있었다. 햇살을 받은 그것의 표면은 짐승의 등처럼 매끄럽고 단단하게 빛났다. 그것은 건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조각품이자, 중력의 법칙을 거스르는 기적처럼 보였다.
바로 그때,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거센 바닷바람이 언덕 위로 불어왔다. 사람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바람은 아치 구조물을 때리는 대신, 그 부드러운 곡면을 타고 미끄러지듯, 휘파람 소리를 내며 하늘로 솟구쳐 올라갔다. 아치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고봉수 원로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거친 손으로 아치의 표면을 쓸어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평생을 지켜온 신념이 무너져 내리는 자의 깊은 혼란과, 동시에 새로운 진실을 목격한 자의 경외감이 뒤섞여 있었다.
“이것이… 정말 무너지지 않는단 말이오?”
“네.” 임피제가 대답했다. “이것은 바람과 싸우는 집이 아니라, 바람과 함께 춤을 추는 집이기 때문입니다.”
그 한마디가 모든 것을 바꾸었다. 사람들은 환호했다. 하지만 고은영은 환호하지 않았다. 그녀는 인파의 가장자리에서, 차가운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기적을 본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단지, ‘하나의 가설이 성공적으로 입증된 실험’을 보았을 뿐이다. 그리고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이 새로운 기술을 어떻게 하면 가장 ‘효율적’으로 활용하여, 가장 ‘공정한’ 분배를 이끌어낼 수 있을지에 대한, 또 다른 계산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녀는 이번에도 침묵했다. 하지만 그녀의 침묵은 동의가 아니었다. 그것은 더 큰 논쟁을 위한, 차갑고 단단한 준비 과정이었다.
그날 이후, 이시돌의 풍경은 다시 한번 변하기 시작했다. 마을 남자들은 임피제에게 테쉬폰을 짓는 법을 배웠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무너진 과거를 복제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새로운 미래를 짓기 시작했다.
이시돌 언덕 위로, 고래의 등뼈를 닮은 기이하고도 아름다운 구조물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외양간, 돼지우리, 퇴비 공장, 그리고 창고. 그것들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태풍이라는 거대한 시련을 이겨낸 그들의 정신과, 낡은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인 그들의 혁신이 담긴, 희망의 기념비였다.
어느 맑은 날 오후, 임피제는 언덕 위에 서서, 바람을 맞으며 서 있는 테쉬폰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들은 마치 대지에 뿌리내린 거대한 생명체처럼, 조용히 숨을 쉬고 있는 듯했다. 그는 생각했다. 자신이 이 섬에 와서 한 일은, 어쩌면 ‘연결’이었을지도 모른다고. 막혀 있던 물길을 바다와 연결하고, 고립된 사람들을 세상과 연결했으며, 마침내 땅과 바람을 화해시켰다.
그의 시선이 테쉬폰 너머, 여전히 재건의 먼지가 피어오르는 마을을 향했다. 교향곡은 이제 마지막 악장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 선율은 때로는 격정적이고, 때로는 고요하겠지만, 분명 희망을 향해 흐르고 있었다. 그는 조용히 눈을 감고, 바람결에 실려 오는 힘찬 망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것은 그가 이 섬에서 들었던, 그 어떤 음악보다도 아름다운 연주였다. 하지만 그는 그 합주곡의 저 깊은 곳에서, 누구의 귀에도 들리지 않는, 아주 작지만 차가운 불협화음이 시작되고 있음을, 어렴풋이 예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