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장. 겨울의 풀
1960년의 가을은, 마치 누군가 실수로 다른 계절의 페이지를 찢어 붙여놓은 것처럼 짧고 어색했다. 태풍 ‘사라’가 남긴 상처를 채 추스르기도 전에,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벌써 겨울의 냄새, 즉 모든 것을 지워버리는 소독약과 마른 흙의 냄새를 품고 있었다. 사람들은 갓 완성된 테쉬폰의 둥근 지붕 아래에서 웃고 떠들었다. 그 웃음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공허해서, 마치 텅 빈 창고 안에서 울리는 소리 같았다. 그들은 다가올 겨울이 이전과는 다를 것이라고, 적어도 이 지붕 아래에서는 안전할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혹은 서로에게 주문을 외듯 말했다.
하지만 겨울은 약속된 시간에 정확히 찾아왔다. 그것은 언제나 약속을 지키는, 냉혹하고 신사적인 암살자와도 같았다. 대지가 단단하게 얼어붙을 무렵, 첫 번째 위기가 닥쳤다. 여름내 비축해 둔 건초가 예상보다 빨리 동나기 시작한 것이다. 1959년 단 두 마리로 시작했던 소는, 그해 기적처럼 첫 암송아지를 낳고 이듬해 한 마리를 더 보태 어느덧 네 마리로 늘어나 있었다. 그 작지만 소중한 성공이, 이제 막막한 현실의 벽에 부딪힌 것이다.
테쉬폰 창고에서 열린 마을 회의의 공기는 얼음장 같았다. 임피제 신부는 구석에 앉아, 마치 오래된 영화를 보는 관객처럼 무심한 표정을 지으려 애썼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얼마 전 라디오에서 들었던 돈 깁슨(Don Gibson)의 <I Can't Stop Loving You>의 선율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비록 너는 나를 떠났지만, 나는 너를 사랑하는 것을 멈출 수 없다는, 그런 종류의 체념적인 사랑 노래. 지금 이 상황과 기묘하게 어울리는 구석이 있었다.
그때, 고은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닳아빠진 수첩을 펼쳐 보이며, 한 치의 감정도 싣지 않은 목소리로 현실을 선고했다. “이대로라면 한 달을 버티기 힘듭니다. 가장 쇠약한 소 한 마리를 팔아야 합니다. 그 돈으로 사료를 사 와야, 나머지라도 살릴 수 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회의장의 온도를 몇 도 더 떨어뜨렸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임피제는 고통스러운 얼굴로 눈을 감았다. 네 마리밖에 없는 가족 같은 소 중 하나를, 그것도 가장 약한 ‘순심이’를 골라 팔아야 한다는 사실이 심장을 저몄다.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굶주려가는 소들의 공허한 눈빛과, 마을 사람들의 절박한 얼굴 앞에서 그의 신앙은 무력했다. 그것은 마치, 아름다운 음악이 흐르던 레코드판 위에 누군가 거칠게 바늘을 올려놓아, ‘지지직’ 하는 끔찍한 소음이 모든 것을 망쳐버리는 것과도 같았다.
다음 날, 김만수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순심이의 목에 밧줄을 걸었다. 그는 이 섬에서 가장 용감한 사내 중 하나였지만, 그 순간 그의 어깨는 한없이 작아 보였다. 순심이가 마지막으로 울부짖던 소리가 그날 밤 모두의 귓가에 남아 떠나지 않았다.
그 밤, 임피제는 텅 비어버린 외양간 한쪽을 보며 낡은 책상에 앉아 펜을 들었다. 이것은 태풍과의 싸움과는 다른 종류의, 훨씬 더 굴욕적인 패배였다. 그는 머나먼 고향, 아일랜드의 농업 기술자 친구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존에게. 잘 지내고 있는가. 이곳 제주는 아일랜드와 마찬가지로 바람이 많은 섬이지만, 겨울은 비교할 수 없이 혹독하다네. 땅은 화산재로 뒤덮여 있고, 겨울이 되면 모든 것이 회색빛으로 변해버리지. 마치 신이 세상을 다 그린 후에, 마지막으로 회색 물감을 온통 부어버린 것 같아. (중략) 존, 혹시 이런 땅에서도 겨울을 날 수 있는 풀이 세상 어딘가에 있겠는가? 사람들은 불가능하다고 말하지만, 나는 가끔씩, 세상의 모든 불가능은 우리가 아직 던지지 않은 질문 속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네.’
실낱같은 희망을 담은 그의 질문은, 그렇게 바다를 건넜다. 그것은 단순히 씨앗을 구하는 편지가 아니었다. 고은영의 수첩에 적힌 냉혹한 숫자의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변수 ‘X’를 집어넣으려는, 하나의 지적인 반역 시도였다. 그는 기존의 시스템 안에서 최적의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 자체를 바꿀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고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그가 이해하는 ‘혁신’의 본질이었다.
몇 달 뒤, 그에게 작은 소포가 도착했다. 아일랜드와 뉴질랜드에서 온 것이었다. 그 안에는 여러 개의 작은 종이봉투가 들어 있었고, 그 위에는 ‘라이그라스’, ‘톨 페스큐’, ‘오처드그라스’ 같은 낯선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마을 아이들은 신기한 듯 몰려들어 그 이국적인 단어들을 구경했다. 임피제에게 그것은 단순한 씨앗이 아니었다. 그것은 머나먼 세상이 그의 질문에 보내온, 여러 가지 버전의 대답이었다.
그렇게 임피제의 길고 외로운 ‘보이지 않는 전쟁’이 시작되었다. 1961년 봄, 그는 이시돌 목장 가장 척박한 땅 한구석을 갈아엎고 수십 개의 작은 실험 구획을 만들었다. 마치 신과 체스를 두기 위해, 스스로 체스판을 만드는 사람처럼 보였다.
첫 번째 실패는 여름에 찾아왔다. 제주의 뜨거운 햇살은 온화한 유럽의 기후에 맞춰진 연약한 싹들을 사정없이 태워버렸다. 겨우 싹을 틔운 것들은 누렇게 변해 먼지처럼 바스러졌다. 그는 생각했다. ‘아, 이 땅의 태양은 아일랜드의 태양보다 훨씬 더 뜨겁구나. 그렇다면 다음에는 짚으로 그늘을 만들어 주어야겠다.’
두 번째 실패는 가을에 닥쳤다. 테쉬폰의 둥근 지붕이 막아낸 그 거센 태풍은, 아무런 보호막이 없는 평지의 흙과 씨앗을 함께 쓸어내렸다. 그의 실험장은 처참한 진흙탕으로 변했다. 그는 주저앉은 채 진흙탕이 된 밭을 보며 생각했다. ‘바람과 싸우려 해서는 안 돼. 바람을 흘려보내야 한다. 그렇다면 다음에는 밭 주위에 낮은 돌담을 쌓아 바람의 길을 바꾸어 주어야겠다.’
마을 사람들의 시선은 호기심에서 안타까움으로, 다시 동정으로 바뀌어갔다. 고은영은 보다 직접적으로 그를 압박했다. 어느 날 저녁, 그녀는 회계장부와 임피제의 텅 빈 씨앗 봉투를 나란히 그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신부님. 이 장부에는 우리 마을의 빚이 적혀 있습니다. 하지만 이 봉투는 비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보이지 않는 희망이 아니라, 당장 먹을 수 있는 고구마를 심어야 합니다.”
1962년, 임피제는 다시 땅을 갈았다. 그의 곁을 지키던 김만수와 영호의 얼굴에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의 아내들은 “언제까지 저 코쟁이 신부의 헛된 꿈에 장단 맞출 거냐”며 남편들을 닦달했다. 그 해, 임피제는 흙에 퇴비를 섞고, 돌담을 낮게 쌓아 바람을 막는 등 지난 실패에서 얻은 교훈을 적용했다. 몇몇 싹이 제법 자라나는 듯했지만, 겨울의 문턱에서 불어온 첫서리에 힘없이 고꾸라지고 말았다. 마치 희망이라는 이름의 연약한 촛불이, 현실이라는 차가운 입김 한 번에 꺼져버리는 것 같았다. 2년의 시간과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다시 겨울이 찾아왔다. 1962년의 겨울은 유난히 더 춥고 길었다. 소의 숫자는 우여곡절 끝에 여섯 마리가 되어 있었다. 한 마리를 팔았던 아픔을 딛고, 2년간 세 마리를 더 늘린 소중한 결과였다. 하지만 그 희망의 증거였던 여섯 마리라는 숫자는 이제 공포의 크기가 되어 돌아왔다. 비축된 건초는 또다시 바닥을 드러냈다.
테쉬폰 창고에서 다시 열린 마을 회의의 공기는 2년 전보다 훨씬 더 절망적이었다. 고은영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제 계산이 맞다면, 우리는 소 세 마리를 팔아야만 겨우 이 겨울을 날 수 있습니다. 가진 것의 절반을 버려야, 나머지 절반이라도 살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녀의 말은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그녀의 논리는 완벽한 소멸의 논리였다.
누군가 소리쳤다. “다 저 양반의 헛고집 때문이야! 저 밭 갈아엎을 시간에 건초나 더 모았어도 이 지경은 아니었을 거라고!”
모든 비난의 화살이 임피제에게로 향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오.” 그의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그 안에는 지난 2년간의 실패와 고독이 담겨 있었다. “우리는 소를 팔지 않을 거요.”
“그럼 굶어 죽으란 말씀입니까!”
“우리는 풀을 키울 거요.”
“신부님, 제발 꿈에서 깨어나십시오! 2년 내내 아무것도 안 나던 땅에서 뭐가 난단 말입니까!”
임피제는 비난을 뒤로하고 고은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은영 씨의 계산은 정확하오. 하지만 그 계산에는 한 가지가 빠져 있소. 바로,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가능성 말이오. 나는 2년을 실패했소. 하지만 그것은 완전한 실패가 아니오. 나는 ‘실패’라는 이름의 데이터를 수집한 것이오. 최소한 수십 가지의 씨앗이 이 땅의 여름과 가을과 겨울에 어떻게 죽어가는지를 배웠기 때문이오. 그것이 나의 자산이오.”
하지만 그의 말은 더 이상 사람들의 마음에 닿지 않았다. 그의 언어는 희망의 문법이었지만, 사람들은 이미 소멸의 논리에 지배당하고 있었다.
그날 밤, 굶주린 소들의 울음소리가 마을 전체를 뒤덮었다. 마침내, 고은영이 결심한 듯 마을 남자들을 이끌고 임피제를 찾아왔다. 그들의 손에는 소를 묶을 밧줄이 들려 있었다. 차가운 겨울바람 속, 그들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신부님, 이제 그만하십시오.” 그녀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내일 아침, 저희는 약속대로 소 세 마리를 읍내로 끌고 가겠습니다. 이것이 모두를 위한 최선의 선택입니다.”
임피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잿빛 하늘과, 2년의 실패가 켜켜이 쌓인 얼어붙은 땅을 번갈아 쳐다볼 뿐이었다. 그는 방으로 돌아와, 낡은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라디오에서는 폴 앵카(Paul Anka)의 <Lonely Boy>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혼자라고, 집에 갈 길도 없는 외로운 소년이라고 절규하는 노래. 그는 눈을 감았다. ‘제가 틀렸던 것입니까. 저의 오만이었습니까. 저들의 믿음을 담보로, 너무 위험한 도박을 벌인 것입니까.’ 그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바로 그날 밤이었다. 하늘에서 차가운 진눈깨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모두가 생각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먼동이 트기도 전에 영호가 거의 울부짖으며 임피제의 방문을 두드렸다. “신부님! 신부님! 나와 보십시오! 밭에! 밭에… 기적이…!”
임피제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 지난 2년간 꿈속에서 수없이 그렸던 광경이 펼쳐졌다. 밤새 내린 진눈깨비가 얇게 덮인 실험 구획. 그 수십 개의 실패한 죽음의 칸들 사이, 가장 구석지고 버려졌던 단 하나의 칸에서. 그 하얀 서리 위로, 아주 작고, 가냘프지만, 세상의 어떤 생명보다도 선명한 초록색의 싹 몇 개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온통 침묵으로 가득 찬 세상에, 누군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뱉어낸, ‘희망’이라는 이름의 첫 음절과도 같았다.
그 소식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소를 끌고 읍내로 가려던 사람들이, 그리고 고은영이, 이시돌의 실험 구획으로 달려왔다. 그들은 자신들의 눈앞에 펼쳐진, 그 작은 기적 앞에서 할 말을 잃었다. 고은영의 모든 합리적인 계산과, 냉철한 분석, 2년 전의 성공 경험마저도, 저 이름 모를 풀의 연약한 싹 하나 앞에서, 힘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홀린 듯 밭으로 걸어 들어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떨리는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그 싹을 만져보았다. 그녀의 손끝에, 차갑지만 끈질긴 생명의 감촉이 전해져 왔다. 그녀는 기적을 본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단지, 자신이 계산에 넣지 않았던, 혹은 계산할 수 없었던 ‘가능성’이라는 변수가, 2년이라는 절망적인 시간의 연단을 거쳐 마침내 현실이 된 것을 목격했을 뿐이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늘 손에 쥐고 있던 수첩을 눈밭 위에 떨어뜨렸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의 어떤 숫자도 저 작은 싹보다 중요하지 않았다.
그날 이후, 한림의 겨울은 더 이상 절망의 계절이 아니었다. 푸른 싹은 놀라운 속도로 번져, 불과 몇 주 만에 한겨울의 황무지 위에 비현실적인 초록의 양탄자를 깔아 놓았다. 굶주리던 소들은 그 위에서 생기를 되찾았다.
이 기이하고도 경이로운 광경은 곧 살아있는 전설이 되었다. 처음에는 한림 마을에서, 다음은 제주읍으로, 마침내 섬 전체로. 겨울에는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잿빛 화산섬 한가운데, 외국의 푸른 눈 신부가 만들어낸 한겨울의 푸른 초원. 누군가는 그 풀잎을 뜯어다 장에 가서 보여주었고, 그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나갔다. 그 소문은 마침내, 좁은 해협을 건넜다. 조국의 근대화와 식량 자급이라는 목표에 모든 것을 걸고 있던 서울의 한 남자, 짙은 선글라스 너머로 언제나 숫자를 쫓던 장군의 귀에까지 닿게 된 것이다. 그에게 이 소문은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방법론’에 대한, 반드시 확인해야 할 보고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