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장. 낯선 악수
1963년의 봄은, 그러나 이전의 봄과는 다른 방식으로 찾아왔다. 그것은 단지 얼었던 땅이 녹고, 앙상했던 나뭇가지에 새순이 돋아나는 계절의 순환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한림 마을의 공기 속에는, 이제껏 존재한 적 없던 새로운 종류의 긴장과 기대가 미세한 먼지처럼 떠다녔다. 모든 변화의 진원지는 ‘정물’이라 불리던 황무지, 그리고 그곳에 펼쳐진 비현실적인 초록의 바다와, 그 위에 솟아난 고래의 등뼈 같은 기이한 건축물들이었다.
테쉬폰은 더 이상 한 채가 아니었다. 임피제 신부와 마을 사람들은 지난 2년 동안 멈추지 않고 땅을 파고, 시멘트를 섞고, 포대 자루를 쌓아 올렸다. 이제 황무지 위에는 거대한 동물의 뼈대 같은 테쉬폰 세 채가 나란히 서 있었다. 그 안에는 태풍의 밤을 무사히 견뎌낸 젖소들과, 그 사이 태어난 송아지들이 유유히 풀을 뜯고 있었다. 그것은 이 섬의 어떤 건물과도 닮지 않은, 비현실적인 풍경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제 그 구조물을 비웃거나 저주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그것을 하나의 불가해한 자연 현상처럼 받아들였다. 마치 오름이나 주상절리처럼,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기묘한 바위처럼.
아이들은 이제 황무지 근처에서 숨바꼭질을 했다. 그들은 푸른 풀밭 위를 맨발로 뛰어다니며, 자신들의 발바닥에 와 닿는 부드럽고 차가운 감촉에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는, 태풍 ‘사라’ 이후 처음으로 이 섬에 울려 퍼지는, 어떤 그늘도 없는 순수한 기쁨의 소리였다.
임피제는 그 모습을 툇마루에 앉아 지켜보곤 했다. 그는 낡은 단파 라디오의 다이얼을 돌렸다. AFKN 채널에서, 퍼시 페이스(Percy Faith) 악단의 <피서지에서 생긴 일(A Summer Place)가 잡음과 함께 흘러나왔다. 꿈결처럼 아름답고 서정적인 오케스트라 선율이,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와, 그리고 푸른 풀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와 뒤섞여 하나의 완벽한 화음을 만들어냈다. 그는 생각했다. 이것이 내가 듣고 싶었던 음악이라고. 이 죽어 있던 섬이라는 악기에서, 마침내 흘러나오기 시작한 새로운 멜로디라고.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이 평화는 지극히 위태롭고 일시적인 것이라는 것을. 그의 시스템은 이제 겨우 첫 번째 단계를 통과했을 뿐이다. 소들은 건강했고, 우유는 매일 나왔다. 하지만 그 우유는 마을 아이들의 허기를 채우는 데 그치고 있었다. 더 많은 우유를 생산하고, 가공하고, 섬 밖으로 팔아 진정한 자립을 이루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너무나 많았다. 그의 꿈은, 엔진은 가동되었지만 얕은 항구에 갇혀 더 큰 바다로 나아가지 못하는 배와도 같았다.
소문은 바람보다 빨리 퍼져나갔다. 제주 섬의 척박한 땅에서, 그것도 겨울에 푸른 풀밭을 만들어낸 푸른 눈의 신부 이야기. 그리고 태풍에도 무너지지 않는, 무덤처럼 생긴 기이한 집을 짓는 사제 이야기. 그 소문은 물을 건너, 처음에는 믿을 수 없는 전설처럼 떠돌았다. 군청의 공무원들은 그 소문을 애써 무시했다. 그들은 임피제가 또 어떤 골치 아픈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인지, 그저 못마땅할 뿐이었다.
그러던 1963년 5월의 어느 날, 그 소문은 서울의 가장 높은 곳,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집무실까지 닿았다.
그 사내, 짙은 선글라스 너머로 언제나 먼 곳을 보는 듯한 눈을 가진 장군은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군인이었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조국 근대화’와 ‘수출 증대’, 그리고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라는 단어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숫자를 믿었고, 효율성을 숭배했으며, 불가능이라는 단어를 경멸했다. 그는 제주도에서 올라온 그 기이한 보고를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정보원들이 보내온 사진과 자료들은 그것이 사실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는 흥미를 느꼈다. 그것은 기적에 대한 흥미가 아니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방법론’에 대한, 한 인간의 집요한 ‘의지’에 대한 기술자로서의 흥미였다. 그는 직접 확인해봐야겠다고 결심했다.
장군의 방문 결정이 군청에 하달되자, 작은 관료 사회는 벌집을 쑤신 듯 소란스러워졌다. 그들은 허둥지둥 의전 계획을 세우고, 보고서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군청의 담당자는 이 모든 일의 중심에 있는 임피제 신부를 찾아왔다.
“신부님, 큰일 났습니다. 서울에서 가장 높은 분이 오십니다. 이시돌 목장에 대해 공식 보고서를 작성해야 합니다. 신부님의 업적을 잘 정리해서 제출해야 하니,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임피제는 난감했다. 그는 보고서 같은 것을 써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며칠 밤낮으로 끙끙대며 종이 위에 무언가를 적어 내려갔다. 그가 쓴 것은 보고서라기보다는, 한 편의 서정시에 가까웠다. 그 안에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공동체의 중요성과,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했다. 숫자는 단 하나도 없었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것은 고은영이었다. 그녀는 임피제가 쓴 글을 읽어볼 기회를 가졌다. 그녀는 그 글을 끝까지 읽고, 아무 말 없이 돌려주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어떤 표정도 없었지만,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고 차갑게 회전하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이래서는 아무것도 얻어낼 수 없다.’
그날 밤, 그녀는 임피제의 거처를 찾아갔다.
“신부님,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녀는 임피제가 쓴 글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이 글은 훌륭합니다. 신부님의 따뜻한 마음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서울의 그분들은 이런 언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분들이 이해하는 언어는 따로 있습니다.”
그녀는 품속에서, 자신이 밤을 새워 작성한 전혀 다른 종류의 보고서를 꺼내놓았다. 그 보고서의 첫 장에는 ‘이시돌 목장 개발 사업 타당성 분석 보고서’라는 건조한 제목이 붙어 있었다. 그 안에는 시(詩)가 아닌, 숫자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태풍 ‘사라’로 인한 마을의 총 피해액, 전통 가옥과 테쉬폰 건축의 비용-편익 분석, 목초지 조성에 투입된 노동 시간과 그 경제적 가치 환산, 그리고 앞으로 젖소를 들여왔을 경우 예상되는 우유 생산량과 순이익, 고용 창출 효과까지. 그녀는 임피제의 꿈을, 완벽하게 ‘사업’의 언어로 번역해낸 것이다.
임피제는 그 보고서를 한참 동안 말없이 들여다보았다. 그는 그 숫자들 속에서, 자신이 미처 보지 못했던, 혹은 애써 외면했던 또 다른 세계의 질서를 보고 있었다.
“이것을… 군청에 내라는 말이오?”
“아닙니다.” 고은영은 고개를 저었다. “신부님의 보고서를 공식적으로 제출하십시오. 이 보고서는, 제가 따로 비공식적인 경로를 통해 전달하겠습니다. 그분들은 두 개의 다른 지도를 가지고, 이곳을 방문하게 될 겁니다.”
그녀의 제안은 대담하고, 어딘지 모르게 위험했다. 하지만 임피제는 그녀의 눈 속에서, 자신과는 다른 종류의, 그러나 자신만큼이나 강렬한 확신을 읽었다.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후, 한림 마을은 유사 이래 가장 큰 소란에 휩싸였다. 굉음과 함께, 거대한 쇠 잠자리 한 마리가 마을 상공을 선회하더니, 이시돌의 너른 풀밭 한가운데에 내려앉았다. 헬리콥터. 마을 사람들은 난생 처음 보는 그 거대한 기계 앞에서 공포에 질려 집 안으로 숨었다. 4.3의 끔찍한 기억이 망령처럼 되살아났다.
헬리콥터에서 내린 것은 군복을 입은 남자들이었고, 그들의 허리에는 번쩍이는 권총이 채워져 있었다. 그 행렬의 가장 중심에, 짙은 선글라스 너머로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는 사내, 장군이 있었다.
그의 방문은 임피제에게도 예고 없이 찾아온 것이었다. 그는 평소처럼, 흙먼지가 묻은 작업복 차림으로 그들을 맞았다. 장군은 말이 없었다. 그는 군청 공무원의 요란한 보고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곧장 테쉬폰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비현실적인 풍경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사방이 온통 잿빛인 섬 한가운데, 오직 이곳만이 선명한 초록으로 빛나고 있었고, 그 위에 고대의 유적처럼, 혹은 미래의 건축물처럼 생긴 구조물들이 서 있었다. 그것은 너무나 강렬하고 압도적이어서, 오히려 인공적인 느낌마저 주었다.
그는 허리를 숙여 직접 풀을 한 움큼 뽑아 들었다. 그는 풀의 냄새를 맡고, 질겅질겅 씹어보기까지 했다. 선글라스 너머 그의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그의 턱 근육이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을 임피제는 놓치지 않았다. 그는 지금 이 풀의 성분을, 그 가능성을, 자신의 혀로 직접 분석하고 있었다. 그는 테쉬폰으로 다가가, 차가운 벽면을 장갑을 벗은 맨손으로 쓸어보았다. 그는 지금, 이 기적의 질감을, 그 단단함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확인하고 있었다.
“신부.”
장군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강철 같은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는 임피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게 정말 이 땅에서 자란 풀이오?”
“그렇습니다, 의장님.”
임피제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저 집은, 정말 바람에 무너지지 않는 거요?”
“그렇습니다. 바람과 싸우는 대신, 바람을 흘려보내기 때문입니다.”
장군은 잠시 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푸른 들판과 임피제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한 사내의 조용한 고집을, 그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러나 자신만큼이나 집요하게 세상을 바꾸려는 한 인간의 존재를.
“… 뭐가 필요하시오?”
그것은 군인 특유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이었다. 모두의 숨이 멎었다. 군청 공무원은 이때다 싶어 예산 지원 서류를 내밀려다 수행원에게 저지당했다. 김만수와 영호는 그저, 이 무서운 사내 앞에서 모든 것이 무사히 끝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임피제는 돈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젖소를 사달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그는 저 멀리, 목장으로 이어지는 비좁고 질척이는 흙길을 가리켰다.
“길이 필요합니다.”
“길?”
“젖소와 돼지를 위한 길이 아닙니다. 저 너머 마을의 아이들이 비를 맞지 않고 학교에 갈 수 있는 길이 필요합니다. 이곳에서 만든 치즈와 돼지고기가 썩지 않고, 저 아이들의 몸속으로 흘러 들어갈 수 있는, 그런 길이 필요합니다.”
그는 말을 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조용했지만, 그 안에는 흔들림 없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전기가 필요합니다. 밤에 아이들이 책을 읽을 수 있는 빛이 필요합니다. 이 테쉬폰 안에서, 겨울에도 얼어 죽지 않고 새끼를 낳을 수 있는 온기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요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비전이었다. 그는 자신의 목장을 위한 지원을 요청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 섬 전체를, 이 고립된 세계를, 바깥세상과 연결하고,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인프라’를 요구한 것이다. 그는 물고기를 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강물을 끌어와 달라고 말한 것이다.
장군은 아무 대답 없이 임피제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의 선글라스 너머 눈빛이 어떻게 움직였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는 임피제의 비전에 감명받았지만, 그 비전이 실현 가능하다는 확신은, 지난밤 그의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또 다른 보고서, 즉 고은영이 만든 그 차가운 숫자들에서 이미 얻은 뒤였다.
장군은 마침내 손을 내밀었다. 그것은 악수를 청하는 손이었다. 임피제는 잠시 망설이다, 흙먼지가 묻은 자신의 손을 그의 손에 포갰다. 장군의 손은 군인의 그것처럼 단단하고 차가웠고, 임피제의 손은 농부의 그것처럼 거칠고 따뜻했다. 그것은 단순한 악수가 아니었다. 그것은 두 개의 다른 세계, 두 개의 다른 방식이, ‘가난의 극복’이라는 단 하나의 목표를 위해 맺은, 기묘하고도 위태로운 계약이었다.
그날 이후, 거짓말처럼 중장비들이 들어와 길을 닦기 시작했다. 얼마 후에는 전봇대가 세워지고, 이시돌 목장의 작은 방에 처음으로 벌거벗은 전구의 노란 불빛이 환하게 켜졌다. 그 불빛은 단지 목장만을 밝힌 것이 아니었다. 가난과 체념이라는 어둠 속에 갇혀 있던 한림 전체를 밝히는 희망의 빛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임피제 신부를 살아있는 성인처럼 떠받들었다. 하지만 고은영과, 그녀의 방식을 이해하는 소수의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진짜 기적을 만든 것은 신부의 따뜻한 마음뿐만이 아니라, 자신들의 차가운 계산이었다는 것을. 마을에는 보이지 않는 두 개의 리더십이 공존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영적 리더’ 임피제와,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실무적 리더’ 고은영. 사람들은 점차, 어려운 문제가 생겼을 때 신부가 아닌 은영을 찾아가 상의하기 시작했다.
그날 밤, 임피제는 자신의 방에서 홀로 낡은 보리차를 마셨다. 낡은 단파 라디오에서는 영화 <영광의 탈출(Exodus)>의 장엄한 주제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장엄하고, 비장하며, 거대한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듯한 그 선율 속에서, 그는 생각했다. 이제 배는 항구를 떠났다고. 자신은 더 이상 이 배의 유일한 선장이 아니라고. 그의 작은 실험은, 이제 국가라는 거대한 시스템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그는 문을 열었다. 하지만 그 문으로 들어오는 것이 과연 무엇일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