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장. 소년들의 흙
장군이 남기고 간 약속은, 거짓말처럼 현실이 되었다. 어쩌면 거짓말이 아니었기에, 사람들은 그 현실이 더 비현실적이라고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가 헬리콥터를 타고 떠난 며칠 뒤부터, 한림 마을에는 난생 처음 보는 육중한 기계들이 굉음을 내며 들어왔다. 불도저는 수백 년 동안 사람과 소의 발자국, 그리고 바람의 기억만을 새겨왔던 잿빛 흙길을 아무런 망설임 없이 밀어버렸다. 그 위에는 역청의 생경한 냄새를 풍기는 검은 아스팔트가 카펫처럼 깔렸다. 아이들은 그 뜨겁고 끈적이는 액체가 식어 단단한 검은 강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마치 변태하는 거대한 곤충을 보듯 신기하게 지켜보았다.
일정한 간격으로 세워진 전봇대들은 하늘을 향해 솟아올랐다. 그것은 섬의 일부라기보다는, 섬이라는 지도 위에 박아 넣은 거대한 압정과도 같았다. 밤이 오면 이시돌의 작업장에는 벌거벗은 전구의 노란 불빛이 켜졌다. 그 빛은 달빛과는 비교할 수 없이 밝고 단호해서, 사람들은 오히려 그 빛 아래에서 자신의 그림자가 더 짙고 선명해지는 것을 느끼며 어색해했다. 마을의 시간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속도로 흐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오랫동안 손으로 돌리던 맷돌을 멈추고, 갑자기 전기로 돌아가는 거대한 분쇄기를 들여놓은 것과 같은, 그런 종류의 어색하고 폭력적인 가속이었다.
임피제는 툇마루에 앉아 그 모든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의 낡은 단파 라디오에서는 냇 킹 콜(Nat King Cole)의 <Quizás, Quizás, Quizás>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마도, 아마도, 아마도. 스페인어 가사의 뜻을 알 리 없었지만, 그는 그 나른하고 이국적인 선율이 지금의 상황과 기묘하게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좋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그런 것일까? 아마도.
세상은 그가 만들어낸 ‘결과물’에만 관심을 가졌다. 겨울에도 푸른 목초지, 태풍에도 무너지지 않는 테쉬폰. 정부는 그의 성공을 ‘조국 근대화’의 훌륭한 사례로 포장했고, 육지에서는 그의 업적을 취재하려는 기자들이 간헐적으로 찾아왔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종류의 유명인사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는 가끔씩, 자신이 자신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하나의 유령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그 모든 소란을 비껴가, 여전히 가장 낮고 조용한 곳을 향해 있었다. 그는 툇마루에 앉아 끓인 보리차를 마시며, 마을의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길은 닦였고 전기는 들어왔다. 훌륭한 무대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정작 그 무대 위에서 춤을 춰야 할 배우들, 즉 이 섬의 아이들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가.
아이들의 세상은 어른들의 그것과는 다른 시간의 흐름 속에 있었다. 그들의 세상에는 돼지은행도, 퇴비 공장도, 테쉬폰도, 심지어 겨울 목초지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의 세상에 있는 것은 오직,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와, 목적지를 알 수 없는 무료함뿐이었다. 어른들이 재건과 미래라는 무거운 단어들에 짓눌려 있는 동안, 아이들은 그 모든 것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었다.
아이들은 온종일 마을을 떼 지어 몰려다녔다. 그들은 개울에서 물고기를 잡는 대신, 서로에게 돌멩이를 던졌고, 들판에서 꽃을 꺾는 대신, 약한 아이의 고무신을 뺏어 지붕 위로 던져버렸다. 그들의 행동에는 명확한 악의가 없었다. 그것은 그저, 넘쳐나는 에너지를 어디에 어떻게 써야 할지 배우지 못한 존재들의, 서툴고 혼란스러운 몸짓일 뿐이었다. 그들은 마치, 연주자를 만나지 못해 아무렇게나 뒹굴며 서로 부딪혀 상처만 내는 훌륭한 악기들과도 같았다. 혹은 완벽하게 조율된 라디오가, 잡을 주파수가 없어 지지직거리는 소음만 뱉어내는 것과도 비슷했다.
임피제는 그 모습을 보며, 또다시 어떤 ‘시스템의 부재’를 느꼈다. 그는 생각했다. 저 아이들은 밭을 갈지 않은, 척박하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품은 땅과도 같다고. 저 땅을 어떻게 일구어야 하는가. 어떤 씨앗을 심어야 하는가. 집의 뼈대를 다시 세우는 것만큼, 이 섬의 미래를 살아갈 사람의 뼈대를 세우는 것이 중요했다. 이것은 시멘트와 삽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이것은 다른 종류의 공학, 즉 영혼의 공학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그는 성경이나 교육학 서적을 펼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자신의 기억 속 깊은 우물 안을 들여다보았다. 우물의 표면에는 아일랜드의 푸른 언덕이, 축축한 흙냄새가, 아버지의 거친 손마디가 어른거렸다. 그의 아버지는 말이 없는 농부였지만, 세상의 이치를 몸으로 가르쳐주는 사람이었다. 농사일이 끝나면, 동네 아이들을 모아놓고 감자 심는 법이나 울타리 고치는 법을 가르쳐주곤 했다. 그것은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놀이이자, 세상의 이치를 배우는 과정이었다. 아이들은 경쟁적으로 울타리를 고쳤고, 자신이 심은 감자 포대기에 몰래 이름표를 달아두기도 했다.
기억의 우물 속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가자, 희미한 문양 하나가 떠올랐다. 네 개의 H가 새겨진 클로버 문양. Head(머리), Heart(마음), Hands(손), Health(건강). 지혜로운 머리, 따뜻한 마음, 부지런한 손, 그리고 건강한 몸. 4-H 클럽. 그것은 소년을 남자로 만드는, 가장 단순하고도 완벽한 공식이었다. 그는 무릎을 쳤다. 그것은 마치 오랫동안 풀리지 않던 수학 문제의 해답을 찾아낸 것과 같은, 그런 종류의 명쾌한 기쁨이었다. 그는 돼지은행이나 테쉬폰처럼, 또 하나의 ‘시스템’을 발견한 것이다. 돼지를 위한 시스템, 소를 위한 시스템에 이어, 이번에는 아이들을 위한 시스템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혁신, 즉 보이지 않는 것을 설계하고 구축하는 일이었다.
그는 미군 부대의 앤더슨 대령에게 다시 연락했다. 이번에 그가 부탁한 것은 돼지나 시멘트가 아니었다. 그는 4-H 클럽의 운영 교본과, 몇 가지 종류의 씨앗, 그리고 아이들의 손에 맞을 만한 작은 농기구들을 구해달라고 했다. 전화기 너머의 앤더슨은 여전히 그를 이해할 수 없다는 투였지만, 이 푸른 눈의 신부가 벌이는 기이한 실험에 어느새 중독된 사람처럼, 그의 부탁을 군말 없이 들어주었다. 어쩌면 앤더슨 대령에게 임피제 신부는, 따분한 군 생활 중에 우연히 발견한, 결말을 알 수 없는 흥미진진한 소설책 같은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어느 날 오후, 임피제는 마을 회관 앞에 또 하나의 팻말을 세웠다. 이전의 팻말들보다 훨씬 더 작고, 소박한 것이었다.
<흙을 만지고 싶은 소년들은, 해 질 무렵 정물로 오시오.>
그의 부름에 가장 먼저 응답한 것은, 역시 강매실의 아들 영호였다. 영호는 이제 더 이상 말을 잃은 소년이 아니었다. 그는 신부의 곁에서 어깨너머로 배운 것들로, 어머니를 돕고 동생들을 돌보는 작은 가장이 되어 있었다. 그는 신부의 언어를 이해하는 유일한 소년이었고, 신부의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줄 알았다.
영호를 따라, 대여섯 명의 아이들이 호기심 반, 의심 반의 표정으로 정물의 황무지에 모여들었다. 아이들의 눈에 비친 임피제는 여전히 낯선 이방인이었다. 아이들은 그가 또 어떤 이상한 일을 벌일 것인지,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라디오에서는 코니 프랜시스(Connie Francis)의 <Stupid Cupid>가 경쾌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랑의 화살을 엉뚱한 곳에 쏘아대는 바보 큐피드에 대한 노래. 어쩌면 지금 이 풍경과 가장 잘 어울리는 음악일지도 몰랐다.
임피제는 아이들에게 긴 연설을 하지 않았다. 그는 아이들을 테쉬폰 옆, 그가 미리 갈아놓은 작은 밭으로 데려갔다. 그리고는 아이들에게 감자 씨앗과 작은 호미를 하나씩 나누어주었다.
“이것을 심어보자꾸나.”
그것이 그가 한 말의 전부였다.
아이들은 어리둥절했다. 그들은 밭일이라면 지긋지긋했다. 그것은 늘 부모님에게 등 떠밀려 억지로 하던, 지루하고 힘든 노동일 뿐이었다.
“이걸 왜 우리가 해요?” 한 아이가 불만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이건 일이 아니란다.” 임피제가 말했다. “이건 하나의 게임이야. 이 감자를 심고,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게 하는 게임. 그리고 그 열매는 모두 너희들의 것이 될 거란다.”
‘게임’이라는 말과, ‘너희들의 것’이라는 말에 아이들의 눈이 조금 달라졌다. 그들은 마지못해 호미를 들고 땅을 파기 시작했다.
그들의 첫 번째 시도는 완전한 혼돈 그 자체였다. 아이들은 서로에게 흙을 던지며 장난을 쳤고, 감자를 너무 깊이 심거나 혹은 거의 땅 위에 올려놓다시피 했다. 물을 주라고 했더니, 밭을 진흙탕으로 만들어버렸다. 그것은 농사가 아니라, 체계적인 파괴 행위에 가까웠다. 하나의 완벽한 실패를 향한 합주였다.
김만수는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신부님, 저래서는 아무것도 안 됩니다. 제가 나서서 아이들을 가르치겠습니다.”
하지만 임피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내버려 두게. 저 아이들은 지금, 실패하는 법을 배우고 있는 걸세. 실패는 성공의 반대말이 아닐세. 성공으로 가는 길 위에 놓인, 수많은 돌멩이 중 하나일 뿐이지. 저 아이들은 지금 그 돌멩이에 걸려 넘어지는 법을 배우고 있는 거야. 모든 위대한 발명은 수많은 실패 위에서 이루어지는 법이지.”
그의 방식은 일종의 ‘린 스타트업’과도 같았다. 최소 기능 제품(Minimum Viable Product)으로 감자 씨앗을 던져주고, 시장(아이들)의 반응을 살핀다. 그리고 그들의 실패라는 데이터를 통해, 다음 단계로 나아갈 방향(Pivot)을 모색한다. 그는 아이들을 꾸짖거나, 올바른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는 밭을 갈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아이들의 마음을 갈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아이들의 작은 밭에서는 아무런 싹도 돋아나지 않았다. 아이들은 금세 흥미를 잃고, 하나둘씩 밭을 떠나기 시작했다. 마침내 밭에는 영호와, 가장 덩치가 작고 말이 없던 아이, 동주만이 남았다.
“신부님, 우린 실패했어요.”
어느 날 저녁, 영호가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실패라는 단어를 그의 입으로 직접 말하게 된 것은, 어쩌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임피제는 두 아이를 데리고, 그들이 망쳐놓은 밭으로 갔다. 그는 땅을 파헤쳐, 썩어버린 감자 씨앗을 꺼내 보여주었다.
“왜 실패했을까?” 그가 물었다.
영호와 동주는 대답하지 못했다.
“너무 깊이 심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물을 너무 많이 주었기 때문일까? 혹은, 우리가 충분한 정성을 쏟지 않았기 때문일까?”
그는 답을 주지 않았다. 그는 질문을 던질 뿐이었다. 그는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원인을 분석하고, 다음의 해결책을 찾기를 바랐다. 그것이 그가 생각하는 진짜 교육, 즉 문제를 정의하고 가설을 세우고 검증하는 혁신의 프로세스였다.
두 소년은 그날 이후, 다시 밭을 갈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장난을 치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에게 묻고, 의논하며, 가장 적당한 깊이와 간격을 찾아 씨앗을 심었다. 그들은 매일 밭에 나와, 흙의 마른 정도를 살피고, 잡초를 뽑아주었다.
그리고 며칠 후, 기적처럼, 그들의 밭에서 작은 초록색 싹이 돋아났다.
그것은 겨울 목초지가 주었던 거대한 감동과는 다른, 아주 작고 소박한 기쁨이었다. 하지만 영호와 동주에게는, 그것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더 큰 기적이었다. 그것은 자신들의 손으로, 자신들의 생각으로, 실패를 딛고 피워낸 첫 번째 생명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한 싹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가능성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을, 그림자 속에서 지켜보는 또 다른 눈이 있었다. 고은영이었다. 그녀는 임피제의 방식이 비효율적이고 감상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녀 역시 아이들의 미래를 걱정했지만, 그녀가 생각하는 미래는 임피제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그림이었다.
어느 날 밤, 그녀는 자신의 작은 방에서 불을 밝히고 앉아 있었다. 한쪽에는 마을의 수입과 지출이 빽빽하게 적힌 회계장부가, 다른 한쪽에는 육지에서 구해온 낡은 농업 기술 서적이 놓여 있었다. 그녀는 장군의 방문 이후 급변하는 세상의 속도를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길과 전기는 단지 편의시설이 아니었다. 그것은 외부 세계의 논리, 즉 효율과 경쟁의 논리가 섬 안으로 들어오는 통로였다. ‘낭만’이나 ‘과정의 즐거움’ 같은 것들은, 저 아스팔트 위를 달리는 트럭의 바퀴에 가장 먼저 짓밟힐 가치들이었다.
그녀는 임피제의 4-H 클럽을 떠올렸다. 아이들이 흙장난을 치며 웃고 떠드는 모습. 실패를 통해 배운다는 낭만적인 말. 그녀는 조소했다. ‘실패가 스승’이라는 말은, 실패해도 먹고 살 걱정이 없는 사람들의 사치일 뿐이다. 이 척박한 섬에서 실패는 곧 굶주림을 의미했다. 신부님은 아이들에게 시를 가르치고 있지만, 세상은 아이들에게 설명서를 요구하고 있었다.
그녀는 결심했다. 신부님이 아이들의 ‘마음’을 위한 씨앗을 심고 있다면, 자신은 아이들의 ‘생존’을 위한 씨앗을 심어야겠다고. 그녀는 마을 어른들을, 특히 아이를 둔 어머니들을 찾아가 조용히 설득하기 시작했다.
“신부님의 방식은 훌륭합니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이 언제까지 흙장난만 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세상은 변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주먹구구식으로 농사를 짓던 시대가 아닙니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더 과학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것이 아이들의 진짜 미래를 위한 길입니다.”
그녀의 말은 너무나 합리적이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고은영은 주말마다 아이들을 모아 ‘주말 영농 교실’을 열었다. 그녀의 교실에는 규칙이 있었다. 장난은 금지되었고, 모든 것은 그녀가 만든 계획표에 따라 정확하게 이루어졌다. 아이들은 흙을 만지기 전에, 먼저 공책에 자를 대고 파종 간격을 그리고, 비료의 양을 계산하는 법부터 배워야 했다. 그것은 놀이가 아닌, 일종의 훈련이었다. 그녀의 밭에서는 모든 것이 직선과 직각으로 이루어졌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실패하지 않는 법을 가르쳤다. 그것은 곧, 정해진 매뉴얼을 정확히 따르는 법을 의미했다. 그녀의 혁신은 프로세스 최적화(Process Optimization)에 있었다.
마을에는 두 개의 다른 밭이 생겨났다. 테쉬폰의 왼쪽에는 임피제의 아이들이 웃고 떠들며 제멋대로 가꾸는 4-H 클럽의 밭이 있었고, 오른쪽에는 고은영의 아이들이 침묵 속에서 줄을 맞춰 정밀하게 씨앗을 심는 영농 교실의 밭이 있었다. 두 개의 밭은, 두 리더가 마을의 다음 세대라는 토양 위에 심고 있는, 전혀 다른 두 종류의 씨앗과도 같았다.
가을이 깊어갈 무렵, 라디오에서 더 플래터스(The Platters)의 <The Great Pretender>가 흘러나오는 어느 날 오후, 마침내 수확의 날이 왔다. 사람들은 마치 구경거리라도 난 듯 두 밭 주위로 모여들었다.
먼저 수확을 시작한 것은 임피제의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땅을 팠다. 흙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감자들은, 제각기 다른 모양을 하고 있었다. 어떤 것은 아이 주먹만 했고, 어떤 것은 조약돌처럼 작았다. 모양도 울퉁불퉁하고 볼품없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자신들이 직접 키워낸 첫 수확물을 손에 들고,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뻐했다. 서로의 감자를 비교하며 놀렸고, 가장 이상하게 생긴 감자를 뽑은 아이에게 ‘올해의 못난이 상’을 주겠다며 깔깔거렸다. 그들의 기쁨은 감자의 크기나 양에 있지 않았다. 그것은 실패를 딛고, 마침내 무언가를 ‘해냈다’는 과정 자체에 있었다. 그 감자 하나하나에는, 그들만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다음 날, 고은영의 아이들이 수확을 시작했다. 분위기는 완전히 달랐다. 아이들은 정해진 구역에서, 정해진 순서에 따라, 말없이 땅을 팠다. 그리고 그들의 밭에서는, 거의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땅을 파는 곳마다, 마치 공장에서 찍어낸 것처럼 크고 균일한 감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수확량은 임피제 아이들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고은영의 아이들은 환호성을 지르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자신들의 압도적인 결과물 앞에서, 조용하고 서늘한 만족감에 휩싸여 있었다. 그들의 성취감은, 정확한 투입이 정확한 산출로 이어진다는, 차가운 공식이 증명되는 순간에 있었다.
그날 저녁, 마을 회관 앞마당에는 두 무더기의 감자가 나란히 놓였다. 왼쪽에는 작고 볼품없지만 이야기와 웃음이 담긴 감자들이, 오른쪽에는 크고 탐스럽지만 침묵 속에서 태어난 감자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감자 더미가 아니었다. 그것은 두 개의 다른 철학이 낳은, 명백한 결과물이었다.
마을 어른들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보시오! 고은영의 방식이 옳았소! 저 감자라야 우리 아이들이 겨울을 배불리 날 수 있지 않겠소?”
“아니오. 신부님 아이들의 얼굴을 보시오. 저 아이들은 감자를 캔 것이 아니라, 기쁨을 캔 것이오.”
“기쁨이 밥을 먹여줍니까? 당장 저 감자들을 팔면, 아이들 공책이라도 한 권 더 사줄 수 있소!”
논쟁은 끝이 없었다. 아이들 사이에서도 보이지 않는 벽이 생겨났다. ‘재미있게 노는 것’을 중시하는 아이들과, ‘더 많은 감자를 수확하는 것’에서 성취감을 느끼는 아이들.
임피제는 그 모든 풍경을, 툇마루에 앉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만족감과 함께, 깊은 시름이 어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아이들의 마음속에 심은 씨앗이, 전혀 다른 종류의 씨앗과 마주하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자율과 과정’이라는 씨앗과, ‘효율과 결과’라는 씨앗. 이 두 개의 씨앗이 앞으로 이 섬에서 어떻게 자라나게 될지, 그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씨앗이 모두 필요한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마을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그의 시선이 한곳에 머물렀다. 그의 귀에서 마을의 소란과 라디오의 음악 소리가 순간 멀어졌다. 세상이 잠시 무음 상태가 된 것 같았다.
마을의 여자아이들이,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마당의 가장자리에서, 부러움과 소외감이 뒤섞인 눈으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게임’은 철저히 소년들을 위한 것이었다. 소녀들은 처음부터 초대받지 못한 구경꾼일 뿐이었다.
그의 눈에, 양순덕의 얼굴이 들어왔다. 몇 년 전, 부산의 공장에서 도망치듯 돌아온 소녀. 그녀는 이제 어엿한 처녀가 되어 있었지만, 그녀의 눈에는 여전히 도시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녀는 소년들의 서툰 감자나 완벽한 감자를 보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들의 ‘기회’를 보고 있었다. 자신에게는 결코 주어지지 않았던 기회. 소년들이 ‘과정’이든 ‘결과’든, 섬의 새로운 미래에 어떤 식으로든 편입되는 동안, 소녀들은 여전히 낡은 과거의 역할 안에 머물러 있었다. 그녀의 손은 뜨개질이나 바느질이 아니라면, 늘 비어 있었다.
임피제의 마음속에서, 평화로운 음악이 순간 멈추었다. 그리고 그 자리를, 또 다른, 훨씬 더 복잡하고 해결하기 어려운 불협화음이 채우기 시작했다.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또 하나의 중요한 퍼즐 조각을, 세상의 절반을 놓치고 있었다는 것을. 이 섬의 절반, 즉 여자들의 문제.
그의 시선이 소란스러운 마당을 지나, 양순덕의 조용한 손끝에 멎었다. 해진 옷의 실밥 하나를 기워내는 그 작은 몸짓 속에서, 그는 자신이 이제껏 땅만 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년들의 손에 쥐여준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세상의 절반을 위한 설계도는 아직 백지였다. 그의 머릿속에서, 또 다른 바다가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마도, 아마도,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