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겨울은, 마치 오랫동안 멈춰 있던 낡은 레코드판이 마침내 돌기 시작했지만, 바늘이 어딘가 마모되어 있어 가끔씩 불규칙하게 튀는 소리를 내는 것과 같은, 기묘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곗돈이 사라진 이후, 한림수직 협동조합의 베틀 소리는 완전히 멎었다. ‘덜컹, 쿵’ 하는 규칙적인 소리가 사라진 테쉬폰은, 이제 거대한 동물의 텅 빈 늑골처럼, 바람 소리만이 스산하게 드나드는 침묵의 공간이 되어버렸다.
여자들은 더 이상 그곳에 모이지 않았다. 그들은 각자의 집, 혹은 폐허가 되어버린 그 집의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 배신은 공기 중에 떠다니는 바이러스와도 같아서, 이제 모든 사람의 눈빛 속에서 의심과 경계의 그림자를 보게 만들었다. 지난 몇 년간 애써 쌓아 올렸던 희미한 신뢰는, 단 한 사람의 탐욕으로 인해, 하룻밤 사이에 먼지처럼 흩어져 버렸다.
가장 깊은 절망에 빠진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조합의 대표였던 양순임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돈을 거의 잃지 않았지만, 다른 모든 것을 잃었다. 그녀가 잃어버린 것은, 자신이 이끌던 사람들과, 그들이 함께 만들어가던 미래에 대한 희미한 믿음이었다. 그녀는 매일 밤, 부산 공장의 소음과, 한림수직의 침묵이 뒤섞인 악몽을 꾸었다.
임피제 신부는 그 모든 풍경을, 자신의 작은 사무실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축음기에 아무 음반도 올리지 않았다. 그는 그저, 테쉬폰의 멈춰버린 침묵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는 기다렸다. 이 깊고 차가운 침묵의 강을, 사람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건너오기를.
어느 날 저녁,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양순임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그늘져 있었고, 눈은 퀭했다.
“신부님.” 그녀가 말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습니다. 여자들은 다시 밭으로 돌아가거나, 육지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이제 제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임피제는 그녀를 안으로 들였다. 그는 커피 대신, 뜨거운 물에 꿀을 탄 차를 내왔다. “순임 씨.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돈이죠.” 양순임은 즉시 대답했다. “우리가 피땀 흘려 번 돈, 전부를요.”
“그렇소. 돈을 잃었지.” 임피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것 같지는 않소?”
임피제는 책장 구석에서 낡은 저울 하나를 꺼내왔다. 그는 자신의 주머니에서 낡은 동전 몇 개를 꺼내, 저울의 한쪽 접시 위에 올려놓았다. 저울은 동전의 무게만큼 기울었다.
“이것이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오. 눈에 보이고, 셀 수 있는 것. 사람들은 이것을 돈이라고 부르지.” 그리고 그는, 저울의 반대편, 텅 비어 있는 접시를 가리켰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일까? 우리가 지난 몇 년간 함께 쌓아 올린 것. 실패를 견뎌내고, 서로를 믿고, 약속을 지켜왔던 그 모든 시간들. 그것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옥자네 남편이 훔쳐 간 돈 가방 안에, 그것들도 함께 들어있었을까?”
양순임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오. 우리가 진짜 가진 것은, 동전 몇 닢이 아니라, 바로 저 텅 빈 접시 위에 올려놓아야 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라고. 나는 그것을 ‘신용(信用)’이라고 부르고 싶소.”
그는 책상 서랍에서, ‘信用’이라는 두 글자가 적힌 종이를 꺼내, 텅 빈 저울 접시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종이는 너무나 가벼워서, 저울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보시오. 아직은 이렇게 가볍지. 하지만 우리가 여기에, 우리의 시간과, 땀과, 그리고 약속들을 하나씩 쌓아 올린다면, 언젠가는 저 반대편의 동전보다도 더 무거워지는 날이 오지 않겠소?”
그날 밤, 양순임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신부의 말은 그녀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믿음을 사용한다. 그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며칠 뒤, 임피제는 ‘신용협동조합’이라는 이름의, 세상에 없던 배를 띄우려 했지만, 마을 회관에 모인 여자들의 냉담한 반응 속에 그의 시도는 좌초된 채 갯벌 위에 덩그러니 놓였다. 그는 더 이상 사람들을 설득하려 들지 않았다. 그의 책상 위에는, 그가 직접 만든 <한림신용협동조합>이라는 이름의 두꺼운 가죽 장정이, 단 한 글자도 쓰이지 않은 채 놓여 있었다. 그것은 그의 실패를 증명하는 기념비와도 같았다.
변화는, 그러나 가장 예상치 못한 곳에서, 가장 조용한 방식으로 찾아왔다.
그것은 강매실이었다.
어느 날 오후, 그녀는 자신의 집 장롱 가장 깊숙한 곳에서, 작은 비단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그 안에는 그녀가 지난 십수 년간, 아무도 모르게 모아온 동전 몇 닢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시간과, 땀과, 그리고 상처와 치유의 기록이었다.
그녀는 그 비단 주머니를 품에 안고, 임피제 신부의 거처로 향했다. 임피제가 문을 열자,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책상 위에 놓인, 텅 비어 있는 가죽 장정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품속의 비단 주머니를 꺼내, 그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신부님.” 그녀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조금 쉬어 있었다. “저는… 글을 모릅니다. 셈도 잘 할 줄 모릅니다. 신부님이 말씀하시는 그 ‘신용’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저는 잘 모릅니다.”
그녀는 잠시 숨을 골랐다.
“하지만, 저는 이것 하나는 압니다.” 그녀는 낡은 장부와 비단 주머니를 손으로 가리켰다. “제가 처음 돼지를 받았을 때, 저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신부님은 저를 믿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믿음에, 새끼 돼지로 답했습니다. 저는… 그 약속의 무게를 압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임피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것이 제가 가진 전부입니다. 이것으로, 그 약속을 다시 한번 시작할 수는 없겠습니까?”
그녀의 행동은 단순한 기부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 새로운 시스템에 대한 최초의 ‘시드 투자(Seed Funding)’였다. 그녀는 돈이 아닌, 자신의 삶을 통해 검증된 ‘신뢰’를 투자한 것이다.
임피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아주 오랜만에, 깊고 희미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텅 비어 있던 장부를 펼쳤다. 그리고는 만년필에 잉크를 채워, 그 첫 페이지에, 서툴지만 정성스러운 글씨로 이렇게 썼다.
<조합원 번호 1번: 강매실>
그리고 그는, 그녀가 가져온 비단 주머니를 열어, 그 안의 동전들을 세기 시작했다. 그는 동전의 액수를 적지 않았다. 대신 그는, 그 동전 하나하나에 담긴 이야기의 무게를, 마치 오랜 친구의 이름을 적듯, 장부의 첫 줄에 조심스럽게 기록해 나갔다.
그가 마지막 동전의 기록을 마쳤을 때였다. 사무실의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고, 양순임이 서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한림수직의 여자들이 지난 한 달간 일해서 번, 얼마 되지 않는 돈이 담긴 봉투가 들려 있었다. 그녀는 그 모든 것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양순임은 강매실의 옆에 서서, 자신이 가져온 돈 봉투를 장부 위에 올려놓았다.
“조합원 번호 2번.” 그녀가 나지막이 말했다. “받아주시겠습니까?”
그녀의 뒤를 이어, 김만수가 들어왔다. 그리고 4-H 클럽의 청년이 된 영호가 들어왔다. 그들은 돈을 가져오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자신들의 노동과, 기술과, 그리고 미래의 시간을 약속의 증표로 가져왔다.
임피제는 그들의 이름을, 차례차례 장부에 기록해 나갔다. 텅 비어 있던 장부의 첫 페이지가, 돈의 액수가 아닌, 사람들의 이름과 그들의 보이지 않는 약속들로, 서서히 채워져 가고 있었다.
그것은 은행의 창립 총회가 아니었다. 그것은 차라리, 난파선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사람들이, 새로운 섬에서 그들만의 국가를 세우기로 맹세하는, 조용하고 경건한 의식과도 같았다.
하지만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 작은 섬이, 이제 곧 불신의 폭풍우가 몰아치는 거대한 바다와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는 것을. 그들의 낡은 장부와, 몇 닢의 동전과, 그리고 보이지 않는 약속만으로, 과연 그 폭풍우를 견뎌낼 수 있을까.
임피제는 장부의 마지막 줄을 기록하고, 만년필의 뚜껑을 닫았다. 그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마을의 집들이 하나둘씩 불을 끄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그 어둠 너머, 아직 꺼지지 않은 몇 개의 불빛들이 보였다. 그것은 의심과 냉소, 그리고 이 새로운 흐름을 파괴하려는 낡은 세력들의 눈빛이었다. 그는 생각했다.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