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장: 흐르는 강물처럼

by 고강아놀자

제32장: 흐르는 강물처럼

마치 오랫동안 각기 다른 선율을 연주하던 외로운 악기들이, 마침내 서로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하나의 거대한 교향곡을 만들어내기 시작한 것과 같았다. 그 음악은 아직 서툴고, 때로는 불협화음을 냈지만, 분명히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살아있는 생명력을 품고 있었다.

한림신용협동조합은 더 이상 텅 빈 가죽 장부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을의 새로운 심장이 되어, 보이지 않는 혈액을 섬의 구석구석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그 혈액은 돈이 아니었다. 그것은 ‘신용’이라는 이름의, 따뜻하고 끈끈한 무언가였다.

테쉬폰 한구석에 마련된 작은 사무실은, 더 이상 임피제 신부의 독단적인 지휘소가 아니었다. 그곳에는 조합의 대표가 된 양순임과, 이사가 된 강매실과 김만수가 앉아 있었다. 그들은 더 이상 신부의 지시를 기다리지 않았다. 그들은 이제, 이 작은 은행의 문지기이자 주인이었다. 그들의 회의는 서툴고 더뎠지만, 그 안에는 서울의 그 어떤 은행 창구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진지함과 책임감이 담겨 있었다. 그들은 돈의 액수를 보기 전에, 돈을 빌리러 온 사람의 눈빛과, 그의 살아온 시간의 무게를 먼저 보았다.

새로운 심장에서 흘러나온 첫 번째 맥박은, 4-H 클럽의 청년이 된 동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감자를 키우는 데 만족하지 않고, 육지에서 새로운 품종의 고구마 씨앗을 들여와, 이 척박한 땅에서도 단맛이 나는 작물을 키워보고 싶다는, 당시로서는 엉뚱한 꿈을 꾸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씨앗을 살 돈이 없었다. 이전 같았으면 거기서 끝이었을 이야기. 하지만 이제 그에게는 새로운 선택지가 있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신협의 작은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그는 담보로 내세울 땅도, 집도 없었다. 대신, 그는 자신이 지난 몇 년간 기록해 온 낡은 농사일지를 증거로 내밀었다. 그 안에는 날씨와 토질의 변화, 성공과 실패의 기록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그것은 그의 성실함을 증명하는, 그 어떤 부동산 등기부등본보다도 확실한 ‘신용’이었다.

양순임과 강매실, 김만수는 그의 계획서를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그들은 서로에게 묻고, 의논했다. 마침내, 그들은 대출을 승인했다. 그것은 신협의 첫 번째 공식적인 업무였다.

며칠 후, 동주는 읍내에서 돌아오는 버스에서, 품에 안은 씨앗 봉투를 보물처럼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는 단순히 씨앗을 산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미래를, 그리고 자신을 믿어준 사람들의 신뢰를 함께 사 온 것이다. 그의 작은 밭에 심어진 그 씨앗은, 신협이라는 심장이 내보낸 첫 번째 피톨이었다.

두 번째 맥박은, 한림수직에서 울려 퍼졌다. 서울 조선호텔의 윤 마담으로부터,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규모의 큰 주문이 들어온 것이다. 그것은 기회였지만, 동시에 위기였다. 현재의 베틀 수와 인원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양이었다.

양순임은 조합원들을 모아 회의를 열었다. 몇몇은 무리라며 반대했지만, 대부분은 해보자고 했다. 그들은 신협에 새로운 베틀을 구입하고, 양모를 추가로 수입할 자금을 대출해달라고 정식으로 요청했다.

신협은 그들의 요청을 심사했다. 이번 담보는, 그들이 지난 몇 년간 서울로 보낸 스웨터의 품질과, 단 한 번도 약속을 어기지 않았던 그들의 ‘거래 기록’이었다. 대출은 다시 승인되었다.

그렇게, 강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신협에서 나온 돈은 한림수직으로 흘러 들어가, 새로운 베틀과 양모가 되었다. 한림수직은 그 돈으로 이시돌 목장에서 생산된 양모를 이전보다 더 많이 사들였다. 목장은 그 돈으로 더 좋은 사료를 사고, 4-H 클럽 출신의 청년들을 새로운 일꾼으로 고용했다. 청년들은 신협에서 빌린 돈으로 자신의 농기구를 사고, 그들의 밭에서 나온 수확물은 다시 마을 사람들의 식탁으로 돌아갔다.

돼지가 풀을 낳고, 풀이 양을 키우고, 양이 사람을 먹여 살리고, 그 모든 것을 보이지 않는 믿음이 지키고 있었다. 돈은 더 이상 개인의 장롱 속에 갇혀 있지 않았다. 그것은 마을이라는 거대한 몸속을 흐르는 혈액이 되어, 막혀 있던 곳을 뚫고, 약한 곳에 영양을 공급하며, 생명을 순환시키고 있었다.

임피제는 그 모든 흐름을, 자신의 작은 사무실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고, 어떤 의사 결정에도 관여하지 않았다. 그는 창업가에서, ‘이사회 의장’ 혹은 ‘관찰자’의 역할로 물러나고 있었다. 그가 설계한 시스템은, 이제 그의 손을 떠나, 스스로의 의지와 생명력을 가지고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축음기에 바흐의 푸가를 올렸다. 여러 개의 독립적인 성부(聲部)가 각자의 선율을 연주하면서도, 서로를 쫓고, 모방하고, 얽히며 하나의 거대한 건축물처럼 장엄한 조화를 이루어내는 음악. 그는 생각했다. 지금 이 섬이, 저 푸가의 구조를 닮아가고 있다고. 한림수직과, 이시돌 목장과, 4-H 클럽과, 신용협동조합. 각기 다른 선율을 가진 이 네 개의 시스템이, 이제 서로의 존재를 전제로, 서로를 맴돌며 하나의 거대한 하모니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어느 날 오후, 유학파 지식인 문경노가 다시 그를 찾아왔다. 그의 얼굴에는 이전의 냉소적인 기운 대신, 깊은 호기심과 혼란이 뒤섞여 있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군요.” 문경노는 위스키 잔을 들고 말했다. “제가 배운 어떤 경제 이론으로도, 지금 이 마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자본도, 시장도, 합리적인 이윤 추구도 없이, 어떻게 이런 성장이 가능한 겁니까?”

임피제는 미소를 지었다. “나는 경제학은 잘 모르오. 나는 그저, 강물이 흐르는 것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오. 강물은 어디로 가야 할지 스스로 알고 있지. 억지로 물길을 막거나, 다른 방향으로 돌리려고만 하지 않는다면 말이오.”

문경노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더 이상 반박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자신의 논리로는 설명되지 않는, 거대한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임피제의 시스템은 완벽해 보였다. 그것은 외부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성장하고, 위기를 관리하며,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내는, 살아있는 생태계였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모든 생태계는, 그 안에서 가장 강력한 포식자의 등장으로 인해 한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것을.

그해 가을, 한림신협은 첫 번째 결산을 했다. 낡은 가죽 장부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는, 상당한 액수의 ‘이익잉여금’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것은 그들의 성공을 증명하는 달콤한 숫자였지만, 동시에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새로운 종류의 갈등을 예고하는 위험한 숫자이기도 했다.

양순임은 그 숫자를 보며, 기쁨보다 두려움을 먼저 느꼈다. 그녀는 조합원들의 눈빛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우리’의 성공을 이야기하던 그들의 입에서, 어느새 ‘나의 몫’이라는 단어가 조금씩 새어 나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녀는 임피제를 찾아가, 이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지 물었다.

임피제는 아무런 답도 주지 않았다. 그는 그저, 창밖의, 이제는 제법 울창해진 숲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강물이 바다에 이르렀을 때, 그 강물은 누구의 것이 되겠소, 순임 씨?”

그의 질문은, 또 다른, 훨씬 더 어려운 질문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이 성공의 열매는, 과연 누구의 것이 되어야 하는가.

작가의 이전글제31장: 과부의 동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