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장: 신용(信用)이라는 이름

by 고강아놀자

테쉬폰의 둥근 지붕 아래, 침묵은 물리적인 실체처럼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창조의 음악을 연주하던 스무 개의 베틀은, 이제 거대한 짐승의 뼈처럼, 먼지를 뒤집어쓴 채 움직이지 않았다. 공기 중에는 희망 대신, 마른 흙먼지 냄새와, 차갑게 식어버린 기름 냄새와, 여자들의 깊은 한숨이 뒤섞여 떠다녔다.

마을은 거대한 무덤과도 같았다. 여자들은 더 이상 테쉬폰에 나오지 않았다. 그녀들은 각자의 집, 어두운 방구석에 틀어박혀, 텅 빈 눈으로 벽의 얼룩을 세거나,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땀 흘려 일하면 언젠가는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 서로의 등을 기댈 수 있다는 신뢰. 그 모든 것이 하룻밤 사이에 깨어진 항아리의 사금파리 조각처럼, 날카롭게 흩어져 버렸다.

고은영의 잔인한 선언은, 예언처럼 그녀들의 귓가에 맴돌았다. ‘이것은 우리의 낡은 시스템이 맞이한, 당연한 실패야.’ 그 말은,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기묘한 위안이 되었다. 그것은 누구의 탓도 아닌, 시스템의 문제였다. 그리고 그 시스템을 만든 것은, 저 푸른 눈의 사제였다. 여자들은 임피제를 원망하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 그를 신뢰하지도 않았다. 그는 더 이상 기적을 만드는 구원자가 아니라, 아름다운 환상을 보여주었지만, 그 환상을 지켜주지는 못한, 실패한 설계자일 뿐이었다.

임피제는 며칠 동안, 자신의 사무실 문을 걸어 잠갔다. 그는 책상 위에 펼쳐진, ‘신용(信用)’이라는 두 글자만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수만 개의 질문이, 폭풍처럼 휘몰아치고 있었다. 돈이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돈을 다루는 시스템을 만들 수 있단 말인가. 믿음이 깨져버린 사람들에게, 어떻게 다시 믿음을 자본으로 삼자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모순이었고, 광기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의 귓가에는, 축음기가 없었지만, 빌 위더스(Bill Withers)의 <Lean on Me>가 흐르는 듯했다. 힘들고 약해졌을 때, 기댈 수 있는 친구가 되어주겠다는, 그 소박하고 진실한 약속의 노래. 그는 생각했다. 지금이야말로, 더 늦기 전에, 이 잿더미 위에서, 그들 스스로가 서로에게 기댈 수 있는 어깨가 되어주는 길을 만들어야만 한다고.

며칠 뒤, 임피제는 굳게 닫았던 사무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그는 양순임을 통해, 테쉬폰의 모든 여자들을 다시 불러 모았다. 그의 부름에, 여자들은 마지못해, 하나둘씩 테쉬폰으로 모여들었다. 그녀들의 얼굴에는 어떤 기대도 없었다. 그저, 이 지긋지긋한 이야기의 끝을 확인하러 온 사람들처럼, 무표정하고 지쳐있을 뿐이었다.

모두가 모이자, 임피제는 테쉬폰의 중앙에 섰다. 그는 위로의 말을 건네지 않았다. 그는 그들의 상처를, 절망을, 그리고 불신을,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여러분이 모든 것을 잃었다는 것을 압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지만, 텅 빈 테쉬폰 안을 분명하게 울렸다. "돈을 잃었고, 미래를 잃었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람에 대한 믿음을 잃었습니다."

그는 낡은 칠판을 끌고 와, 그 위에 하얀 분필로, 며칠 밤낮으로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바로 그 단어를 적었다.

신용 (信用)

"우리는 돈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아직 단 하나, 남아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신용’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지난 몇 년간 땀 흘려 일하며 쌓아 올린, 바로 그 정직함과 성실함입니다."

여자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돼지은행을 기억하십니까? 우리는 돼지 한 마리 없이, 새끼를 낳으면 갚겠다는 약속 하나만으로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믿음’을 담보로, 기적을 만들어냈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것을 다시 하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구상을, 가능한 한 가장 쉬운 언어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우리의 은행을 만들 겁니다. 돈으로 돈을 넣는 은행이 아니라, 각자의 ‘신용’을 출자하는 은행입니다. 여러분이 매달 스웨터를 짜서 번 돈의 일부를, 이곳에 저축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돈은, 투명한 장부 아래, 우리 모두의 감시 아래 관리될 겁니다. 그리고 그 돈이 모이면, 우리는 그 돈을 가장 필요한 사람에게, 가장 낮은 이자로 빌려줄 겁니다. 동생의 등록금이 필요한 사람에게, 아픈 부모님의 약값이 필요한 사람에게. 은행은 우리를 믿지 않지만, 우리는 서로를 믿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당시 대한민국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 없는, 가장 혁신적이고 대담한 제안이었다. 돈이 아닌, 보이지 않는 믿음을 자본으로 삼는 ‘신용협동조합’.

"이것이, 우리가 다시 일어서는 유일한 길입니다. 외부의 돈이나, 다른 사람의 자비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힘으로, 우리 자신의 신뢰를 담보로, 스스로 서는 겁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테쉬폰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의 제안은 너무나 이상적이고, 비현실적이어서, 여자들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바로 그때, 고은영이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임피제의 말을 비웃지도, 분노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저, 깊은 연민이 담긴 눈으로 그를 쳐다볼 뿐이었다.

"신부님." 그녀의 목소리는 차가웠지만, 이상할 정도로 설득력이 있었다.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계’일 뿐입니다. 돼지은행이요? 그것은 우리가 가난하고 아무것도 없었을 때나 통하던, 원시적인 방식입니다. 우리는 이제 다릅니다. 우리는 돈의 무서움을 알아버렸습니다."

그녀는 다른 여자들을 향해 돌아섰다.

"여러분, 신부님의 말씀은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망상입니다. 또다시 ‘믿음’이라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에, 우리의 미래를 걸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한번, 그 믿음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감상이 아니라, 현실적인 대안입니다. 우리의 돈을 안전하게 지켜주고, 더 큰돈으로 불려줄 수 있는, 투명하고 합리적인 시스템입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테쉬폰의 문이 열리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말끔한 양복을 차려입은 최 사장과, 그의 옆에는 낯선 양복쟁이 몇몇이 서 있었다.

최 사장은 구원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여자들의 절망을, 따뜻한 목소리로 위로했다.

"여러분들이 겪은 아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을 돕기 위해 왔습니다."

그는 고은영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여기, 고은영 양과 같은, 똑똑하고 현실적인 젊은이가 여러분과 함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저는 고은영 양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는 옆에 있던 양복쟁이를 소개했다. 서울에서 온, 유능한 금융 전문가라고 했다.

"여러분, 이제 주먹구구식으로 돈을 관리하는 시대는 끝났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외부의 선진 투자 기법과, 투명한 경영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제가 제안합니다."

그는 고은영이 들고 있던 서류를 받아, 여자들 앞에 펼쳐 보였다.

"‘한림개발 주식회사’를 설립하는 겁니다. 제가 여러분이 잃어버린 곗돈 전액을, 투자금의 형태로 지원하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이 회사의 주주가 되는 겁니다. 여러분의 노동력과, 저의 자본이 만나는 겁니다. 이 전문가들이, 여러분의 돈을 가장 안전하고, 가장 수익률 높은 곳에 투자해 줄 겁니다. 손실은 제가 책임지고, 이익은 여러분과 함께 나누겠습니다."

그의 제안은, 너무나 현실적이고, 압도적으로 매력적이었다.

테쉬폰은 이제, 두 개의 다른 세계가 충돌하는 전쟁터가 되었다.

한쪽에는, 임피제 신부가 서 있었다. 그의 뒤에는, 칠판에 쓰인 ‘신용’이라는, 보이지 않는 단어 하나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다른 한쪽에는, 고은영과 최 사장, 그리고 서울에서 온 번지르르한 전문가들이 서 있었다. 그들의 뒤에는, ‘한림개발 주식회사’라는 이름 아래, 손실 보전과 더 큰 이익을 약속하는, 눈에 보이는 돈의 힘이 버티고 있었다.

마을은, 마지막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임피제의 ‘보이지 않는 믿음’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최 사장과 고은영 연합의 ‘보이는 돈’을 선택할 것인가.

여자들은 흔들렸다. 그녀들의 눈빛은, 절망의 잿더미 위에서, 두 개의 다른 구원의 손길을 번갈아 쳐다보며,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양순임은 굳은 얼굴로, 임피제의 곁을 지키고 서 있었지만, 그녀의 눈동자 또한,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것은, 이 작은 공동체가 넘어야 할, 마지막이자 가장 높은 문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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