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쉬폰의 둥근 지붕 아래, 아주 느리고 평화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닫혔던 문 안에서, 소녀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어낸 ‘우리들의 약속’은, 생각보다 견고한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그들만의 기묘한 시스템이었다. 경쟁과 협동, 개인의 욕망과 공동체의 신뢰가, 아슬아슬한 저울 위에서 기적적인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성공은 안정감을 가져왔고, 안정감은 미래를 꿈꾸게 했다. 소녀들은 이제, 자신들의 손으로 번 돈을 그냥 허투루 쓰지 않았다. 그녀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 섬의 어머니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그들만의 ‘계(契)’를 만들었다. 열두 명의 소녀들이 매달 똑같은 돈을 모아, 순서대로 한 사람에게 목돈을 몰아주는, 가장 원시적이지만 가장 강력한 형태의 신용 시스템. 그것은 단순한 곗돈이 아니었다. 그것은 1년 뒤, 동생의 대학 등록금을, 2년 뒤, 낡은 부엌을 고칠 목돈을, 3년 뒤, 자신의 결혼 자금을 약속하는, 미래와의 계약서였다.
그 계의 중심에는, 계주(契主)인 ‘영자 언니’가 있었다. 언제나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누구의 험담 한번 한 적 없는, 마을의 모든 대소사를 꿰고 있는, 모두가 믿어 의심치 않는 이웃. 그녀의 집 마루 밑에는, 소녀들의 꿈이 담긴 묵직한 돈 항아리가, 가장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었다.
임피제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그 모든 풍경을 바라보며, 아주 오랜만에 깊은 평온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만든 시스템이, 이제 자신의 손을 떠나, 스스로 진화하고 성장하고 있음을 보았다. 그는 축음기에, 캐럴 킹(Carole King)의 <You've Got a Friend>를 올렸다. 네가 힘들고 어려울 때, 눈을 감고 나를 생각하면, 어디든지 달려가겠다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다정한 위로의 노래. 그는 생각했다. 저 아이들은, 이제 서로에게 그런 친구가 되어주고 있다고.
하지만 그 평온한 세계를, 섬의 또 다른 어둠 속에서, 한 남자가 차가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최 사장이었다.
한림수직의 내부 와해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뒤, 그는 분노하지 않았다. 그는 차라리, 기묘한 종류의 존경심마저 느끼고 있었다. 저 푸른 눈의 사제가 만든 시스템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질기고 강했다. 그렇다면, 더 이상 시스템 자체를 공격해서는 안 된다. 시스템이 서 있는 땅, 즉 ‘신뢰’라는 기반 자체를 무너뜨려야 한다.
그는 뱀처럼, 조용하고 끈질기게 먹잇감의 약점을 파고들었다. 그의 정보원은, 그에게 아주 흥미로운 소식을 가져다주었다. 계주인 영자 씨의 남편이, 아주 은밀하게, 서귀포의 도박판을 드나든다는 것이었다.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있었고, 부부는 매일 밤 돈 문제로 소리 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최 사장은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영자 씨의 남편이 거액의 빚을 갚지 못해, 막다른 골목에 몰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직접 움직였다. 그는 어둠을 틈타, 영자 씨의 집을 찾아갔다.
그는 협박하거나 위협하지 않았다. 그는 구원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많이 힘드시지요." 그는 거액이 든 돈 봉투를 남자 앞에 내려놓았다. "이 돈으로, 급한 불은 끄십시오. 그리고, 더 큰돈을 벌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그는 남자의 탐욕과 절박함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았다. 그는 속삭였다. "그 항아리, 어차피 당신 아내가 평생 뼈 빠지게 일해서 채운 것 아닙니까. 그 안에 든 돈의 절반은, 당신 몫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그 돈을 가지고, 하룻밤만 사라지십시오. 제가 안전한 곳을 마련해 드리지요. 그리고 이 돈의 두 배를, 아니 세 배를 벌 수 있는 새로운 사업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그의 제안은, 지옥의 문을 여는, 달콤한 유혹이었다. 남자의 눈이 흔들렸다. 최 사장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이것은 도둑질이 아닙니다. 당신의 정당한 몫을 찾는 것뿐입니다. 저 코쟁이 신부가, 당신 아내와 마을 사람들을 현혹해서, 엉터리 같은 공동체 놀음을 하고 있는 겁니다. 당신은, 그 환상에서 당신의 가족을 구해내는 겁니다."
그날 밤, 영자 씨의 집 마루 밑에서, 소녀들의 꿈이 담긴 묵직한 항아리가, 소리 없이 사라졌다.
다음 날 아침, 비극은 희망에 부푼 한 소녀의 발걸음으로 시작되었다. 그날은 순자라는 소녀가 곗돈을 타는 날이었다. 그녀는 지난 1년간, 그날만을 손꼽아 기다려왔다. 그 돈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육지에 있는 남동생의 대학교 첫 학기 등록금이었다. 그녀는 어젯밤, 동생에게 보낼 편지에 ‘이제 너도 우리 집안의 첫 번째 대학생이 되는구나’라고 쓰며, 몇 번이나 눈물을 훔쳤다.
그녀는 이른 아침부터 영자 언니의 집을 찾았다. 손에는 감사의 표시로, 갓 쪄낸 고구마가 담긴 작은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하지만 집은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대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부엌의 아궁이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소녀의 심장을 차갑게 짓눌렀다.
소문은, 마치 마른 들판에 붙은 불처럼, 순식간에 마을 전체로 번져나갔다. 영자 언니네 부부가, 밤 사이에 야반도주했다는 소문. 그리고, 마루 밑의 곗돈 항아리도 함께 사라졌다는 소문.
테쉬폰의 베틀은 하나둘씩 멈춰 섰다. 소녀들은 처음에는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일손을 놓고 영자 언니의 집으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이미, 망연자실한 얼굴의 순자가, 텅 빈 마루를 보며 주저앉아 있었다.
"아닐 거야, 뭔가 잘못됐을 거야."
한 소녀가 중얼거리며, 삐걱거리는 마루 위로 올라섰다. 그리고는 마치 홀린 사람처럼, 모두가 그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열어본 적 없었던, 마루 밑의 작은 널빤지를 들어 올렸다.
순간, 모든 소음이 멎었다.
항아리는 없었다. 그 자리에는, 항아리가 오랫동안 놓여 있던 흔적인 둥근 자국과, 축축하고 검은 흙만이, 그들의 모든 희망을 비웃듯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순자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것은 "아이고, 내 동생…" 하는, 갈라진 신음 소리뿐이었다. 그녀는 그대로 실신하듯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때부터였다. 한 소녀가, 마치 미친 사람처럼, 텅 빈 마루 밑의 흙을 맨손으로 파헤치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그 밑에 돈이 묻혀있을지 모른다는 헛된 희망 때문이었다. 그녀의 손톱 밑으로 검은 흙이 끼고 피가 배어 나왔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또 다른 소녀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실성한 듯 웃기 시작했다. 까르르거리는 그 웃음소리는, 테쉬폰의 그 어떤 베틀 소음보다도 더 끔찍하고 불길하게, 그 아침의 정적을 갈랐다.
대부분의 소녀들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소리 없는 눈물을 흘렸다. 그녀들이 잃어버린 것은, 단순히 돈이 아니었다. 그것은 동생의 대학 등록금이었고, 늙은 부모님의 약값이었으며, 자신의 미래를 위해 차곡차곡 쌓아 올린, 희망의 탑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은 믿음을 잃었다. 매일 아침 웃으며 인사하던 이웃에 대한 믿음, 땀 흘려 일하면 언젠가는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기댈 수 있다는, 공동체에 대한 믿음. 모든 것이, 하룻밤 사이에 산산조각 나 버렸다.
양순임은 울고 있는 소녀들의 등을 다독이며, 함께 울어주었다. 하지만 그녀의 위로는, 이 거대한 절망 앞에서 아무런 힘도 되지 못했다. 그녀들의 절규는, 테쉬폰의 둥근 지붕을 때리고, 텅 빈 하늘로 흩어지고 있었다.
바로 그때, 고은영이 테쉬폰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울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슬픔이나 동정이 없었다. 그 대신, 마치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순간을 맞이한 예언자의 그것처럼, 차갑고 냉정한 확신이 서려 있었다.
그녀는 울부짖는 소녀들의 한가운데에 섰다. 그녀는 위로의 말을 건네지 않았다. 그녀는, 이 모든 비극의 원인을 분석하고, 그 결론을 선언하기 위해 그곳에 서 있었다.
"모두, 그만 울어." 그녀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이것은 사고가 아니야. 이것은, 언젠가는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결과야."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내가 말했지. 감정에 의존하는 낡은 시스템은, 결국 이렇게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이웃에 대한 믿음' 같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걸로, 어떻게 우리의 재산을 지킬 수 있겠어?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그토록 믿었던 '함께'라는 가치의, 비참한 결말이야."
그녀의 말은 잔인했지만, 평생 모은 돈을 잃고 절망에 빠진 소녀들의 귀에는, 기묘한 설득력을 가지고 들렸다.
"신부님은 우리에게 꿈을 주셨지만, 그 꿈을 지킬 방법은 가르쳐주지 않았어. 나는, 이 모든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이것은 영자 언니의 배신이 아니야. 이것은, 우리의 낡은 시스템이 맞이한, 당연한 실패야."
그녀의 선언은, 마을 전체를 뒤덮은 불신과 절망이라는 기름에, 불을 붙이는 것과도 같았다. 소녀들은 서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임피제 신부의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독버섯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고은영은 자신의 주장을 입증할 완벽한 기회를 잡았다. 그녀는 이 비극을, 자신의 시대를 열기 위한 제물로 삼을 작정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섬의 또 다른 어둠 속에서, 최 사장은 만족스럽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이제, 구원자의 얼굴을 하고, 이 잿더미가 된 마을에 나타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