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회가 끝난 다음 날, 한림신협의 낡은 가죽 장부에는 ‘병원 건립 기금’이라는 새로운 항목이 생겼다. 그것은 단순한 회계 항목이 아니었다. 그것은 가난과 싸워 이긴 이 작은 공동체가, 이제는 질병과 죽음이라는,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공포와 맞서 싸우기로 결심했다는 선전포고였다.
그 소식은, 섬의 또 다른 어둠 속에 앉아 있던 최 사장의 귀에도 들어갔다. 그는 자신의 호화로운 사무실, 잘 닦인 마호가니 책상에 앉아, 정보원이 가져온 보고를 읽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분노나 놀라움이 없었다. 그 대신, 아주 오랫동안 풀리지 않던 수학 문제를 마침내 포기하기로 결심한 늙은 수학자의 그것과 같은, 깊은 피로감과 희미한 체념이 서려 있었다.
그는 평생을 숫자의 세계에서 살아왔다. 투입과 산출, 이익과 손실. 세상의 모든 것은 이 명쾌한 공식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임피제 신부가 만든 저 기묘한 공동체 역시, 언젠가는 이 자본의 논리 앞에 무릎 꿇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돈이라는 가장 강력한 바이러스를, 온갖 교활한 방식으로 그들의 심장부에 심었다. 하지만 그들은, 매번 그의 예상을 벗어나는 방식으로, 그 바이러스를 이겨냈다.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싸우고 있던 상대는 저 푸른 눈의 늙은 사제가 아니었다는 것을. 그가 싸우고 있던 것은, 그의 계산기에는 결코 입력될 수 없는, 눈에 보이지 않는 변수였다. 과부의 동전에 담긴 시간의 무게, 서로의 등을 다독여주었던 상처의 깊이, 그리고 배당금이라는 눈앞의 이익 대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을 위한 병원을 짓기로 결정한 그들의 어리석고도 위대한 마음. 그는 그것을 ‘신뢰 자본’이라고 부를 수도 있었지만, 그에게는 그저 ‘계산 불가능한 영역’일 뿐이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힘 앞에서, 그는 생애 처음으로 완벽한 패배를 인정해야만 했다. 싸움은 끝났다. 더 이상 그가 던질 수 있는 카드는 남아있지 않았다.
그날 밤, 그는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자신의 제국을 뒤로했다. 그는 값비싼 양복 대신, 낡은 작업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는 작은 어선 한 척에 몸을 싣고, 어둠을 틈타 조용히 한림항을 빠져나갔다. 그의 퇴장은, 그의 삶의 방식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소리도 흔적도 없었다. 마치 안개가 걷히듯, 그는 그렇게 사라졌다.
그의 머릿속에는, 축음기가 없었지만, 프로콜 하럼의 <A Whiter Shade of Pale>이, 아주 오랜만에 다시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노래는 더 이상, 야망의 서곡이 아니었다. 그것은 길고 길었던, 그리고 결국에는 패배로 끝난, 한 남자의 인생을 위한 장송곡처럼, 서글프고 아득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최 사장이 사라졌다는 소문은, 며칠 뒤에야 고은영의 귀에 들어갔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그녀는 테쉬폰 구석, 자신만의 책상에 앉아 새로운 생산성 향상 방안에 대한 보고서를 쓰고 있었다. 그녀는 총회에서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것을, 사람들의 일시적인 감상주의가 이성을 마비시킨, 안타까운 해프닝이라고 치부했다. 언젠가는 그들도, 자신의 방식이 옳았음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최 사장의 부재는, 그녀가 애써 쌓아 올린 그 믿음의 탑을, 가장 근본부터 뒤흔드는 지진과도 같았다. 그는 그녀의 유일한 파트너이자, 그녀의 합리성을 알아봐 준 유일한 후원자였다. 그런데 그가, 아무 말도 없이, 자신을 버리고 떠난 것이다.
그 순간, 그녀는 깨달았다. 자신이 가장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하고 있다고 믿었던 그 모든 순간들이, 사실은 최 사장이라는 거대한 배후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는, 한낱 꼭두각시의 몸짓에 불과했다는 것을. 그녀는 그의 파트너가 아니라, 그의 복수심을 채우기 위한 가장 유용한 도구였을 뿐이다. 그녀가 그토록 경멸했던 ‘감정’에, 그녀 자신이야말로 가장 철저하게 지배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적 우월감’이라는 이름의 감정, ‘인정받고 싶다’는 이름의 감정.
그녀의 신념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녀는 텅 빈 테쉬폰을 둘러보았다. 여자들은 모두, 병원 건립 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추가 작업을 하느라 분주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피곤함이 서려 있었지만, 동시에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종류의 활기와 연대감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더 이상 그녀에게 조언을 구하지 않았고, 그녀의 날카로운 분석을 필요로 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이 공동체로부터, 완벽하게 고립되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와, 짐을 쌌다. 그 안에는 지난 몇 년간 그녀가 기록해 온, 수십 권의 빽빽한 데이터 노트와, 몇 자루의 닳아빠진 몽당연필이 전부였다. 그녀가 믿었던 세계의 전부였다.
그녀는 누구에게도 작별 인사를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자신이 처음 이곳에 왔을 때처럼, 조용히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그녀가 마을을 떠나기 위해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길에, 정물의 언덕이 보였다. 그곳에서는, 새로운 병원의 기초 공사를 알리는, 희미한 망치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것은 새로운 세계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였고, 그녀가 결코 속할 수 없는 세계의 음악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신념이 무너진 섬을, 그렇게 떠나갔다. 그녀의 뒷모습은 비참했다. 그녀의 귓가에는, 조니 미첼의 <Both Sides, Now>가 흐르는 듯했다. 구름의 환상과 현실, 사랑의 기쁨과 슬픔, 삶의 모든 것을 양쪽에서 바라보았지만, 결국 아무것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그 쓸쓸한 고백의 노래. 그녀는 자신의 논리가, 삶의 절반밖에 설명하지 못했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은 것이었다.
둘의 퇴장으로, 길고 길었던 싸움은 막을 내렸다.
임피제는 그들의 소식을, 김만수를 통해 전해 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승리자의 기쁨이나, 안도감 같은 것은 없었다. 그는 그저, 창밖의, 이제 막 첫 삽을 뜨기 시작한 병원 부지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한마디를 내뱉었을 뿐이다.
"…모두가, 자신의 길을 찾아간 것이겠지."
그의 목소리에는, 길을 잃었던 두 영혼에 대한, 희미한 연민이 담겨 있었다.
그는 자신의 낡은 축음기로 다가가, 아주 오랜만에, 새로운 음반을 올렸다. 그것은 캣 스티븐스의 <Morning Has Broken>이었다. 어둠이 걷히고, 새로운 아침이 밝아왔음을 알리는, 맑고 청아한 피아노 전주가, 그의 작은 방을, 그리고 상처 입었던 섬 전체를, 부드럽게 감싸 안고 있었다.
길었던 밤이, 마침내 끝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