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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콬콬 Mar 30. 2018

영화 레이디 버드:때 이른 화해

브런치 무비패스 03

   재능 있는 배우이자 감독인 그레타 거윅의 레이디 버드는 재주 많은 젊은 청년의 반짝이는 눈빛처럼 사람을 끄는 매력이 분명하게 빛나는 영화이다. 살아있는 누군가의 진짜 인생을 훔쳐놓은 것마냥 세심하게 만든 장면들이 내내 이어지는데 꼭 단편영화 서너 편이 연속 상영되는 것만 같다. 좀 촘촘하게 살펴보면 레이디 버드는 여느 장편 영화들처럼 여러 에피소드를 통일하는 형식을 갖춘 구조 안에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그 구조란 바로 '성장'의 플롯이다. 또한 이 영화는 여성 주인공의 목소리로 청소년기에서 성인으로 진입하는 시기의 혼란을 이야기의 무대로 올린 보기 드문 영화이다.

  17살, 크리스틴을 주인공으로 해서 감독 그레타 거윅이 자신의 삶을 재료삼아 개성 넘치게 빚은 영화 레이디 버드는 등장하는 인물들의 말 한 마디나 몸짓이 모두 독특하고 생생하다. 특히 뮤지컬 연습을 지도하는 풋볼 강사 출신 선생님(카톨릭 학교라서 신부가 교사이다)이 등장하는 장면은 그레타 거윅이 영화의 분위기를 만들고 인물들의 개성을 매만지는 연출을 얼마나 잘했는지 보여준다. 진짜 저렇게 살 것 같은 사람들의 진지한 행동을 보고 있자니 웃겨서 웃지 이 영화가 억지로 유머를 짜내는 게 아니다. 영화 레이디 버드는 짧은 컷들이 이어지면서 경쾌한 리듬을 만드는데 그래서 영화가 단편 영화같은 인상을 풍기기도 한다.

   이 세계를 아주 잘 아는 이가 구축한 섬세한 공간은 주인공인 십대 소녀가 통과 의례처럼 지나는 시기를 거칠게 몰아부치지도 않고 심리적으로 학대하지도 않는다. 감독은 그 시절에 겪었던 경험들 그리고 추억과 기억을 재료로 사랑과 우정과 화해의 이야기를 만들려고 한다. 단편영화같은 인상을 풍기는 소소하고 세밀한 에피소드는 사실 영화의 뼈대를 이루는 주요한 핵심이자 주인공 크리스틴의 미션과 연결된다. 그녀가 고향 새크라멘토를 떠나 뉴욕으로 갈 수 있을까?  엄마는 극렬히 반대하고, 크리스틴의 점수로는 명문 대학에 입학할 자격에 미치지 못 한다. 그 무엇보다도 돈이 없다는 것. 그게 가장 큰 문제이다.

 이제 입학 할 대학을 결정해야 하는 크리스틴은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도시 새크라멘토가 너무 싫어서 꼭 문화와 예술의 도시 뉴욕의 명문대학에 가고만 싶다. 하지만 엄마는 크리스틴이 동부의 사립 대학에 다닐 돈이 어디서 나느냐면서 딸의 기를 죽인다. 엄마는 너한테 들어가는 돈이 얼마나 되는 줄이나 아느냐고 윽박지르는데, 이런 싸움에서 자식은 언제나 주눅든 마음을 인정하기 부끄러워 방문을 쾅 닫고 방 안으로 들어가 침대에 쳐박히면서 패배하기 마련이다. 딸은 모욕당한 심정을 어쩌지 못 한 채 너무 화가 나서, 나중에 돈을 벌어서 그 돈 다 갚겠다고 버럭 소리를 지르는데 크리스틴의 엄마는 네가 그런 돈을 벌만한 직업을 가질지 의심스럽다는 매정한 소리를 내뱉는다. 이러니 모녀 사이가 좋을 리가 없다.  

 가난하고 구차하게 살지만 마음마저 그런 것은 아니다. 크리스틴은 태어나자마자 주어진 이름 즉 운명처럼 불리는 자기 이름이 싫다며 스스로 레이디 버드로 불러달라고 주장한다. 그녀가 남자친구 데니와 첫 키스를 하고 난 뒤 다음으로 이어지는 장면은 촉촉한 눈빛으로 데니를 바라보는 크리스틴의 얼굴 클로즈샷이 아니다. 여느 영화라면 그럴 수도 있었을텐데, 이 영화는 좀 다르다. 이어지는 컷에서 크리스틴, 그러니까 레이디 버드가 하늘을 향해 '크아아!"라고 외치며 팔자 다리로 성큼성큼 걸으면서 다가온다. 처음으로 키스를 하고 나서 엄청 기분이 좋아 괴성을 지르며 밤거리를 달리는 인간, 그동안 영화에서 남자들이 자주 보였주었던 면모를 여성 캐릭터가 재현한다. 여자들은 너무 잘 아는 자기 모습이니까 익숙해서 별 감흥이 없고 남자들은 좀 어색하고 낯설 수도 있을 이미지. 여성 감독이 여성 화자를 주인공으로 삼아 여성이 겪은 경험을 보여주는 영화라서 레이디 버드의 이야기하기 방식은 상업영화에서 익숙하게 경험했던 스토리텔링과 거리를 둔다.  

  영화 레이디 버드는 (미국의)누구나 지난 고등학교 시절을 추억하면 떠오를만한 사건들을 1년에 걸쳐 보여준다. 17세의 터널을 지나는 동안 레이디 버드는 시험 점수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무도회에서 입을 옷을 고르며 엄마와 티격태격하고 남자친구를 만나고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뮤지컬 오디션에 참여한다.  맨날 붙어다니면서 가난한 신세에 대해 같이 푸념하던 단짝 친구를 줄리를 버리고 부자동네 사는 새친구들 무리를 기웃거리기도 한다. 이 1년 동안의 에피소드가 이어지면서 레이디 버드는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누구나 겪는 문제,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집을 떠날 준비를 마친다.

  못 사는 동네에 낡은 자기 집도 부끄럽고 아빠가 학교에 데려다줄 때 타고 와야 하는 차도 싫다. 날마나 '돈돈돈'을 외치는 엄마도 징그럽다. 마트에서 3달러짜리 책을 사달라고 하면 도서관에서 빌려 읽으라면서 그런 책은 부자들이나 돈 내고 사는 거라는 말로 윽박지르는 엄마. 그런 엄마가 타인들에게는 아주 관대하고 다정한 사람이다. 엄마도 할 말이 없지 않다. 남편은 실직했고 버클리 대학까지 나온 아들도 직업이 변변치 않은데 여자친구까지 데리고 와서 한집에 복닥거리면서 살다보니 살림을 꾸릴 여유가 없다. 게다가 중년에 낳은 딸 크리스틴은 언제나 자기와 어긋나기만 하니 어떻게 어린 딸의 인생에 다가가야 할 지 방법을 알 수가 없었다.

  고교생의 사랑과 우정, 성인식을 앞둔 설레는 심정을 보여주는 영화 같지만 영화 레이디 버드는 한 인간이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것들과 화해를 하는 과정에 주목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어머니와 도시 말이다. 그토록 미워했던 엄마. 항상 레이디 버드가 선택하는 것들에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비웃고 어린 딸은 절대 이길 수 없는 돈문제로 싸움을 걸던 엄마와 그런 가족들이 어울려 사는 궁색한 도시 새크라멘토. 이것들은 머리에 꽂은 핀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뽑아서 길바닥에 던져버리듯 그렇게 쉽게 버릴 수도 없다.

  성장의 이야기란 결국 우리의 주인공이 이전에는 깨닫지 못 했던 어떤 지혜를 얻으면서 마무리 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 지혜란 게 꼭 도덕과 윤리의 기준에 적합하게 들어맞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레이디 버드 역시 열일곱 살을 지나 열여덟 살을 맞이하는 일 년이란 시간 동안 자기에게 맞지도 않는 드레스를 입고 인상을 찌푸리는 인생은 살지 않겠다고 결정한다. 그리고 성인으로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새로운 도시로 떠나는데 그녀가 그토록 미워했던 고향 새크라멘토를 떠나자마자 깨달은 게 바로 엄마와 고향 새크라멘토에 대한 사랑! 벌써?

   이런 '익숙한' 마무리 때문에 이 영화의 미덕이기도 했던 독특한 인물들의 실감나는 장면들이 의심스러워진다. 화해가 그렇게 쉽나? 딸에게 날개도 없는 주제에 날려고 설친다는 엄마. 사춘기를 지나는 내내 자기를 비웃고 조롱하던 어머니를 이렇게 쉽게 끌어안으면서 도 통한 척 해도 될까? 우리의 주인공이 너무 빨리 깨달은 게 아닐까? 감독은 꼭 우리를 용서와 이해라는 안락의자에 앉혀야 했을까? 충분히 실험하고 도발하면서 자신의 세계를 확장해가도 될텐데 그레타 거윅은 너무 빨리 거장이 되어버렸나보다. 금새 용서를 하고 벌써 이해가 되니 말이다. 내내 흥미롭게 보았던 이 영화 레이디 버드가 안온한 부르주아의 이야기를 혁신적인 도전가의 실험적 이야기인 양 꾸며 만든 게 아닌가 의심도 든다. 아직 진정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울텐데. (섣부르게)용서로 마무리한 영화의 결말 때문에 결국 이 영화 역시 장르적인 관습에 기댄 여느 영화들과 다르지 않은 지점에 자기 자리를 잡고 만다.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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