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우 샤오시엔의 자전적인 영화 이야기
동년왕사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물론 영화를 시작하고 끝맺는 사람들은 살아있는 사람들이고 화자(혹은 감독)의 주된 관심은 살아남은 사람들이라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동년왕사>에 등장하는 가족들은 사는 동안 천천히 가족들을 죽음으로 떠나보내면서 살아간다. 그런 한 가족의 오랜 세월의 이야기를 하면서 감독은 그의 영화들이 대체로 그렇듯이 그가 태어나고 자란 대만의 역사를 성찰한다.
아이들은 유년기에 아버지의 죽음을 맞이하고 청년기에 어머니를 떠나보낸다. 그리고 부모 없이 형제들이 각자의 공간에서 자기만의 세상사는 방법을 터득해가고 있을 즈음 할머니를 잃는다. 이 영화에서 죽음은 그렇게 세 번 ‘등장’한다.
집 안에 붙박이처럼 존재하던 아버지가 죽었을 때 감정이 북받쳐서 큰 소리로 우는 사람은 어머니뿐이었다. 1947년 중국 본토에서 대만으로 이주한 이들 가족들중 오직 아버지와 할머니만 언제나 다시 고향인 중국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믿으면서 살았다. 본토에선 그래도 넉넉한 살림을 끌고 살면서 교사생활을 했던 아버지는 대만으로 이주한 뒤로는 도무지 맥을 못 추린다. 중국에 문화혁명이 일어나고 정치적인 혼란이 점차 커지면서 아버지는 다시 돌아갈 길이 보이지 않게 된 현실을 깨닫는다. 그러고는 얼마 지나지 않은, 늦은 밤 조용히 세상을 떠난다. 자식들은 자신들의 인생에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던 아버지의 죽음을 어색하고 낯선 태도로 받아들인다. 그들에게 눈물은 시체 앞에 선 아이의 두려움 때문에 솟은 것일 뿐이다. 어머니만 큰 소리로 통곡을 한다.
아하는 어머니가 혀에 무엇이 돋았다고 대수롭지 않은 듯 얘기할 때부터(이것이 뒤에 후두암으로 판명된다) 영화에서 어머니의 죽음과 대구를 이루는 인물이었다. 어머니가 자신의 죽음을 실감하면서 편지를 쓰던 밤, 아하는 몽정 탓에 잠에서 깨 정액이 묻은 팬티를 물에 빤다. 젊은 아하의 밤과 암에 걸렸고 죽음을 앞두고 있는 어머니의 밤은 같은 밤이지만 다른 밤이다. 아하는 어머니와 함께 병원에 가고, 어머니가 병원에 가 있는 동안 도시락의 반찬을 직접 만들기도 한다. 점점 동네 깡패 친구들과 몰려다니면서 싸움을 일삼는 아하이지만 어머니가 아픈 동안만은 몸에서 솟는 에너지를 다스리려고 애쓴다. 그러다 결국 어머니가 죽고, 형제들 중 오직 아하만이 혼자서 큰 소리로 울면서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한다.
그런데 어머니의 죽음 뒤에 가족들이 정작 발견한 것은 아버지이다. 어머니의 짐을 정리하던 딸은 아버지가 손수 쓴 자서전을 발견한다. 그저 가만히 앉아서 실패한 자신의 인생만 바라보고 있었다고 여겼던 아버지가 자식들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사랑했음을 자식들은 알게 된다.
아이들은 부모를 모두 잃었지만 여전히 누군가를 사랑하고 미래를 위해 시험공부를 한다. 일상은 지속되고, 이미 죽어버린 아버지의 진심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인생이 크게 달라지진 않는다. 아이들은 언제나 고향땅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하는 할머니가 동네를 헤매고 돌아다니다가 방바닥에 누워서 멍하니 바깥을 내다보는 것을 자연스런 풍경처럼 여긴다. 그러니 할머니가 그렇게 방바닥에 누워 있다가 죽어서 며칠이 지나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저 할 일만 할 뿐이다. 벌레가 끓는 할머니의 시신을 거두러온 장의사는 아이들을 매서운 눈초리로 쳐다본다.
이미 유년기에 여러 번 죽음을 경험한 아이들은 그들이 성장한 뒤 죽은 할머니의 시신 앞에서 비정해 보일 만큼 담담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할머니를 돌보지 않은 아이들을 비난하지만 아이들이 할머니를 방치하면서 자기의 인생에만 골몰한 채 살았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마음속에 간직한 할머니를 떠올리며 추억하는 것을 거짓이라고 몰아세울 수는 없을 것이다. 진실은 여러 가지 모양새로 존재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동년왕사는 나레이션과, 멀찌감치 물러서서 바라보는 롱샷과 롱테이크로 영화의 형식을 일관되게 유지하면서 절대 영화 속 사건을 판단하려 들지 않겠다는 관조적인 자세(카메라)로 한 가족의 성장과 이별의 세월을 훑는다. 영화는 화자(감독)의 요구대로 지나치게 슬프거나 우울하지 않은 시선으로 형제들이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많은 사람들이 나오는 번잡하고 부산한 장면 사이사이에 등장하는 텅빈 쇼트(비가 쏟아지는 거리, 학교 건물, 텅 빈 복도 등)는 인생의 허망한 느낌을 물질화(영화화)하는 기능을 하는데, 결국 죽음에 이르고야마는 인생의 쓸쓸함을 물질(필름)에 담아 보는 이들에게 ‘볼 수 없지만 분명히 느낄 수 있는 감정’을 전한다. 이런 영화적인 기법은 로베르 브레송과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에서도 자주 보이는데, 인생의 고독을 설명하려는 영화작가들이 선택한 영화적인 방법이다.
롱테이크와 롱샷의 사용, 보이지 않는 금을 넘지 않으려고 철저히 객관적 시선을 유지하려는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적 태도에서 인간 혹은 타인, 그리고 인생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겠다는 고집을 느낄 수 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런 그의 입장은 인생과 죽음과 역사에 대해 정말 아무 것도 모르겠다는 고백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래서 그저 살면서 본 것들 혹은 느낀 것들을 진심으로 보여주면 최선의 예술이 되지 않겠느냐고 스스로 다짐한 사람이 만든 영화가 그의 자전적인 작품으로 알려진 <동년왕사가> 아닐까. 그저 짐작할 뿐이다.
*16년 전에 쓴 글이다. 오랫동안 잠금해둔 블로그에 가둬둔 글인데 다시 브런치로 불러오기로 했다.
요즘 영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을 꼼꼼하게 보다보니 후 샤오시엔이 떠올랐다.
<동년왕사>야 말로 유년의 기억을 영화로 만든 영화의 대표격인 영화일테니까.
<동년왕사>는 내가 필름으로 단편영화를 처음 만들 때 레퍼런스로 삼아 열심히 들여다본 영화라
항상 마음에 남아있는 작품이다. 내 삶의 기록과 전혀 다른 영화이나 마치 내 유년의 우울하고 두려웠던 시기를 그대로 영화로 만든 것만 같다고 느끼기도 한다. 원글을 그대로 옮겼는데 다시 <동년왕사>를 보고나면 새로운 글을 쓸 수 있을테지. 16년이 지나 다시 본 영화 <동년왕사>는 어떨까. 장마철이 시작되면 다시 읽기를 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