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초콜릿 상자에는 더 이상 쓴 럼주가 든 게 없었으면 좋겠다
늘 웃음을 잃지 않는 지인에게 이런 얘기를 들었다. 그는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어렸을 적 먹었던 초콜릿 상자를 떠올린다고 한다. 형형색색의 초콜릿이 들어 있는 예쁜 상자 말이다. 상자를 열고 초콜릿을 먹기 시작할 때 어떤 아이는 제일 맛없어 보이는 것부터 먹고, 어떤 아이는 제일 맛있어 보이는 것부터 먹는데 자신은 후자 쪽이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똑같은 초콜릿인데도 자신에게는 다 맛있는 초콜릿이 됐지만 어떤 아이에게는 전부 다 맛없는 초콜릿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마음먹기에 따라 같은 문제도 180도 달라질 수 있다는 깨달음이 자신이 웃음을 잃지 않고 사는 비결이란 얘기다.
나는 전자 쪽이었다. 마지막에 좋은 맛의 여운을 남겨두고 싶어서 맛없는 것부터 집어먹는 습관을 가졌다. 꾸역꾸역 맛없는 걸 집어먹고 나서, 내 앞에 맛있는 것들만 남았을 때 황홀했다. 시작보다는 끝이 좋은걸 선호했다. 나름 고진감래 정신이라고 할까. 나 같은 사람에게는 초두효과보다는 최신효과가 더 잘 먹히는 모양이었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서도 보면, 기억을 지워주는 의사는 조엘에게 클레멘타인과의 가장 최근의 기억부터 지울 거라고 말한다. 최근에 행복했던 기억을 지우기가 제일 힘들 거고, 그게 지워지면 나머지 과거의 기억들은 지우기 쉬워질 테니까.
여하튼 나는, 지금 쓴 초콜릿부터 먹고 있는 중이니까, 이걸 참고 견뎌내면 달콤한 초콜릿을 맛 볼 기회가 오겠지, 하는 마음 가짐으로 살았다. 좋게 말하면 긍정적이고 희망적으로 사는 거. 그런데... 요새는 '제일 맛없어 보이는 초콜릿을 먼저 집어먹는' 그 아이가 좀 가여워졌다. 너무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고 사는 건 아닐까(희망은 생각보다 믿을만한 감정이 아니고, 사실은 배신 전문이다). 내가 맛없는 걸 혼자서 먹어 치우는 동안 남들이 다 맛있는 걸 집어먹어버린 것은 아닐까, 아님 맛있는 초콜릿들이 다 녹아버린 것은 아닐까.
초콜릿 상자에는 한 사람의 인생이 담겨 있거든요. 포레스트 검프란 영화 보셨어요? 거기 보면 주인공 엄마가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은 거다. 네가 무엇을 집을 지는 아무도 모른다 라고 말하거든요.
(...)
"그럼 지금까지 집은 초콜릿은 다 맛있었나요?"
아뇨, 좋은 것도 있었고 나쁜 것도 있었고...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그 상자는 제 꺼고 어차피 제가 다 먹어야 하는 거니까요. 언제 어느 걸 먹느냐 그 차이뿐이겠죠. 그치만 예전과 지금은 다를 거예요. 아마... 어릴 때는 겁도 없이 아무거나 쑥쑥 다 집어먹고 그랬는데 지금은 생각도 많이 하고 주저주저하면서 고르겠죠. 어떤 건 쓴 럼주가 들어있다는 걸 이젠 알거든요. 바라는 게 있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초콜릿 상자에 더 이상 쓴 럼주가 든 게 없었으면 좋겠다. 30년 동안 다 먹어치웠다... 그거예요.
내 이름은 김삼순, 2005
8년 전에도, 12년이 지난 지금도 이 말은 여전히 내 맘 속에 콕 박혀있는 대사다.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겁쟁이가 되고, 이번 선택은 좀 더 신중히 하자 늘 마음먹는다. 그렇지만 점점 더 선택의 결과에 대해 집착하고 훨씬 더 좌절하고 있다. 내 선택에 따르는 책임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그걸 감당하려면 어떻게 선택해야 하는지 점점 알아가고 있고, 그걸 알기에 선택은 늘 망설여진다. 내가 선택한 초콜릿의 결과에 따라 일희일비하는 감정적인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노력도 해본다. 인생은 B와 D사이의 C고, 똥인지 된장인지는 찍어 먹어봐야 알고, 선택의 연속이니까 인생이고, 그 선택은 언제나 밝고 즐거울 수 없는 것도 받아들인다.
그러나, 내 초콜릿 상자는 이제 거의 반을 향해 달려가고 있고(100세 시대라니까 3분의 1일지도), 이미 달려온 반이 그리 달콤하지 않았다면.. 나는 얼마나 더 쓴 럼주를 먹어야 하는 것이며, 도대체 내가 가진 초콜릿들 중 달콤함이 있기는 한 건지. 나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