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책을 단 괴물
주의!
이 글에는 부적절하고 교양 없는 단어-사내 또라이-가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거부감을 느끼시는 분들은 뒤로 가기를 누르세요.
재직 중인 회사에 유명한 또라이가 있다. 사무실보다 정신과가 더 어울리는 이 사람에 관한 욕을 어딘가 익명으로라도 써 갈기고 싶지만 꾹꾹 참으며 몇 년을 버텼다. 왜냐고? 내가 없는 사이 내 컴퓨터를 뒤져 남의 웨딩사진을 구경하는 분에게 이 글을 찾는 것쯤은 일도 아닐 테니 말이다.
녹색창에 사내 또라이라고 쳐 본다. 표준어가 아니라며 검색어 수정을 제시한다. 사내 또라이라는 말이 "교양 있는 서울 사람이 쓰는 말"로는 틀렸다 할지라도 나는 저 또라이를 교양 있게 불러주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다. 다시 구글에서 사내 또라이라고 다시 입력해본다. 브런치라는 처음 보는 플랫폼에서 해당 키워드로 여러 개의 글이 검색되었다. 하나씩 눌러 순서대로 정독하며 다들 나처럼 또라이에게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에 약간의 위안을 얻었다. 그렇다. 나와 브런치를 연결해 준 오작교는 바로 사내또라이였다. 갑자기 아주 약간 감사한 마음이 생긴다.
수시로 술도 같이 먹고 친하게 지내던 상사가 갑자기 돌변해 공지사항을 올려 나를 따돌리라고 시키는 모습은 한 편의 블랙 코미디다. 나이 사십을 먹은 관리자가 너 쟤랑 놀지마 라는 말을 자기가 연봉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부하직원에게 하는 것이다. 짧지 않은 직장 생활을 하며 사내또라이의 표적이 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던 나는 이번에도 내 업무 하나만 보고 버텼다. 그동안의 경험을 봤을 때 또라이가 무슨 음해 공작을 하든 간에 내 일만 똑바로 하고 감정적 대응을 하지 않으면 결국 연봉은 나에게 보답했기 때문이다. 그간 수많은 또라이의 흉탄에 비명횡사하지 않으려고 갖은 수를 쓰며 견뎠던 그 긴 과정에서 나는 이 불쾌한 종족의 몇 가지 특성을 발견했다.
사내 또라이의 또라이짓은 당사자의 낮은 자존감에서 기인한다. 자존감과 자존심은 전혀 다른 것이다. 자존감은 "자기 유효성에 대한 확신"인 반면 자존심은 "내가 못났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은 고집"에 가깝다. 건강한 자존감은 긍정적인 상호 교류와 성취감을 먹고 자라난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사내 또라이는 대체적으로 개인의 삶이 불행한 경우가 많다. (물론 그러한 환경에서도 아름답고 단단하게 자라난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하며 그분들의 삶을 비하하고자 하는 의도는 결코 아님을 밝힌다.) 또라이는 타인과 주거니 받거니 하는 인간적인 관계를 맺어본 적이 없다. 많은 사내 또라이들은 친구가 없으며,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은 본인이 다 쳐냈다고 자랑하지만 사실 그 친구들도 또라이에게 연락하지 않는다.
분명히 강조하건대 결혼 여부와 또라이짓에는 인과관계가 없다. 오히려 불행한 결혼 생활의 스트레스를 부하직원에게 쏟아붓는 사람들이 더 많다. 기혼이든 미혼이든 또라이는 또라이다. 그들이 남자든 여자든, 결혼을 했던 안 했든 간에 그들은 대개 불행하고, 긍정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일 가능성이 크다.
보통 사람인 우리는 금요일 퇴근 도장을 찍는 순간 평일의 스트레스를 다 놓아 버린다. 잘 안되더라도 그렇게 하려고 노력한다. 나의 정신 건강을 위해 맛있는 음식도 먹고 친구도 만나고 못 했던 운동과 잠도 보충한다. 여기까지가 평범한 사람이 주말에 평일의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이다. 그렇다면 또라이는? 사내 또라이는 주말에도 쉬지 않는다. 그들은 주말에 특별한 활동이 없는 경우가 많다. 티브이만 홀로 떠드는 방 안에서 월화수목금요일 내내 자신을 무시하고 화를 내게 만들었던 모든 인물과 사건을 곱씹는다. 그리고 월요일 아침이 되면 가장 만만하고 약한 사람을 골라 주말 내내 크고 아름답게 부풀려 온 증오의 핵폭탄을 퍼붓는다.
사내 또라이는 항상 불안하다. 직원들이 삼삼 오오 모여서 목소리를 낮춰 낄낄대는 걸 보면 틀림없이 자신의 험담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불안해진다. 항상 화가 나있고, 조금이라도 자신의 뜻을 거스르거나 수용하길 거부하는 직원을 보면 대로, 진노, 격노한다. 사내 또라이는 본인이 아닌 다른 직원이 성과를 공개적으로 인정받으면 질투심으로 터질 듯 부풀어 오른다. 상대의 성과를 깎아내리고 능력을 폄하하며, 사소한 잘못까지 들추어내 낯부끄러운 공세를 펼친다. 자신이 도드라지기 위해 피리를 불고 북을 쳐대지만, 둥둥 울리는 소리가 크면 클수록 자기 자신이 더욱더 초라하고 우스워진다는 느낌에 어쩔 줄 몰라한다. 그래서 더 악랄하게 달려들고, 더 큰 소리로 모욕한다. 자신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는 그 짧은 순간만큼은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집중하기 때문이다. 북소리가 사라진 그 자리는 수치심이 차지한다. 그들은 자신의 초라함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용기가 없는 사람이다.
사내 또라이는 갈등을 해소할 줄 모른다. 그들은 상대를 철저히 짓밟아 자신 앞에 무릎 꿇게 하는 방식으로만 갈등을 해소한다. 이건 해소가 아니다. 상명하복, 거스르면 징계뿐인 이런 관계를 동등한 지위의 타인이라면 당연히 거절하고 단절할 것이다. 친구가 사라진 또라이의 주위에 남은 건 회사라는 우리에 갇힌 부하직원들뿐이다. 결국 또라이의 내면에 잠재된 개인적 불행이 우연히 꼬투리를 잡힌 직원에게 쏟아지고야 마는 것이다. 또라이는 피해자인 상대에게 오히려 사과를 요구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정말로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머리 숙여 잘못을 비는 기현상이 벌어진다. 직원들은 또라이가 던지는 사적인 감정의 수류탄을 피하기 위해 친밀하게 아첨하는 눈으로 궁금하지도 않은 안부를 묻는다. 그리고 또라이는 슬프게도 정말로 주위 사람들이 자신을 좋아하기 때문에 주말에 뭘 하셨냐고 묻는다고 믿는다. 이런 사람과 나는 일을 하고 있다. 나도 거짓말이었으면 좋겠다.
사내 또라이는 회사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직급은 자신의 이름으로, 직책을 자신의 영혼으로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보다 인정받는 타인은 그들에겐 악몽 그 자체다. 또라이는 승진, 포상, 연봉 인상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보증서라고 생각한다.
또라이는 언제나 가장 주목받고 싶어 한다. 이러한 심리는 처음엔 또라이를 어느 정도 승진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인정을 갈구하기 때문에 더 노력하고, 남들보다 더 회사에 오래 남아 더 많이 일한다. 하지만 타고난 재능이라는 밑천이 떨어지고 나면 또라이들은 고통스러운 정체기에 빠져든다. 그들은 애 타도록 중심에 서길 갈망하지만 자신이 가진 매력도 능력도 모두 부족하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만다. 그러다 결국 남은 방법은 타인을 공격해 깎아내리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내가 가장 누추하고 천박할지라도 상관없다. 나보다 더 납작하게 짓밟으면 되니까.
사내 또라이는 타인의 뺨을 때려야만 자신에게 손이 있음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이다. 자신의 존재를 느끼기 위해 온 몸으로 피해자를 들이받고, 손에 잡히는 대로 파괴한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는 상황이 오면 그들은 극도의 불안과 공포를 느낀다. 자신이 사라져 버린 것 같기 때문이다. 사내 또라이는 거울이 없으면 자신에게 얼굴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비춰줄 거울, 자신이 밟고 올라설 상대, 자신과 부딪혀서 소리를 낼 타인을 찾아 헤맨다. 주변인들이 또라이를 기피하면 할수록 더욱더 크게 팔을 휘저어 상대를 찾아낸다. 이것은 끝없이 반복되며 또라이의 마음속에 회복하기 힘든 구멍을 낸다.
이건 단언컨대 사내 또라이의 허세다. 내가 이 정도로 쿨하며 사실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말을 돌려서 하는 것뿐이다. 그들은 결코 자신이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 인정하는 그 순간 자신의 모든 것이 무너지고 말 것이란 걸 그들도 알기 때문이다.
지금껏 번호까지 붙여가며 반복적으로 이야기했지만 사실 사내 또라이의 심리는 한 줄로 압축할 수 있다.
낮은 자존감으로 인한 내적 고통을 타인에게 전가하는 사람
그렇다면 사내 또라이는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우선 사내 또라이 본인에게는 적극적인 심리치료와 자존감 수업이 필수적이다. 또한 비폭력 대화 수강과 주 3회 운동을 추천한다. 그리고 그동안 자신이 괴롭히고 헐뜯고 모함해서 회사를 제 발로 나가게 하거나 잘리게 한 그 많은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해야 한다. 진심으로 말이다. 당신 때문에 피해자들은 밤잠 설치며 고통받았다. 그리고 사과에 앞서 우선 당신이 보잘것없는 보통 사람이며, 당신의 그 못된 심성과 악랄한 기질마저 다 본인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받아들기를 바란다. 내가 나를 보는 것은 화해의 출발점이다. 자기 자신을 감싸 안아 줄 수 없는 사람은 결코 타인과도 그럴 수 없다. 사무실 안에서 인간 산탄총처럼 불행을 흩뿌리는 행동은 어서 그만두라. 자기 자신을 직시하길 바란다.
그리고 사내 또라이 피해자들께는 우선 심심한 위로를 드린다. 사내 또라이는 자연재해다.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말이다. 당신이 무언가를 해서 / 혹은 안 해서 사내 또라이의 표적이 된 것이 아님을 꼭 기억하라. 자신을 탓하지 말라.
피해자 역시 적당한 수준의 심리치료를 받길 권장한다. 지금 당장 정신과 리클라이너에 가서 누우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회사 안에서 닳아 없어진 정신력을 적극적으로 보충하라는 뜻이다. 긍정적인 경험을 많이 채워놓아야 사내 또라이의 마이너스 공격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엄마보다 더 오래, 자주, 피할 수 없이 계속해서 만나야 하는 직장 동료들과의 관계는 안 보면 되는 친구사이와는 다르다. 주먹을 날리고 싶은 상대에게 거짓 웃음을 바치는 것은 고통스럽다. 안다. 고통스럽다는 것을 인정하자. 이렇게 힘들기 때문에 월급을 주는 것이다. 월급은 일을 잘해서 받는 것이며 그 일에는 대인관계 능력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많은 피해자들이 또라이의 공격에 반응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다 홧병을 얻는다. 지금 내가 그렇다. 화병이 표준어라고 하는데 빠진 시옷이 못내 허전하다. 교양 있는 표준어로는 나의 이 고통과 분노를 다 표현할 수 없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홧병은 미국 정신의학회에도 한국어 그대로 " hwa-byung"이라고 등재되어 있을 만큼 한국 특유의 참고 복종하는 문화에 기인한 정신병이다. 당신은 참고 또 참다가 몸이 아픈 지경까지 왔다. 그간 참으로 잘 참았다. 나는 당신의 인내심을 칭찬하고 싶다. 이제 그 고도로 훈련된 인내심을 활용하여 꼭 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이직이다.
당신이 바란 답은 이직이 아니라 지혜로운 대처법이었을 것이다. 그간 많은 선배들이 다양한 해법을 제시했고 지난 10년간 나는 그것들을 실천했다. 친해지기? 친해졌다가 다른 것까지 털려서 더 공격당했다. 더 높은 상사에게 고발하기? 상사도 또라이의 편이었다. 무시하기? 무시는 상대에게 어떠한 대미지도 입히지 않았고 오히려 나만 내상을 입었다. 전직 대통령이 좋아하는 표현을 써야 할 때가 왔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 다 소용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또라이의 병은 심해졌다. 나에 관한 거짓 소문을 퍼트리다 못해 그 거짓말을 스스로 진짜라고 믿고, 임원에게 나를 징계하라고 고발까지 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퇴사를 결심했다.
사내 또라이 때문에 이직을 하겠다고 하면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슬픈 물리법칙이 있다. 그 유명한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 하지만 우리는 사내 또라이를 방치한 조직 역시 이 비극의 공범이라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라이가 입사와 동시에 지금처럼 블록버스터급의 미친짓을 저질러대지는 않았다는 점을 상기해보자. 그들도 처음엔 머뭇거렸다. 그러다 슬슬 구렁이 담 넘어가듯 한 발짝식 넘어봤는데,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다. 그러니 결국 제 집인양 숫제 똬리를 틀고 닥치는 대로 물어뜯는 것이다. 사내 또라이가 아직 덜또라이이던 때에 적절한 징계를 받았다면 어땠을까? 적어도 지금처럼 엉망진창이진 않았을 것이라고 믿는다.
사적인 감정으로 업무를 방해하고, 술을 잘 따르면 연봉을 더 올려주겠다고 말하는 사람을 간부로 임명하는 회사에 직원으로 있기를 거부하라. 그냥 재수 없어서 나를 따돌린다고 말하는 사람이 관리직에 앉아있는 회사를 어서 박차고 나오라. 어느 조직에나 또라이는 있다. 하지만 또라이를 관리하는 조직과 방임하는 조직은 따로 있다.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전자다.
한 줄 요약: 독립적인 인력관리부서가 있는 회사로 이직이 답.
무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