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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채 Feb 23. 2017

엄마가 고맙대요, 카카오톡.

엄마는 늘 내게 '가르쳐 주는' 사람이었다. 먹고 쓰고 읽는 법, 식성과 말투까지. 그런 엄마가 손전화를 산 날, 처음으로 나는 엄마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는' 입장이 되어야 했다. 방금 너에게 이메일을 보냈으니 빨리 읽고 답장을 쓰라고 기세 등등하게 종용을 하던 엄마는 폴더폰의 천지인 키판 앞에선 쩔쩔맸다. 보다 못한 동생까지 달라붙었다. 아니 엄마 그게 아니구, 편지봉투를 누르라니까? 편지봉투. 엄마 편지봉투 안 보여?



출처 http://www.androidauthority.com/




LCD 판 위에 검은 도트로 구현된 작은 네모가 엄마 눈에도 편지봉투로 인식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엄마가 처음으로 문자를 혼자 쓸 수 있게 되자 나에게 보낸 메시지는 세 글자였다.




사랑해





문자 쓰기를 익힌 후로 엄마의 문자 내용은 3 3 3 라임을 탔다.


어디냐

오이소

나는집


엄마는 포켓몬 마스터처럼 핸드폰으로 집 나간 자식들을 불러댔지만 우리는 자정이 넘어서야 도둑 발을 하고 이불속으로 숨어들곤 했다. 한 달 200개 무료 문자를 금쪽같이 아껴 썼던 나는 엄마가 사 준 손전화로 엄마가 아닌 타인에게만 메시지를 보냈다. 밥상머리에서도 폰을 붙들고 있는 자식들이 못내 서운했을 엄마는 그 시절 설거지를 하다 말고 참 많이 우셨다고 했다.

 여름방학이었다. 기숙사가 끝나고 집에 내려갔더니 내 방이 창고로 변신해있었다. 엄마와 함께 안방에 누웠다. 우리 사이는 데면데면했다. 엄마는 내 핫핑크색 - 미술용어로 오페라 컬러였다- 머리가 마음에 안 들었고, 나는 무조건 교회 가서 회개하라고 하는 엄마가 싫었다. 설잠이 들었던 나와 엄마는 아빠가 부산을 떠는소리에 잠을 깼다. 새벽 3시였다. 무심코 엄마한테 물어봤다.


아빠랑 왜 결혼했어


내 질문 앞머리에는 '저런'이라는 형용사가 생략되어 있었다. 한밤중 불 꺼진 안방에서 나란히 이불을 덮고 인터뷰가 시작됐다. 엄마는 이 질문을 오랫동안 기다린 것만 같았다. 막힘없이 술술 굴러 나오는 옛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알았다. 내가 증오하고 원망한 저 사람을 엄마는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엄마는 아빠도 사랑하고 나도 사랑했다. 얼굴만 맞대면 싸우는 남편과 자식 사이에서 찢어지지 않으려고 자신을 옭아매서라도 가족을 지키려 한 것은 엄마였다. 도시에서 쓰리피스 양복에 맞춤 구두를 신고 이층 양옥집 맏딸로 살았던 엄마는 아빠와 결혼한 죄로 고무신에 몸빼를 입고 모내기를 했다. 엄마가 결혼한 남자 때문에 엄마의 엄마는 화병이 나 입술이 까맣게 탔다고 했다. 논둑에 앉아 소리 죽여 울면서도 엄마는 나의 엄마로 살기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고 했다. 우리의 대화는 해 뜨는 아침까지 이어졌다. 더 말할 기운이 없으니 일단 한 숨 자자고 합의한 우리는 따로 덮은 이불 바깥으로 팔을 뻗어 서로의 손을 맞잡고 잠이 들었다. 엄마와 나 사이에 가로막혀 있던 높은 담장에 금이 가기 시작한 건 이때부터였다.


우리가 아무리 애써 가르쳐도 엄마의 손가락은 된소리 입력을 거부했다. 결국 엄마는 딸님을 달님으로 쓰기로 손가락과 합의했고 이것은 엄마의 말투로 굳었다. 수년 후 엄마는 새 스마트폰을 사자마자 카톡은 어떻게 하는 거냐는 질문을 시작으로 또 드센 딸들에게 뜯겨가며 카카오톡 사용법을 배워야 했다. 앱을 눌러야 돼. 앱. 엄마 이거 노란 네모 있잖아. 이거 안 보여?

자식이 부모의 말투를 따라가듯 엄마는 우리의 문자체를 닮아갔다. 내가 [엄마 어디야] 하고 보내면


집 ㅋ


이런 식이다.

동생과 둘이 가는 필리핀 여행을 엄마는 반대했다. -사실 엄마는 내가 어디를 가든 반대했다- 걱정이 취미인 엄마에게 우리는 수시로 여행 사진을 보내고, 보이스톡과 페이스톡도 했다. 사실 두 서비스 모두 데이터 통화료가 나오므로 엄밀히 말하면 무료는 아니었지만, 엄마는 카톡 프로필 아래에 뜬 '무료통화'라는 표현이 마음에 들었던 것 같았다. 비용이 들지 않으니 자식하고 언제든지 마음 편하게 연락할 수 있다는 이미지를 갖게 해 준 게 아닐까. 엄마의 구형 스마트폰은 비행기로 5시간 거리를 날아 우리에게 엄마의 저녁밥상 모습을 전송해주었다. 비록 저화질에 음성은 영상보다 한 박자 늦게 따라왔지만, 엄마의 환하게 웃는 얼굴은 또렷하게 내 기억 속에 새겨져 있다.



몇 해 전 엄마가 나에게 했던 말이 있다.

나는 카카오톡 만든 사람한테 너무 고맙다고 인사라도 하고 싶다.
이렇게 우리 딸 하고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사진도 보내고 이야기도 할 수 있게 해줘서 너무 고맙다.


독립해서 품을 떠난 자식을 카카오톡 덕에 조금이라도 더 가깝게 느낄 수 있어서 엄마는 감사하다고 했다. 세상이 좋아져서 이렇게 좋은 기술이 나올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복이냐고도 했다. 엄마는 사뭇 진지했다. 나는 엄마의 진심을 이 글에 담아 간접적으로나마 카카오톡 팀에게 전한다.



엄마가 고맙대요, 카카오톡






무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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