룸 넘버 G2.

여행의 단면

by 무채

구름이 두툼한 빗줄기를 들이붓는다.
신혼여행의 첫날이자 우리의 웨딩촬영이 있는 지금 하필 비라니. 한 마디로 망했다고 할 수 있다. 버틀러의 등 뒤로 보이는 호텔 복도가 빗물에 젖어 번들거린다.
어릴 때부터 비가 싫었다. 비에 젖어 감기는 교복 치마의 감촉도 싫었고, 물이 샌 가방의 눅눅함도 싫었다. 그런 나를 비는 어디 당해 보라는 듯이 가는 곳마다 집요하게 쫓아왔다. 팔라우에서 수평선을 지워버릴 만큼 거대한 폭우를 만났고, 건기의 하프돔이 비구름에 잠겨 사라진 모습을 보았다. 나는 빗물 젖은 요세미티에서 냄새나는 텐트를 치며 비에 대한 오랜 증오를 내 안으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몇 년 후, 마치 필연처럼 비를 좋아하는 남자와 결혼을 했다. 베란다 우수관을 타고 흐르는 빗소리를 듣고 있으면 더없이 포근하고 나른해져서, 잠이 쏟아지고 기분이 좋아진다는 그런 사람.

어쩌죠? 비가 점점 더 많이 와요


촬영 작가에게 텍스트를 보내자마자 여기 비는 변덕이 심하니까 점심까지만 기다려 보자는 답이 왔다. 죄 없는 오믈렛을 포크로 찔러대며 애타는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나와 다르게 남편은 소파에 기대어 가만히 귀를 열고 있었다. 활짝 젖혀진 커튼을 배경으로 흠뻑 젖은 야자수와 검은 하늘을 조용히 호흡하는 남편의 어깨. 그 선을 따라가다 보니 내 흥분과 조바심도 바닷가 모래알처럼 사륵사륵, 어디론가 쓸려 가 버렸다.
빗방울이 열대 식물을 토톡 타고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웨딩 촬영 준비를 시작했다. 정성껏 다려 걸어 두었던 하얀 드레스를 내려 입고 내 손으로 남편 얼굴에 화장을 해 주었다. 신랑의 오른쪽 눈썹을 그려주며 여기에 흉터가 있었지. 하고 마음속으로 되새겨 본다. 어릴 때 넘어지면서 크게 찢어져 여러 바늘 꿰맸다는 이야기. 아마도 엄마한테 안겨 앙앙 울었을 그 아이가 서른을 넘도록 훌쩍 커서 마침내 내게로 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는 사실이, 가끔 마법처럼 느껴진다.


열한 시 삼십 분까지 비는 내렸다. 변덕이 심하다던 이 나라의 비가 오늘은 소신을 지키기로 한 걸까. 이쯤 되니 축축한 느낌으로 찍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기 시작했다. 작가에게 그냥 찍자고 메시지를 보낸 게 열한 시 사십 분, 열 두시까진 기다려 보자는 답이 날아온 게 사십오 분. 답을 기다리며 창 밖을 내다보았다. 먹구름이 보이지 않는다. 빗물 소리도 없다. 열도의 뜨거운 직사광선이 내리 꽂히며 새파란 하늘이 열리고 있었다. 비가 그친 것이다. 뻔뻔스러울 만큼 극적으로 맑아진 날씨에 우리는 신이 나서 짐을 싸들고 촬영지로 출발했다.


직접 디자인 한 웨딩 링 쿠션

나의 웨딩 촬영은 중국산이었다. 웨딩 링 쿠션과 웨딩 베일, 촬영용 주얼리까지 필요한 소품 전부를 중국에서 직구 했다. 한국 인터넷에서 산 드레스와 부케도 made in China 가 붙어있었다. 사람 빼고는 다 수입인 이 웨딩 촬영을 준비하며 나의 손가락은 랜선을 타고 전 세계를 날아다녔다. 러시아 새색시들이 올린 인증사진을 바탕으로 한국의 내가 중국인 판매자에게 영어로 질문하고 비자 카드로 결제를 했다. 판박이 웨딩 촬영이 싫다며 시작한 셀프 웨딩이었는데 어느샌가 남들이 한다는 건 다 사들이고 있었다. 그렇게 EMS 송장을 달고 내 손에 떨어진 물건들은 차곡차곡 개켜져 노란 캐리어에 실렸다.


속눈썹 붙이는 법을 유튜브로 보고 배운 탓인지 지금도 웨딩 사진 속의 나는 눈매가 어색하다. 어림짐작으로 꽂은 뒷머리 장식은 원래 있어야 할 자리보다 5센티는 높이 올라가서 어설픔을 과시하고 있다. 곱게 왁스를 발라 넘긴 신랑의 머리는 보라카이 바닷바람에 다 헝클어졌다. 아 이래서 실내 스튜디오에서 찍는구나. 아 이래서 비싼 돈 주고 헬퍼를 쓰는구나. 공장식이라고 매도할 게 아니었다. 틀에 박힌 웨딩 촬영이 모두 똑같은 이유는 그것이 가장 효율적이기 때문이었다. 최단 시간 내에 가장 높은 완성도를 뽑아내기 위한 최고의 공식. 그 경제적이고 편리한 공식을 거부한 나의 셀프 웨딩 스냅은 난생처음 파티에 온 사람들처럼 쭈뼛거리며 한 모금씩 어설픔을 들이켰다.


신랑님 조금만 웃으실게요.

신부님 팔 조금만 떼실게요.


계속되는 주문에 정신이 탈색된다. 직각으로 내리 꽂히는 햇빛 때문에 눈을 뜨는 것조차 버거운데 웃으라니. 화장이 녹고 두피에 불이 붙는 것만 같았다. 하나 둘 셋 하면 꽃잎을 뿌리며 미소를 짓다가 셔터가 멈추면 재빨리 꽃잎을 그러모았다. 현지인만큼 새카맣게 탄 사진사와 진짜 현지인 보조 사진사, 웨딩드레스를 입은 나, 드레스 셔츠를 입은 신랑까지 넷이서 바람에 날아가는 꽃잎을 쫓아다니는 모습이 즐거워 보였나 보다. 비키니 차림으로 지나가던 사람들이 우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촬영이 끝나고 돌아오는 트라이시클의 백미러에 비친 우리는 검은 피부와 원색 티셔츠의 홍수 속에서 어딘가 가짜처럼 새하얀 드레스와 빳빳한 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 대조적인 이질감이 마치 합성 티가 나는 옛날 사진 같았다.


룸 넘버 G2. 우리 방으로 돌아와 반나절만에 필요 없는 물건이 된 부케를 소파 위에 던져버렸다. 땀에 젖은 드레스를 벗고 나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차가운 샤워를 하고 휴양지에 걸맞은 얇은 옷으로 갈아입은 우리는 손을 맞잡고 맥주와 선셋을 향해 걸어갔다.


동화 속 공주들은 백마 탄 왕자를 만나 장미와 울새로 치장된 성대한 결혼식을 치른 후에야 부부가 된다. 하지만 노이반슈타인 성의 공주가 아닌 나는 아파트 등기 때문에 결혼식도 전에 혼인 신고를 먼저 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 받아 든 웨딩 사진엔 우리 두 사람이 결혼에 이르기까지의 그 모든 순간들이, 짭쪼름한 양념이 되어 솔솔 뿌려져 있었다. 실패한 해외 직구 명세서, 변덕스러운 날씨, 잘못 고른 최악의 호텔까지 모두 녹아든 우리의 웨딩 스냅. 그 어디에도 없고 두 번 다시없을 우리의 처음을 기념하기 위해 찍은, 부부로서의 첫 번째 증명사진이다. 더없이 로맨틱하고 완벽하다.


저 모래처럼 우리도 알알이 섞여들자.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지만, 둘로 나눌 수도 없는 그런
모래가 되자.



룸 넘버 G2.

무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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