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죽고 싶었다

레이크 테나야

by 무채

시에라 네바다의 척박한 산줄기를 따라 졸졸 이 늘어선 침엽수들이 오선지 위의 음표처럼 통통 튀고 있었다. 파란 하늘에 길게 걸쳐진 깃털 구름은 라르고쯤 될까. 호수는 요정처럼 반짝이며 내 귀에만 들리는 음악을 연주했다. 소리 없는 음악, 호수와 구름과 산이 연주하는 음악이었다. 호수를 여행하다 영감을 받았다느니, 호숫가 산장에서 위대한 작품이 나왔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예술가들의 과장된 낭만쯤으로 치부했던 내 생각은 테나야를 만난 후로 변해버렸다. 아주 완전히.


이십구 년을 살며 평생 본 하늘 중에 가장 아름다운 하늘이 머리 위에 조용히 떠 있었다. 하늘의 색은 사실 우주의 색이라는 사실을 그때 처음 깨달았다. 끝없이 검은 우주의 암흑이 이 행성계의 유일한 광원인 태양빛에 녹아 시리도록 맑고 어여쁜 하늘색을 풀어내고 있었다.

라르고

나는 요세미티를 통과하고 있었다. 지하수 밸브를 또 잘못 여는 바람에 운동화가 흠뻑 젖었고, 때문에 대단히 찝찝한 상태였다. 한참을 달리던 밴이 점심을 먹기 위해 멈추자 호숫가 테이블에 간이 식탁을 차렸다. 추위와 곰 때문에 거의 잠을 못 잔 나는 멍한 표정으로 아무렇게나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지금 베이컨 위에 바르는 것이 딸기잼이라는 걸 자각 한 순간 캐리가 그런 걸 먹을 수 있냐고 물어봤다. 먹으면 되지 안될 건 뭐람. 망쳐버린 샌드위치를 들고 여기가 어딘지도 모른 채 그냥 푹 주저앉았다. 괴상한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문 순간 나는 입 속의 문제에 더 이상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음악이 없는데 음악이 들린다는 것이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구나. 신화 속 요정들이 떼를 지어 춤이라도 추듯 호수가 일렁였다. 눈부시게 일렁이는 요정의 군무를 보다보니 살면서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여기서 죽고 싶다는 생각 말이다.

나는 단순히 그랜드 캐년을 보고 싶어서 비행기를 탔다. 그 전까지의 큰 감정기복이래봤자 서른이 두 달 남았다는 것 뿐인데 나는 그것조차 덤덤했다. 어디 죽으러 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극성으로 반대하는 엄마와 조심히 잘 다녀오라고 신신 당부를 해대는 친구들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저 놀러 가는 것 뿐인데 왜들 저런담. 그들에게 사실 나는 미국 국립공원의 한 호수 앞에서 죽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나는 그저 죽을때까지 저 눈물 나도록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고 싶었다. 밤이 되면 호수를 가득 메울 별빛이 친절하게도 내 안으로도 쏟아진다면 모든 것이 순결해지고 용서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텅 빈 갈빗뼈 사이를 지난 호수의 별빛이 영혼까지 닿는다면 지나왔던 삶의 모든 순간이 정화 될 것 같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 한 점의 살점도 남아있지 않아야 했다. 내 몸, 머리카락, 배낭과 침낭까지 모두 다 먼지처럼 풍화되어 호수의 하얀 모래와 동화되길 원했다. 한 발짝도 떼지 않고 바로 이 자세 그대로, 일렁이는 물의 가장자리에 앉아.

5분 전까지는 베이컨과 딸기잼을 한 입에 넣으면 얼마나 괴상한 맛이 날지가 가장 큰 걱정거리였는데 지금은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이름 조차 모르는 호수에서. 나는 흥분한 목소리로 마크에게 호수의 이름을 물었다. 마크는 (아직도 마리화나 기운이 덜 가신 것처럼 웃으며) 너도 여기가 좋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대답했다.


레이크 테나야



레이크 테나야. 잊어버릴 까 봐 몇 번이나 다시 중얼거렸다. 레이크 테나야.

레이크 테나야.

테나야의 본래 이름은 [빛나는 바위의 호수]다. 요세미티가 인디언을 보호하고 인디언이 자연을 존중하던 시절부터 오래도록 테나야는 산맥에 박힌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하지만 봄부터 가을까지 미서부를 횡단하는 것이 직업인 마크에게 테나야는 점심도 먹고 운전도 쉬기에 적당한 예쁜 호수일 것이다. 엔진이 충분히 식자 출발을 위해 간이 식탁이 접혔다. 수난을 당했던 베이글과 베이컨도 아이스박스로 돌아갔다. 13시간을 날아 지구 반대편에서 온 나는 다시는 볼 수 없을 호수를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고개가 아플 정도로 목을 꺾고 창 밖을 바라보았다. 요정의 노래로 가득 찬 호수를.


Tenaya Lake

이 사진을 보면 호수 앞에 처음 다가가서 섰던 그때 내가 나를 가만히 안아준다. 고요함을 처음 귀로 들었던 곳. 물방울 하나 떨어지는 소리까지도 선명히 들릴만큼 조용한 곳. 내가 바로 지금 여기 이 자리에서 죽고 싶다고 생각한 곳.

마음속에 폭풍이 일어 죽도록 화가 나고 손이 떨리는 날이면 나는 가만히 테나야를 떠올린다.




사진 267.jpg
사진 268.jpg

여자 혼자 미서부 캠핑 여행

2011. 10

무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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