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채 Oct 31. 2017

사는 이유가 뭐예요



 깊숙하게 찌르는 날카로운 통증에 잠시 호흡을 멈춥니다. 왜 그런 질문을 하냐는 말이 대답보다 더 빨리 튀어나옵니다. 순순히 알려주기보다 핀잔을 섞어 쏘아붙이고 싶어 집니다. 사는 게 사는 거지 이유가 어딨어요.


 다이아몬드에 내포된 불순물처럼, 내가 사는 이유는 지극히 내밀한 나의 욕망이 너무 많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에게 사는 이유를 물어보는 것은 그래서 무례하게 느껴집니다. 아무런 준비 없이 단칼에 속마음이 잘려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나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왜 태어났을까? 내가 무엇을 위해서 이 세상에 왔을까? 

 출생의 순간에 대해 기억해보려고 애썼지만 내 기억 중 가장 오래된 것조차 태어난 지 3년 후의 일이었습니다. 동생이 탄 유모차가 너무 부러워서 팔을 휘두르며 우는 모습이 내가 태어난 이유는 아닐 것입니다.


 나를 태어나게 해 달라고 부탁한 적도 없는데 나는 태어났습니다. 세포 상태의 나는 아주 간절하게 출생을 갈망했고, 출산과정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스스로 나의 출생을 도왔다고 가정 시간에 배웠습니다. 하지만 내가 정말로 그렇게 세상에 나오고 싶어 했는지 나는 사실 의심스럽습니다. 이렇게 힘들 바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너무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미토콘드리아를 휘저으며 온 힘을 다해 출생을 갈망했던 그때 내가 꿈꿨던 삶은, 지금 내가 사는 현실과는 많이 달랐을 것입니다.

 내가 한 알의 세포이던 시절 두 개의 염색체가 만나기 위하여 경합했던 어마어마한 경쟁률은 이제 기억조차 나지 않는 과거의 일입니다. 그때의 나는 일단 태어나기만 하면 이 치열한 경쟁도 끝나고 평지처럼 온화한 삶이 쭉 보장될 것이라 믿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사회라는 이름의 거대한 자궁 속에서 여전히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내가 사는 이유는 나에게 살아갈 힘을 주는 원천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나와 긴밀하게 연결된 어떤 것, 나의 약점이자 내가 중시하는 가치를 가리키는 은밀한 이정표입니다. 감추고 싶은 내밀한 욕망이 하나로 응축되어 무한한 배터리처럼 나를 작동시키고 살아가게 합니다. 만약 내가 살아갈 이유가 사라진다면 나라는 시스템도 멈춰버리고 말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겐 직업적 성취가 살아갈 이유가 됩니다. 부모에게는 아이가 삶의 이유가 되고,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에겐 강아지나 고양이가 삶의 이유가 됩니다. 누구에겐 좋아하는 운동이 삶의 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누군가는 박스채로 수집한 운동화를 보며 그런 것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집집마다 각자의 등불이 있는 것처럼, 내가 살아가는 이유는 모두 다르지만 제각각 각자의 삶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 모든 이유는 삶을 그저 살아있기에 사는 것이 아닌, 더 멋지게 잘 살아낼 동력이 되어 줍니다.

 

 그래서 살아갈 이유에 대해 고백하는 것은 통증을 수반합니다. 내가 욕망하고 집착하는 나의 약점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살아갈 이유를 원하고, 지금 이 순간에도 찾고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만약에 어느 날 내 삶의 이유였던 아이가 다 커버린다면, 반려동물이 무지개다리를 건넌다면, 수집품을 모두 잃게 된다면 내가 살아갈 이유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생명이 있는 것은 반드시 끝이 납니다. 성공한 사업가도 은퇴는 피할 수 없습니다. 가연성 소재로 만들어진 수집품의 수명은 놀랍도록 짧습니다. 
 내 전부를 쏟아부어 키운 자식이 독립하게 되자 나 자신이 사라진 기분이 들어 우울해집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것은 이 세상 마지막 즐거움까지도 멸종되는 것만 같습니다. 키우던 반려 동물을 잃는 것은 인간 가족을 잃는 것과 똑같이 아프고 슬픕니다.
 살아갈 이유를 상실한 이들 중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장 적극적으로 삶의 이유를 찾고 그 희망을 동력으로 용광로처럼 살아야 할 10대 20대 30대의 사망 원인 1위는 자살입니다.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살아야 할 이유가 없어서, 이 고통을 견디면 나아질 거란 희망이 보이지 않아서 지금 이 순간에도 이 지구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슬픈 일입니다. 몇 번이고 다시 고쳐 썼지만 먹먹한 감정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위안을 담아 별이 된 그분들께 위로를 전하고 싶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나의 삶을 단지 목적지를 상실했다는 이유만으로 불행과 자책, 알코올로 연소하며 낭비할 수는 없습니다. 지속해야 할 근거가 없으면 이제 나의 삶도 끝나야 하나요? 아니면 또 다른 삶의 이유를 찾을 때까지 표류하는 배처럼 임시 운행 상태로 묵묵히 견뎌야 하나요? 이유가 없으면 달릴 수 없고, 이유가 없으면 살 수 없는 삶은 과연 건강한 삶일까요?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는 태양을 도는 혜성처럼 욕망을 구심점으로 공전하고 있습니다. 나만의 궤도를 따라 마음껏 날아다니고 있기에 언뜻 자유로워 보이지만, 사실 나의 작은 궤도는 빅뱅 이후 영원히 팽창하고 있는 우주의 관점에선 한낱 먼지보다 더 작은 존재입니다. 내가 집착하며 일희일비하는 나의 태양과 같은 항성이 알고 보면 이 우주엔 천억 개 넘게 존재한다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삶의 이유를 간절히 바라는 것은 욕망의 축과 내 허리춤을 연결한 채 미친 사람처럼 동그라미를 그리며 도는 것과 같습니다. 이 미친 사람은 오로지 자유롭기 위해 힘껏 달립니다. 하지만 허리에 매인 끈이 나를 꽉 잡고 있는 한 나는 오로지 동그라미를 그리며 궤도 운동을 할 뿐입니다. 이렇게 욕망에 내 삶의 이유라는 감투를 달아주는 순간 자유가 사라집니다. 그것은 집착에게 나를 구속할 권리를 주는 꼴입니다.


 그러므로 살아갈 이유는 차라리 없는 것이 좋습니다. 살아갈 이유가 애초에 없다면 그 이유를 상실하고 슬퍼할 일도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기에 아이를 낳았고 열심히 노력했기에 성공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여태까지 꼽았던 많은 이유는 이유가 아니라 결과라고 부르는 것이 더 어울립니다. 결과는 내 삶이 잘 굴러가고 있다는 증거의 하나일 뿐입니다. 결과를 삶의 이유로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이유가 있으면 그 이유가 끝났을 때 살아야 할 이유도 사라지게 됩니다. 이유가 정해져 있으면 오히려 내가 삶의 이유를 충족시키지 못했다는 생각에 자괴감이 들고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반면에 그저 내가 살아있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 만족한다면 갈망은 사라지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냥 사는 거지 이유가 어디 있느냐고 툭 던지듯 말하는 것만으로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때로는 현명한 바보로 사는 것이 불행한 현자로 사는 것보다 훨씬 더 낫습니다. 살아갈 이유 같은 거창한 사명에 집착하는 대신 주어진 현재에 집중한다면 그 길이 나를 완전한 행복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글 그림

무채







매거진의 이전글 혼자가 더 편해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