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가을이었다.
남편이 미국 LA지사 주재원으로 발령이 났다며 가족이 모두 함께 미국으로 가야 한다고 이야기했을 때 아들의 표정은 뭔가 거대한 운명의 힘에 의해 정말 원하지 않는 일을 해야만 하는 사람의 두려움과 분노와 짜증이 섞인 얼굴이었다. 중학교 2학년 중간고사가 끝난 무렵이었다.
2009년 6학년이 된 아이가 중고등학생 시절에 어차피 학원을 다녀야 한다면 접근성이 좋은 곳에서 등하원이라도 편하게 하라고 목동으로 이사 온 지 2년 반 만이었다. 정들고 익숙한 유치원, 초등학교 친구들과 헤어지고 새로운 동네, 새로운 학교의 친구들을 사귀고 친숙해져서 이제는 이곳에 새로 내린 뿌리가 적응하는 듯하던 시점에 다시 멀고도 낯선, 이제는 친척들과도 멀리멀리 떨어진 미국으로 가야 한다니 마음이 먼저 고달팠나보다. 그것도 초등학교 2학년 때에는 미국에서 계속 살고 싶다고 진심으로 원했는데 마냥 행복하던 씨애틀에서의 미국 생활을 접고 어쩔 수 없이 한국으로 돌아와 한국에서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또 영어 실력을 유지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왔던 바를 알기에 그 마음이 참으로 안쓰럽고 미안했다.
아들은 자기는 미국에 안 가고 한국에 그냥 혼자 남겠다고 했다.
축구 동아리를 만들어서 틈틈이 축구도 하고 십여 명의 찐친구들과 모임도 하면서 정말 신나게 생활하고 있었고 학교 국영수 성적도 최상급으로 잘 나오기 시작하면서 더할 나위 없이 즐겁게 생활하고 있던 차였으니 그런 만족스러운 삶을 뒤로 하고 떠나고 싶을 리 만무했다. 그러나 현실은 주재원으로 가족이 모두 나가면 생활비며 주택비 지원이 별도로 나오기 때문에 내가 학교를 동반휴직해서 무급이 되어도 둘이 맞벌이를 할 때보다 여유로운 생활이 가능하고 무엇보다 한국에서의 입시가 호락호락하지 않을 텐데 남편의 도움 없이 학교에 나가면서 아이의 입시를 뒷바라지할 자신도 없고, 유학도 보내는 마당에 아이가 자연스럽게 가족과 함께 지내면서 미국에서 공부할 수 있는 둘도 없는 기회이기도 하므로 당연히 함께 나가야만 했다.
나로서는 교직에서 한참 중요한 시기에 4년이라는 경력 공백이 생기는 것에 대한 걱정이 아예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이제 40세에 미래의 일은 모르는 거고 운 좋게 연구학교에서 근무한 성적도 있는 데다가 60시간 4학점짜리 연수를 만점에 가까운 우수한 성적으로 4개를 이수한 상태였고 연구점수도 반은 채워놓았으며 담임점수도 거의 만점에 부장점수도 5년만 더 하면 만점이니 승진을 하려면 얼마든지 도전할 만한 상황이었다. 교장선생님께서는 자신도 남편이 주재원으로 해외 근무를 했었는데 자신은 딸들과 함께 한국에 남아서 근속하여 지금 이렇게 교장이 될 수 있었다고 말씀하시는데 동반휴직을 하게 되면 경력 점수가 모자라게 되어 승진은 물 건너가는 것을 염두에 두고 조언해 주신 것이다. 하지만 늘 집에서 아이 밥 차려주며 부족한 것 없이 챙겨주는 엄마의 역할을 바쁘다고 잘 못 하는 것에 대한 미안함과 열등감이 컸던 터라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미국 공립학교에 다니기 위해 필요한 재학증명서, 성적증명서, 생활기록부, 예방접종 증명서 등을 영문으로 발급받고 공증받았으며 E2 비자 인터뷰를 통과한 후 주변의 가족 친지들과 동료 선생님들, 제자들의 응원과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헤어짐에 대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4년이라는 기간을 보내게 될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렌지 카운티로 이사했다. 처음 미국에서 살기 위해 떠날 때와는 180도 다른 부담감과 무게감을 안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