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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ldhail Apr 22. 2019

제주도 강생이

강생이 : 강아지, 개의 제주도 방언

<제주도 강생이>     

김포공항에서 한 시간의 비행. 제주도까지는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걸린다. 제주공항에선 1월의 날씨에도 키가 큰 남국의 야자수들을 마주할 수 있다. 대한민국 유기동물 안락사 비율을 나타낸 2017년 통계자료에서도, 유독 키가 큰 제주의 차트를 마주할 수 있다. 지난해 9월부터 제주도의 유기동물 이야기를 담은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높은 안락 사율을 그저 마주하고 있을 뿐이라는 무력감이 몸을 감쌌다. 이 곳 제주도에선 왜 이리 많은 생명들이 사라졌을까? 차트 속의 야자수는 무관심과 이기심으로 무럭무럭 자랐을 거라는 생각이 들 때쯤 차가운 바람이 느껴졌다.

개는 사람에게 사랑받고 자라도록 길들여진 생명들이다. 경제가 발달하면서, 무분별하게 태어나고 개량된 이 불쌍한 종(種)들은 인간의 부족한 책임감과 넘치는 이기심으로 버려지고 있다. 그렇게 '애완견'에서 '유기견'으로 분류가 바뀌게 되면 다시 인간의 품으로 돌아가지도, 자연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유기동물보호소에서 생을 보내게 된다.

어쩌면 우리는 100년이 지난 후에도 동물들의 마음을 알 수 없을 것이다. 설사 다른 종(種)과 의사소통이 된다 하더라도 그들의 지능과 생각이 미치는 범위는 인간의 그것과는 달라 서로를 이해하기에 역부족일 것이다. 인간으로서 이러한 행위에 책임을 져야 할 텐데도, 우리는 여전히 이기적인 인간으로서 있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인간에 의해 길들여지다 버림받은 생명은 차가운 철문 안에서, 그나마 따뜻한 보호소의 온기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운이 좋으면 새로운 가족을 만나겠지만, 철문 안에서 20일 남짓을 지내면 무지개다리를 건너게 된다. 계속 해서 생기는 유기견들을 무한대로 수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빈자리는 새로운 유기견이 채우고, 악순환은 반복된다. 어쩌면 지난번 방문 때 봤었던 유기견들이 사라져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차가워졌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제주시 용강동에는 제주유기동물보호센터가 있다. 손에 꼽힐 정도로 매우 잘 관리되는 보호소지만, 그곳에 놓인 작은 생명들의 삶은 더없이 초라하다. 제주도에서는 강아지를 강생이라고 부른다. 육지에서 귀여운 아이를 두고 '아이고, 우리 강아지' 하듯, '우리 강생이'한다. 이 곳 유기동물보호센터의 유기견들도 귀엽긴 매한가지다. 하지만, 강생이가 '유기견'이라는 명찰을 단 후부터 우리는 이 생명들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게 될까. '버려진 강생이'들의 눈을 보기가 힘들어 유기동물보호센터 바깥으로 나와 제주도의 한 할머니가 들려준 '강생이' 이야기를 떠올린다.

 

"과거에도 까만 돌담이 가득했던 제주도에는 문 대신 넘기 좋은 정낭이 있었어. 그리고 맘 좋은 제주도 사람들은 '강생이'들을 넓은 들판에 풀어놓고 키웠었단다. 아마 친구도 많이 만들고 사랑도 나눴겠지. 강생이가 어른이 되고 또 자식이 생겨나고 그렇게 행복하게 살았겠지. 사람도 강생이도 어딘가에 매여 있지 않고 자유로웠던 이 곳에 높은 아파트가 들어올 때쯤, 뛰놀던 강생이들이 유기견이 되었단다."

구전(口傳)되어 오는 이야기인가 싶지만, 제주도의 유기동물 안락사 비율은 제주도의 관광도시화 시점과 정확히 일치한다. 제주 유기동물 보호소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관광객들이 마실 나온 개를 유기견으로 오인해 신고하는 경우가 많고, 등록제가 일반화되어 있지 않은 실정이다 보니 반려인들은 반려동물을 잃어버리게 된다고 한다. 또, 잃어버린다고 해도, 평생을 함께하는 존재라기보다는 가축이나 소유물로 여기는 경우가 많아 찾지 않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때로는 무지한 선의로, 때로는 차가운 눈으로 우리는 다른 생명을 바라본다. 그것은 유기견에게는 사형선고이며, 선고 후 판결이 내려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 유기견의 생명을 인간의 그것과 동일하게 보자는 말은 아니다. 다만, 우리는 그들을 살아가게 하고 떠나보내게도 하는 존재로서 그들을 넓은 아량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무분별한 분양과 유기를 반복하기 이전에 과연 다른 생명을 책임질 수 있는 존재인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돌아가는 제주 공항에서 다시 야자수를 마주했다. 어쩐지 더 커 보이는 야자수는 사라져 가는 생명만큼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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