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했으면 사과는 무조건 빨리 해야 돼."
팀원들에게, 후배들에게 늘 말했다. 사과는 무조건 빨리 해야 된다고. 눈치 보고 생각하며 미적거리는 동안에 시간은 계속 흐르고 상대방의 화는 커지기 마련이며, 사과하는 방법을 몰라서 그랬다는 뻔하지만 말도 안 되는 핑계는 일을 더 크게 만들 뿐이라고. 살면서 대단한 조언 같은 건 못해줘도 이 말만큼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했다. 서른다섯 해를 살아오면서 내가 몸소 보고 듣고 겪은 게 있기 때문이었다. 늦어서 좋은 사과란 없었다.
2주 전, 회사에서 엄청난 일이 있었다. 일종의 신입 환영회였는데 적당히 마시고 적당히 신나는 그런 분위기가 이어졌다. 사건이 터지기 전까진 말이다. 밖에 나갔다가 들어온 남자 대리가 자기 가방을 찾더니 이내 거칠게 가버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놀란 후배 하나가 대리의 팔을 붙잡았지만 거칠게 뿌리쳤다. 나는 남자 대리가 취했다고 생각해서 -지난 2년간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모습이었다. 스스로를 꼰대라고 할 만큼 보수적이고 위아래에 대해 확실한 아이 었다.- 옆에 있던 여자 대리에게 나가보라고 했다. 그리곤 그들과 같은 테이블에 있던 사원과 인턴들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냐고 했더니 남자 대리와 사원 사이에 뭔 일이 있는 것 같다 그랬다. 사원은 술 많이 마셨냐고 물었더니 맥주 2잔이라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소주를 계속 탄 맥주 500cc 2잔이었다.-
뒤따라 나간 여자 대리까지 소식이 없어 내가 밖으로 나갔다. 대리들은 없고 사건의 주인공인 사원이 동기와 함께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도 우리 팀의 남자 대리가 취해서 뭔가 실수를 한 거라고 믿었다.
"무슨 일이야?"
"저는 A선배가 저한테 뭐라고 하는 게 불편해요."
명백히 대리라는 직급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배라고 부르는 게 못마땅했지만 참고 다시 물었다.
"왜? A가 뭐라고 했길래 불편하니?"
"아니~ 저는 A선배가 저한테 이러네 저러네 얘기하는 게 불편해요."
"뭔 소리야. 뭐가 불편하다는 거야. A가 뭐라고 했는데? 내가 상황을 알아야 뭘 정리하지."
"........."
"너 취했지? 기억 안 나지?"
"..............."
그때 자리를 박차고 갔던 남자 대리가 여자 대리와 함께 돌아왔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화가 나서 나갔지만 내가 생각나 아차 싶었다고 했다. 사과를 드려야겠다고 생각하고 다시 돌아오던 중이라고 했다. 나는 남자 대리를 보자마자 소리쳤다. 어디 자리를 그렇게 박차고 나가냐고. 분위기를 왜 엉망으로 만드느냐고. 뭐하는 짓이냐고. 너 얘한테 도대체 뭐라고 한 거냐고. 일종의 쇼이기도 했지만 분위기를 망친 건 남자 대리였으니 혼날만했다.
"당신네 본부는 10억, 20억짜리 하면서 자기네 본부는 찌꺼기 같은 거나 한다고."
"너 진짜야? 진짜 그렇게 말했어?"
"아 소리 지르지 마세요!!!"
"뭐래는 거야 씨발"
"욕하지 마세요!!!!! 아 왜 셋이서 공격해!!!"
나에게 달려들 기세였다. 나보다 15cm 정도 작은데도 순간 위협을 느꼈다. 놀란 남자 대리와 동기가 그를 붙들었고 너와 내 문제니 다른 사람한테는 그러지 말라고 했다. 그는 막무가내였다. 왜 자기를 공격하냐며 소리를 질렀다. 더 볼 것도 없어 빨리 보내버리라 말하곤 내 짐을 챙겨 집으로 갔다.
당황한 남자 대리가 나를 뒤쫓아와 사과를 했다. 알았으니 얼른 저 새끼나 챙겨 보내라고 했다. 그러나 내가 떠나고도 그의 진상은 계속됐다. 내일 어쩌려고 그러냐고 그만 하고 사과하라는 주변 사람들의 말림에도 불구하고 그런 소리한 적 없다고 소리치고 울부짖다가 아 네네 죄송하네요 미안합니다라며 비아냥거렸단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던 남자 대리가 집으로 가려고 하자 굳이 뒤따라와서 시비를 걸었다. 동기와 여자 대리가 말리는 동안 아 내가 아까 사과를 X같이 한 거 같다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밤새 잠을 못 이뤘다. 내 일이, 우리 팀의 일이, 우리 본부의 일이 막말을 들어도 될 만큼 하찮았던 건가. 순간순간 현타가 왔다. 그가 보기엔 대단해 보였을 10억, 20억 프로젝트를 해결하기 위해 회사에서 쪽잠을 자고 울음을 삼켜야 했던 날들이 떠올랐다. 모두가 고생하는데 왜 자기만 생각하는 걸까. 아무리 자기 십자가가 제일 무거운 법이라지만 이건 완벽한 헛소리였다. 너무했다. 남자 대리와 둘이 있을 때 그런 말을 했건 안 했건 그렇게 소리 지르고 덤벼드는 건 제정신이라면 할 수 없는 짓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론 얼마나 스트레스받았으면,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다음 날, 그는 아무렇지 않게 출근해서 아무렇지 않게 일을 했다. 우리 모두는 당연히 그가 사과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오면 뭐라고 이야기를 해야 할까 단어 하나, 문장 한 줄을 고르던 참이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남자 대리에게 들은 그 날의 상황은 이랬다. 갑자기 기분이 다운된 것 같은 그가 걱정돼 잠깐 바람이라도 쐬러 나가자 했다고. 이때다 싶었는지 이런저런 하소연을 늘어놓던 그는 이내 감정이 격해지며 반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곤 '당신네 본부'로 시작하는 그 이상한 말을 쏟아냈다. 얼르고 달래며 그의 기분을 맞춰주던 남자 대리도 그때는 폭발했다고 했다. 나랑 지금 싸우자는 거냐고 했더니 어 그래 싸워!라고 했다고. 그 뒷일은 내가 보고 듣고 적은 그대로다.
그로부터 2주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 긴 시간 동안 그는 아직도 사과를 하지 않았다. 그가 만취해서 터트렸던 말들을 곱씹어보기도 하고, 혹시 전혀 기억을 못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해보고, 한참 나이 많은 내가 어른답게 이해해줘야 하는 게 아닐까 고민도 했다. 나도 그동안 술을 마시면서 주사를 부려본 적도, 필름이 나간 적도 있지만 기억 전체가 날아간 적은 없었다. 아주 사소하게나마 기억의 파편이 있었다. 그에게도 그런 게 있지 않을까 했지만, 그 자리에 없었던 사람처럼 전혀 상관없는 사람처럼 멀쩡하게 지내고 있었다. 되려 스트레스를 받는 건 우리 쪽이었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바라보며 받는 스트레스였다. 마지막 희망을 걸고, 여자 대리가 그와 한번 이야기를 해보겠노라 했다. 그런데 그는 이상하게도 바쁘다며 대화하는 걸 피했다. 그러자 여자 대리가 내게 말했다.
"이대로 지나가면 자기는 그래도 되는 줄 알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자리에 있던 인턴이나 사원도 그렇고요."
그래, 맞았다. 별일 아니라고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위계질서의 문제였다. 긴 고민 끝에 부사장님께 보고를 드렸다. 그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그리고 임원분들의 평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나의 단 한 번의 보고가 그를 해고 처리시킬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조심스러웠다. 내가 보고를 망설인 이유가 거기 있었다.
"미친놈이네!"
대리 둘이 경위서를 작성해서 부사장님께 보냈고 곧바로 대표님께도 보고됐다. 그는 이번 주 월요일 오후에 소환되어 경위서를 직접 읽었고 손으로 직접 시말서를 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과는 없었다.
그리고 어제, 나와 여자 대리가 자리를 비운 사이 남자 대리에게 사과를 했다고 들었다. 진짜 죄송하다고, 경위서 읽어보고 놀랬다고. 사과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랬다고. 사건의 발단에 있던 이에게만 사과하면 그대로 다 전해질 거라고 생각했을까?
일이 이 지경이 된 순간에도 생각한다. 내가 넓은 아량으로 그 또라이짓을 이해해줄 수도 있지 않았을까. 대리들은 몰라도 나는 그래야 하지 않았을까. 굳이 윗선에 보고해서 일을 크게 만들지 말고 내가 불러다 혼내고 덮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아니, 그가 사과만 빨리 했어도 금방 해결될 문제였을텐데.
사과하는 게 왜 어려울까 생각했다. 사과를 하려면 우선 잘못을 인정해야 한다. 맨 정신이든 술에 취했든 자신이 실수했음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자존심이 허락을 안 하니 문제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자존심이 그에게만 있는 건 아니라는 거다.
다시 생각해도, 사과에 기술 같은 건 없다. 빠르게 잘못을 인정하고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는 것뿐이다. 그가 침묵을 깨고 하루빨리 사과하기를 바란다. 시간은 계속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