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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ldred Sep 17. 2019

우리 몸에 없는 피

"누나, A와 B 두 사람이 있어. A는 회사 일에 관심도 없고 승진에 대한 욕심도 없어. 일을 잘하지도 못하고 잘하려고 하지도 않아. 회사에서 인정은 못 받는 편이지만 그냥 9 to 6에다가 회식 자리도 1차만 딱 하고 가. 그런데 B는 일에 대한 열정도 많고 회사에서 인정도 받아. 그런데 그만큼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해. 지금 누나랑 내가 받는 정도? 승진에 대해서는 가능성만 있다 할 뿐이지 알 수 없어. 둘 다 월급은 300만 원이라는 조건이고 선택할 수 있다면 뭘 선택할래?"


팀장님과 술 한잔 하고 들어온 동생이 나에게 물었다. A와 B, 그것이 과연 선택을 할 수 있는 문제인가 의심스러웠지만 일단은 고민해보기로 했다. 아주 잠깐 말이다. 동생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나는 알았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B였다. 절대, 결코, 단 한 번도 A처럼 살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지 못할 거였다. 그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나를 정확히 알았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 첫 회사 동기가 나에게 비밀스럽게 이야기 한 가지를 털어놓았다. 새로운 일이 들어오면 좋아하는 너를 처음엔 이해할 수가 없었노라고, 그래서 솔직히 다른 친구들에게 '이상해. 내 동기는 일을 하면서 신나 해.'라고 이야기한 적도 있었노라고. 일하는 걸 좋아하는 동기라니, 얼마나 낯설고 신기했을까.


생각해보면 그럴 만했다. 무려 20년 전, 열다섯 살 때부터 나는 카피라이터가 되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비록 첫 회사가 대기업도 아니고 메이저 대행사도 아니었지만 카피라이터라는 타이틀을 달게 돼서 꽤나 행복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그 일들이 반가울 수밖에. 어쩌면 그때부터 워커홀릭의 기질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첫 회사 동기 말고도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난 절대 너처럼 일 못 할 거라는 이야기는 기본, 나중에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절대 광고는 시키지 않겠다는 이야기, 너는 참 일을 좋아하는 것 같다는 이야기까지. 7년을 다닌 네일샵 원장님도 게 일을 사랑하는 게 느껴진다고, 보람을 느끼는 것 같다고까지 했으니 말 다 했다.


누군들 안 그랬겠냐만은, 12년 차가 되는 동안 마음속으로 수없이 사직서를 내밀었다. 5년 차 때쯤 이 일이 적성에 안 맞는 것 같다며 사수 앞에서 술 취해 여러 번 목 놓아 울기도 했고, 위장약이나 두통약,  링거를 친구 삼아 버틴 적도 많았다. 진짜 이 일은 애증이네, 사람으로 치면 나쁜 남자네 하면서도 끊임없이 광고를 쳐다보고 트렌드에 집착하고 정보를 스크랩하고 있는 걸 보면 사람들의 말을 부정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 같기는 하다.


이번 추석 때 집에 내려가서 동생이 나에게 했던 질문을 똑같이 부모님께 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빠는 "당연히 B 지."라고 했다. "그래도 A는 월급 똑같이 받고 오히려 자기 시간도 가질 수 있는데?"라고 반문하자 아빠는 "A처럼 살면 자기 발전이 없어."라고 덧붙였다. 속으로 역시, 라고 생각했다.


동생은 애초에 나에게 질문하면서 답을 알고 있었다. 내가 뭐라고 이야기할지, 그리고 자신은 A와 B 둘 중 어떤 타입인지.


"너에겐 A처럼 살 수 있는 피가 없어. 우리 남매에겐 그런 피가 흐르지 않아."


그러자 동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알고 있다고 했다. 그래도 가끔은 A를 보며 - A는 실제로 자신의 팀에 있는 선배를 빗대어 이야기한 것이었다. 그 선배가 꼼수를 쓰면서 안 해놓은 일이 있었는데 관련 이슈가 터져서 동생이 팀장과 해결하고 온 날이었다.- 저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하는 마음이 든다고 했다. 주변 사람은 스트레스받을지 몰라도 정작 당사자는 마음이 편하지 않겠냐면서 말이다.


A처럼 살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실제로 A처럼 사는 사람도 있다. 추구하는 가치가 다르고 인생의 무게중심을 다른 곳에 놓았을 뿐 A가 잘못됐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A로 인해서 B나 C, D, E 등등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 말이다.


전에 누군가 나에게, 회사는 어차피 돈을 벌기 위한 공간일 뿐이고 일 역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고 했다. 그러니 동료들에게 마음 줄 필요도, 그토록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도 없다고 했다. 그래, 그 말도 맞다.


안타깝게도, 내 몸에는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피가 흐르지 않아서 앞으로도 못 해먹겠네, 때려치워야겠네라는 말을 버릇처럼 달고 살고 스트레스받고 또 고통받으면서도 더 이상 이 일을 할 수 없을 때까지 하고 있을 것이다. 태생이 그런 건,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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