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우 없는 세계』(백온유, 창비)를 읽고
소설은 ‘나(정인수)’의 현재와, 12년 전 열일곱 시절의 이야기가 교차하며 진행된다. 인수는 6개월 전 한 소년의 자해공갈 현장을 목격한 뒤, (12년 전 그날처럼) 지독한 한기에 시달리고 무시로 귀신들에 둘러싸여 잠을 설친다. 소년을 다시 만나 집에 들임으로써 비로소 한기로부터 해방된다.
작가가 한 인터뷰(https://ch.yes24.com/Article/View/54215)에서 밝히듯이 이 소설은 “테두리 바깥” 청소년들의 이야기다. “지금껏 사랑할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눈을 돌리고 그 세계를 정밀히 묘사한다. 그런 의미에서 주인공 인수의 캐릭터는 인상적이었다. 독자 입장에서 인수는 한껏 몰입하고 성원해 주고 싶은 인물상은 아니다. 아버지의 폭력과 강압에 주눅이 든, 연약해서 쉬이 비겁해지는, 영리하지 않고 존재감이 옅고 눈치 없고 서투른 아이. 아버지의 표현에 따르면, 부족함 없는 환경에서 자랐음에도 ‘없어 보이는’, “비싼 브랜드 옷을 입어도 어딘지 모르게 빈티가” 나는 아이. 그런 이유로 아버지의 분노를 유발하고 마는 아이.
12년 전, 인수는 가정이나 학교 어디에서도 지지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채 가출을 한다. 인수가 만난 아이들 중에는 그 세계의 질서에 야무지게 적응해서 거침없이 비행을 일삼는 성연이 있고, ‘구김살 없어’ 보이고 친절하며 착실히 노동을 하는, 그 세계에서 드문 ‘경우’가 있다. 인수는 그때까지 자신이 엇나갈 수밖에 없는 건 ‘사랑받고 자라지 못한’ 결과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성연이 받고 있는 정도의 사랑과 정성을 받았다면 난 절대로 어긋나지 않았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내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마음을 얻어내려 저렇게 노력했다면, 저렇게 회유했다면, 두말없이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140쪽)
경우라는 특이한 존재는 인수의 믿음에 균열을 일으킨다.
“경우와 지낼수록 나는 궁금했다. 특유의 신중함과 타인을 향한 예의를 과연 누구에게서 배운 것일까. 스스로 터득했다기에 그 태도는 너무도 복잡하고 정교한 기술이었다. 사랑을 받은 만큼 고결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면 나는 납득할 수 있었다. 내가 이 모양이 된 이유가 명백해지는 것이니까. 하지만 경우 같은 존재는 왜인지 불공평하게 느껴졌다.”(101쪽)
인수가 경우를 보는 심경은 복잡하다. 의지하고 닮고 싶으면서도, 상대적으로 자신을 더 초라하게 만드는 그가, “사랑받아본 아이처럼 행동”하는 게 가증스럽고 꺼림칙하다.
“경우를 향한 내 마음을 채반에 받쳐 거른다면 무엇이 남을까. 너무나 많은 불순물들이 섞여 있어 나조차도 내 마음을 제대로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그럴 리 없는데도 가끔 내가 경우를 향한 증오를 숨기고 있는 게 아닌지 진지하게 나 자신에게 물었다.”(228쪽)
그리고 A라는 아이가 있다. 그는 어눌하고 말귀를 못 알아들어 아이들에게 함부로 대해진다. A는 자해공갈이라는 무모한 방식으로 돈을 벌고 인수에게 그 사실을 털어놓는다. 인수는 그에게 친밀감을 느끼면서도 그와 가까워지는 걸 꺼린다. A에게 일어난 사건으로 인수와 아이들은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고, 인수는 그날 이후 환촉과 환시에 시달린다.
인수는 굳세거나 믿음직한 인물이 아니어서, 그의 행보를 따라가는 게 위태위태하다. 사랑을 받지 못해 계속 틀어졌다고 믿은 그의 삶은, 그럼에도 ‘경우의 세계’ 쪽을 향하는 듯 보인다. 그 힘은 어쩌면 경우가 전한 온기,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자책, 저버린 이들에 대한 죄의식, 그 기억을 놓을 수 없어 언제까지고 한기와 귀신에 시달리는, 지극히 여린 마음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