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은 좋아하는데, 세상은 녹록지 않다.
내가 브런치를 시작했을 때만 해도 미술사와 관련된 콘텐츠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요즘은 업계에 베테랑 선생님들도 대외활동을 많이 하고 계시고, 미술사학 전공으로 유학을 다녀온 사람들도 글, 영상 등 다양한 콘텐츠로 세상과 교류하는 것이 종종 보인다. 그래서 내 글은 유익하거나 도움이 되기보다는 모자란 업계 오타쿠의 배설(?)에 다름없으니 읽는 분들은 참고하길 바란다.
사실 이 글은 4년 전의 내가 알 수 없는 영감을 받아 토해낸 글을 4년 정도 숙성된(?) 내가 윤문한 글로, 석사 졸업 후 여러 갈래의 길을 걸으며 느낀 바를 정리한 글이다.
이전 글을 잘 돌아보지 않아서 내가 언급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영국에서 꿈같던 시간들을 보낸 뒤 나는 기업 미술관, 시 소속 문화재단, 상업 갤러리에서 종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직까지 몸 담고 있는 문화예술계 공공기관에서의 깨달음을 아래와 같이 정리하였다.
남들보다 늦게 철이 드는 나는 30대에 갓 접어들었을 때도 세상의 이치를 잘 몰랐다. 마치 히말라야 산 꼭대기에 도달하는 것처럼, 세상에도 정답이 있고 노력을 하면 그것을 이뤄낼 수 있는 구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도 물론 있지만, 대체로 피상적인 미션에만 국한된 것이지 본질적인 삶의 형태는 정답(正答)도 정도(正道)도 없는 것 같다.
이상주의자의 체념이라고 해야 맞으려나? 전공은 전공이고, 삶은 삶이다. 결국 나는 내 전공으로 무언가 대단한 것을 하겠다는 이상적인 생각은 접어두고 현실에 두 발을 딛고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또 한 걸음 뒤에서 바라보면, 결국 내가 공부해서 제대로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고 있기도 하다. 미술사 중에서도 한국 미술사와 문화유산고 관련된 일을 하고 있고, 이를 더 많은 사람들이 향유하고 그 가치를 조금이나마 피부로 느낄 수 있도록 하는 일에 종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꼭 내가 지금 조직에 몸을 담고 있어서가 아니라, 이러한 일은 내가 지나온 모든 조직에서 가능했던 일이지만 내 마음과 정신이 성숙하지 못해서 그것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의 조직으로 오기까지 미술사 전공자라면 으레 거쳐야 하는 계약직, 인턴, 용역(일용근로) 등의 업무의 흐름 속에서 정규직과 계약직의 책임감 정도의 차이에 대해 논하기도 하고, 어느 곳에 속해 있든 결국 버텨내고 참아내고 이겨내는 것이 정답이라는 것을 깨우친 과정에 대한 글이기도 하다.
별 볼 일 없지만 이 전공을 택해도 결국 남들과 같은 과정을 거쳐야 하고, 어쩌면 노동의 대가가 금전적인 현물보다는 감정적인 보람이 더 클 수밖에 없다는 숙명적 한계로 인해 좌절감도 클 수 있음을 경고(?)하는 글이라고 보면 되겠다.
영국에서 돌아온 뒤로, 나는 무언가에 홀린 것 마냥 정신없이 살았다. 2018년에 귀국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2022년도 3개월 남짓 남은 오늘이었다.
30대가 되면 인생을 진지하게 살아야 될 것 같은 막연한 느낌이 있었고 20대에는 꼭 카페 아르바이트를 해봐야 한다는 작은 일념으로 2018년 8월 한국에 오자마자 20대 후반 늦은 나이에 스타벅스에서 바리스타로 일을 했다. 꼭 해보고 싶은 일이기도 했고 늘 하던 일과 달라서 재미가 있었던 탓인지 3개월 만에 오픈, 마감 등 모든 것을 배우고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어서(?) 미련 없이 퇴사를 했다.
이유 없는 퇴사는 아니었다. 나에겐 논문이라는 큰 난관이 눈앞에 늘 아른거렸고 직장도 없는 내가 논문마저 늦어지면 마치 직무유기를 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 데다가 취업 시장에서 영원히 뒤처질 것만 같아 무서웠다. 지금 돌이켜보면 참 짧고 찬란한 시간이었는데, 그때는 뭐가 그렇게 불안하고 초조했는지 늘 쫓기듯 살았던 것 같다.
그렇게 스타벅스를 나온 뒤, 2019년 상반기는 논문을 쓰며 6개월을 온전히 연구에 할애했고 그 시간이 소중했다.
가난을 벗 삼아 연구하는 백수로 부모님의 핍박을 간간히 받았지만 자료를 천천히 살펴보고 내 속도에 맞춰 글을 쓰며 가족과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좋았다. 뿐만 아니라 지금은 떠나고 없는 우리 집 강아지와 원 없이 놀아줄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고, 그때가 아니었으면 더 잘해주지 못한 게 늘 생각나서 후회되었을 것 같다. 아무튼 다행히 1년 반의 시간 동안 미루며 미루던 논문을 6개월 동안 바짝 집중한 덕에 2019년 상반기에 마무리를 짓고 졸업할 수 있었다.
졸업과 동시에 우연히 아트허브에서 모집 공고를 보고 지원한 기업 미술관에 계약직 학예보조로 입사했다. 아무쪼록 공백이 없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는 운이 좋았던 것 같다. 하지만 계약직이라는 신분 때문에 항상 불안했다. 일은 즐거웠고 사람들이 좋았지만 알 수 없는 압박과 불안이 늘 공존했다.
‘이렇게 안정적인 소속이 없이 30대가 되면 어떡하지?’
‘이 월급을 받고 늙어서까지 살 수는 있을까?’
‘보조만 하다가 내 이름을 걸고 프로젝트 하나 못해보는 건 아닐까?’
'나는 그럼 대체 이 전공으로 왜 대학원까지 나온 걸까?'
그렇게 정규직이 되기 위해 숱하게 많은 시험을 치르고 몇 개 없는 월차를 쪼개 면접을 보러 다녔다. 심지어 당일치기로 제주도를 다녀올 만큼 그때의 난 굉장히 절박했던 것 같다. 으레 모든 취업준비생들이 그러하듯.
1년의 준비 과정을 거쳐서 드디어 시 소속 문화재단에 정규직으로 입사하게 되었다. 순진했던 나는 '정규직!'이 되었기 때문에 이제 그간 쌓아온 모든 숙원이 해결될 줄 알았다.
설렘과 기대도 잠시 뿐이었다. 물론 정규직이라는 직함이 가져다주는 다양한 복지, 안정성, 승진에 대한 기대감 등 많은 것들이 참 감사하게 다가왔다. 그러나 모든 것은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지듯 정규직 자리는 자유로운 영혼인 내게 마치 족쇄와도 같았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끝을 바라보며 버텨내고 그 순간 최선을 다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주어진 시간 동안 나를 성장시키고 내가 기여한 긍정적 변화들이 보람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그 시간을 더 소중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규직 자리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얻는 것이 많아진 대신 책임이 훨씬 커졌다. 까놓고 말하면 계약직 시절과 그리 큰 급여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처음 정규직을 달았을 땐 숙원 사업이 해결되었다는 안도감은 이내 사라지고 전공과 맞지 않는 일에 흥미를 느낄 수 없었던 것을 물론이었다. 또 무거운 분위기와 특유의 권위의식, 계약직과 일용직을 차별하는 태도에 환멸감과 신물을 느껴 첫 정규직 회사에서 일찌감치 퇴사를 해버렸다.
유독 그 회사와의 케미가 맞지 않아서였는지 몰라도 다니는 동안 역대 최악의 장마를 경험하며 난생처음 가보는 동네로 2시간 넘게 출퇴근하는 것이 너무나도 지옥 같았다. 그 어느 한순간도 좋았던 적이 없다.
두 번째 정규직은 첫 정규 직장을 3개월 만에 때려치우고 이직한 상업 갤러리였다. 조금은 전공과 맞닿아 있어 재미가 있었고 좋은 동기를 만나 삶을 대하는 긍정적이고 멋있는 태도도 배울 수 있었다. 참 감사한 인연이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직장으로써 바랄 수 있는 것들을 얻지 못했고 소모적인 느낌이 컸다. 공부를 더 하든 근무 조건이 나은 회사를 가든 나 자신에게 더 많은 욕심이 났기 때문에 이곳 역시도 1년 후 퇴사를 했다. 게다가 말만 정규직이지 계약직 시절과 달라진 건 4대 보험뿐이었다. (갤러리가 그렇지 뭐)
서론이 길었지만 지금 직장에서 난 용기와 포기를 배웠다.
이곳은 너무나도 특이한 곳이었다. 물론 지나온 모든 조직이 특이했고 각자의 이유로 참 많은 배움을 얻을 수 있었던 곳들이지만 이번은 정말 너무 이상했다. 어쩌면 그토록 내가 20대 내내 피해왔던 가장 "한국다운 회사"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문화예술계 기준, 다른 산업에서는 더 심한 곳도 많으니까 이 정도면 양반이라 할지도 모르겠다.)
모두가 맹목적으로 경도되어 있고, 바깥은 바라보지 않으며, 진짜 경쟁해야 될 외부에는 아부하며 내부에서 갈등했다. 많은 사람들 속에서 어른다운 어른은 찾아보기 어려웠고 사사로운 욕망과 탐욕이 난무했다. 여러 동료가 상처받는 걸 목도했고 누군가 배불리 실적을 자랑할 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누군가는 상처받고 힘들어했다. 어쩌면 이게 조직의 민낯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회 정치에 약한 나는 쉬이 상처받게 될 약자 중 하나였다. 그나마 둔감한 탓인지 혹은 눈앞에 주어진 것을 해결해야 한다는 이상한 집착이 강해서인지는 몰라도 입사 당시에는 몰랐지만 그때 나에게 주어진 의무는 돌이켜 생각해 보건대 학대에 가까웠다고 생각이 든다. 내가 조직적이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에라도 나의 관점에서 본다면 저 단어만큼 명쾌하게 나의 상황을 설명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정말 매일이 숨 막히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매일 나는 ‘내가 망칠 거야’, ‘왜 내가 이걸 다 해야 하지?’, ‘도대체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수는 왜 없지?’, ‘나 혼자 회사를 운영해도 이거보단 낫겠다.’라는 의문으로 하루를 마무리했고 나에게 모든 것을 던져놓은 사람들에 대한 분노로 잠을 설쳤다. 하다못해 같은 사무실에 있는 어른들도 훗날 내가 주어진 바를 수행하지 못하고 망칠까 봐 걱정했었다고 후기를 쏟아냈었는데 그게 참 어처구니가 없게 들렸다. 그럼 그때 좀 도와주지!
의지하고 기댈 곳은 없었다. 오로지 나 하나뿐이었다. 내가 머리를 더 빨리 쓰고, 내가 더 오래 남아 잔업을 하고, 내가 더 열심히 외부와 소통하며 고집스러운 사람들을 설득해야 했다. 피로도는 쌓여만 갔고 모두가 원망스러웠다. 내 특유의 회피 감성이 이따금씩 솟구쳐 올라왔고 또다시 퇴사를 염불 외듯 외고 다녔다.
하지만 언제까지 힘들고 어렵다고 피하기만 해야 하는 걸까? 나와 가장 가깝던 내 친구가 이제는 불안함과 어려움, 예측할 수 없는 것들을 대면해야 될 때라고 따끔하게 말해주었다. 그때 나는 정신을 차렸다.
주어진 바를 해내고 행사가 열릴 때까지는 최선을 다 하겠다고. 그리고 내가 손 쓸 수 없었던 부분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인정하고 내 책임범위를 명확하게 윗선에 보고하고 이야기하고 나를 지키는 과정을 연습했다. 이전에는 경험해보지 못한 일들이기에 용기가 필요했고 내가 포기할 수 있는 것들을 빨리 인지하고 깨우칠 수 있는 혜안이 필요했다. 그렇게 수없이 많은 용기가 필요한 순간들이 나에게 찾아왔다.
그동안에는 '조금만 더 참으면 계약이 만료니까', '그래도 이직을 하면 되니까'와 같은 핑계로 어려운 상황을 회피해 왔다. 그런데 매번 도전에 맞닥뜨릴 때마다 그렇게 도망만 다닐 수는 없었다. 용기를 내어 이겨내고 포기할 것들을 버려가며 이 악물고 버텨낸 시간들의 결과는 보람과 뿌듯함 따위의 따뜻한 감정이 아니었다. 결국 용기와 포기의 끝에는 실패든 성공이든 결과가 있었고 그 결과는 세상에 대한 원망, 체념과 함께 자기 효능감과 자기 확신을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 확신은 앞으로 무슨 일을 하더라도 (이것도 이겨내었으니) '나는 할 수 있다'라는 믿음을 심어주었다.
이 정도 깨달음은 아마 더 치열하고 경쟁적인 사기업이나 다른 업계에 몸 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애진작에 20대 때 깨우쳤을 생각이겠지만, 아름다운 미술사를 추구하며 세상을 이상적으로만 바라보았던 나는 참으로 늦게도 얻게 된 것 같다.
결론적으로 미술사를 전공하고 멋있고 폼나게 박물관에서 국보를 만져가며 일하게 될 줄 알았지만 그 바늘구멍도 (아직?) 통과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통과할 마음이 생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실제 유물이 아니어도 관련 콘텐츠를 다루며 본질적으로 비슷한 일을 하는 곳에서 꿋꿋하게 잘 살아가고 있다.
영화 <도굴>(2020)에 나오는 배우 신혜선처럼 멋들어진 큐레이터는 못되었지만 어느 한 곳에서 아등바등 버텨내고 있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또 몇 년 뒤에 나는 다른 곳에 가게 되어 새로운 글을 쓰게 될지도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