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어스름한 새벽녘. 창 너머에서 들려오는 동네 어르신의 비질 소리에 눈을 뜬다.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식물에 물을 준 후, 차분히 출근 준비를 한다. 일터로 나가는 길, 현관문을 열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옅은 미소를 품고, 그렇게 오늘도 히라야마 씨의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다.
지난 2023년 칸영화제 수상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부터 기다려온 영화 <퍼펙트 데이즈 Perfect Days>. 영화의 내용조차 정확히 모른 채였지만, 루 리드의 《 Perfect Day 》를 배경음악으로 한 짧은 트레일러만으로 ‘이 영화는 나의 인생 영화가 되어주겠구나’하고 느꼈다. 이후 두 차례의 관람과 씨네토크를 거쳐, 나는 <퍼펙트 데이즈> 속 히라야마 씨와 같이 인생을 살고파졌다.
그렇게 마음에 든 영화를 글로 써 내리기란 쉽지 않다. 하고픈 이야기가 너무도 많기에 어디서부터, 무엇을, 얼마나 풀어내면 좋을지 고민하다 시간이 흘러 버린다. <퍼펙트 데이즈>에 대해서도 함께 나누고픈 이야기가 너무도 많다. 그렇기에 이번 영화는 두 편에 나누어 써보고자 한다. 오늘은 영화에서 느낀 삶에 대해, 다음은 영화의 안과 밖에 대해 다루어보고자 한다.
*본 게시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 포스터와 어른의 따스한 웃음, 어린아이와 같은 눈을 지닌 히라야마 씨의 모습. (C) 한국 배급 티캐스트
<퍼펙트 데이즈>의 주인공 히라야마 씨는 일본 도쿄의 화장실 청소부다. 누군가에게는 더럽게 치부 받는 일을 그는 누구보다 섬세하게 수행한다. 일이 끝난 뒤에는 동네의 대중탕에 들러 뜨끈하게 몸을 담근다. 그러고 나면 단골 음식점에서 맛난 밥에 술 한 잔을 즐긴다. 자전거를 유유자적 타고 집으로 돌아와 잠이 들기 전까지 스탠드 조명에 책을 읽는다. 히라야마 씨의 하루는 이렇게 흘러간다.
얼핏 보면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하루하루인 양 보인다. 하지만 그런 매일을 살아가는 히라야마 씨는 언제나 호기심 가득한 어린아이만 같은 눈망울을 지니고 있다. 매일 반복되는 루틴의 시작에서도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미소 짓는다. 업무 중 잠시 틈이 날 때면 멍하니 시간을 죽이는 대신 하늘과 햇살, 나뭇잎과 그림자를 빛나는 눈동자로 살핀다. 점심이면 공원에서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필름 카메라로 담으려 두근거린다. 영화 전반에서 히라야마 씨의 대사 비중은 매우 적을 정도로 그는 묵묵하고 담백한 사람이다. 하지만 매 순간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어린아이처럼 모든 것이 새롭고 흥미진진한 듯 보인다.
"다음은 다음. 지금은 지금." 히라야마 씨는 미래를 쫓기보다는 현재의 소중함을 느끼며, 매 순간에 진심이었다. (C) 한국 배급 티캐스트
히라야마 씨의 화장실 청소는 매일같이 반복된다. 깨끗하게 만들어도 다른 누군가로 인해 쉽게 더러워진다.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완성되는 청소라는 행동은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일로 치부되기도 한다. 이런 반복적인 삶을 두고 히라야마 씨의 어린 후배는 “아무도 보지 않는 데 뭘 그렇게 깨끗하게 해요”라고 한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이 일은 어쩌면 시지프스의 형벌*과 같을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는 구토를 느끼는 반복적인 삶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히라야마 씨는 그런 일상에서 오는소중함을 잃지 않았으며, 자신의 하루하루가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시지프스의 형벌 :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 신에게 대든 시지프스가 받은 벌로 무거운 바위를 다시 굴러떨어질 수밖에 없는 산꼭대기 위로 올려야 한다는 무의미하고 끝나지 않는 형벌.
반복되는 양 보이는 히라야마 씨의 삶은 어느 하루도 같은 날이 없었다. 주변 사람들과 새로운 사건들이 더해져 매일 다른 하루가 완성된다. 하루는 누군가로 인해 상처 입었다면, 그다음 순간 놓치고 지나갈 뻔한 작은 배려가 그 하루를 구원한다. 하루는 쉴 틈 없이 바쁘게 보내야만 했다가도, 어떤 날은 느지막이 오후의 햇살을 즐기며 눈을 뜨기도 한다. 어느 하루도 같은 날은 없었다. 그저 매 순간의 소중함을 잊은 채 흘려보내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하지만 히라야마 씨의 하루를 결정하는 건 결국 그 자신이었다. 동료도, 가족도,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모두 시간이 흐르면 멀어져가는 등장인물일 뿐이었다. 그들이 그를 웃음 짓게 하고, 화나게 하고, 눈물 흘리게도 만들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결국 그의 하루를 결정하는 건 그 자신이었다. 마치 수행 중인 수도승과 같이 빗자루질 소리에 일어나 이불을 켜고, 식물에 불을 주며, 일터로 향하는 문을 열어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 자신.
누군가는 이런 반복적인 하루의 괴로움에 몸부림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스쳐 지나가는 타인이 미친 영향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히라야마 씨는 그런 하루하루에서 새로움을 찾았으며,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거부하지도 이에 매몰되지도 않았다.
우연히 지나쳤을지도 모르는 작은 소중함을 발견한 행복은 과연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까 (C) 한국 배급 티캐스트
‘코모레비 木漏れ日 : 나뭇잎 사이로 비친 햇살을 칭하는 일본어’
번아웃이 올 정도로 무언가에 지나치게 몰두해 삶을 놓쳐본 사람이라면 느껴본 적 있을 것이다. 문득 올려다본 하늘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평일 오후가 얼마나 평온하고 조화로운지, 나뭇잎 사이로 비친 햇살이 얼마나 눈부시게 빛나는지. 그러고는 깨닫게 된다. ‘아, 삶에서 내가 모르는 채 흘려보낸 아름다움이 너무도 많구나.’
히라야마 씨에게 나뭇잎 사이로 비친 햇살, 코모레비는 그런 역할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코모레비를 사랑함과 동시에 이를 의식적으로 찾으려고 하는 모습 또한 보인다. 그는 점심시간이면 공원에 앉아 간단히 끼니를 때우며 코모레비를 바라본다. 그러다 품에서 필름 카메라를 꺼내 그 빛을 필름에 담는다. 휴일이면 그렇게 채운 필름을 현상하고, 다음 필름 롤을 카메라에 채운다. 방에 있는 연월이 쓰여 있는 사진 상자에는 그가 매달 찍은 자연의 사진으로 가득하다. 평일 점심이면 코모레비를 찍고, 휴일이면 그 사진을 현상하는 그만의 반복적인 루틴. 이는 어쩌면 그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만든 삶의 빛을 찾는 여정일지도 모르겠다.
히라야마 씨의 밤과 휴일 낮. 그는 해야 할 일과 하고픈 일을 적절히 섞어 온전한 하루를 보내고 있다. (C) 한국 배급 티캐스트
‘퍼펙트 데이즈’, 완벽한 나날이란 무엇일까? 완벽한 삶이란 무엇일까? 사람들은 종종 누구나 꿈꾸는 삶을 사는 이를 보고는 ‘완벽한 삶, 영화 같은 삶’을 산다고 한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우리의 생활에서 나는 많은 소리는 마치 영화 속 효과음만 같고, 낮의 햇살과 밤의 전등 빛은 영화 속 조명만 같다. 우리의 삶도 히라야마 씨의 하루하루처럼 매일 반복되는 듯하지만 다른 일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거기에 주인공 외의 등장인물이 나타나 새로운 영향을 주고, 매일 다른 사건들이 더해져 삶이라는 장편 영화가 상영된다. 그렇게 우리 삶의 단편은 비슷한 듯이 다르게 빛난다. 마치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바람에 따라 매초 달라지듯이.
“바쁜 삶에서 한 걸음 벗어나 이를 바라보는 계기가 되어주었으면 합니다.” - 2024.07.21. <퍼펙트 데이즈> 씨네토크에서, 야쿠쇼 코지 배우 -
삶이란 화면 전환 없이 롱테이크로 진행되는 장편 영화와도 같다. 그런 영화 속에서 지루함을 느끼기란 십상이며, 24시간을 기준으로 반복되는 듯한 일상에 무의미함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런 삶 속에서도 매 순간의 소중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건 모두가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가장 쉽게 잊어버리는 삶의 교훈이다.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그러니 <퍼펙트 데이즈>가 부디 당신이 하늘을 한 번이라도 더 올려다보고, 바람에서 느껴지는 풀냄새를 한 번이라도 더 만끽하고, 사랑하는 이의 미소를 한 번이라도 더 바라보는 하루를 보내는 데 힘을 보태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