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영미권에서는 햄릿과 햄넷을 혼용하고는 했다’
영화에 대한 아무런 정보 없이 영화관을 찾는 행위는 우연히 나의 삶에 밀어닥쳐와 세계를 흔들고 마음을 헤집어놓는 작품을 만나기 위해서다. 삶의 모든 만남이 우연이자 필연으로 이루어지듯 말이다. 사랑에 빠질 때는 서서히 저도 모르게 스며들기도 하지만, 반대로 마치 사고가 나듯 들이 받히는 때도 있다고 하지 않는가. 그렇게 준비가 되지도 않은 채 맞닥뜨린 작품은 더 크게 부딪혀버린다. 많은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는 3월. 겨울의 끝과 봄의 시작에서 마주한 영화 <햄넷>은 후자에 가까웠다. 아무런 준비 없던 이에게 잔잔한 바다인 양 굴더니 한없이 빠르게 밀려와 거대한 파도가 되어 덮쳐왔다.
제9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 무려 8개 부분에 노미네이트 된 영화, 제83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 2개 부문에서 수상한 기록을 남긴 영화. 제목이 셰익스피어의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햄릿>과 유사한 영화. 그 정도의 정보만을 가지고 영화관을 찾았다. 영화 <햄넷>은 제목에서 쉬이 떠올렸듯 <햄릿>과 연관되어 있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참으로 치사하다. 영화는 햄릿인 척하는 햄넷이었다가, 그 모든 것이 알고 보니 햄릿이자 햄넷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 영화는 기대와 예상을 품고 들어온 관객이 이를 내려놓게 만들고는 마지막에 이르러 햄넷과 햄릿이라는 비극에 잠기게 만든다.
* 다음의 글은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인에게 시공을 넘어 사랑받는 희극과 비극을 낳은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그의 작품은 몰라도 적어도 그의 이름은 들어보지 않았을 수 없다. 사람들은 셰익스피어를 논할 때 그의 4대 비극과 5대 희극만을 얘기한다. 특히 한국에서는 아이러니할 정도로 그의 삶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는다. 그러나 이는 어쩌면 그의 작품이 지니는 가치만을 논하기에도 시간과 언어가 부족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한다. 외국에서도 별반 다를 바는 없다. 그의 작품은 영화로도 무수히 재탄생했으나, 그의 삶을 다루는 영화는 거의 없다. 그런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그의 작품 <햄릿>의 탄생기를 실화에 각색과 상상을 덧대어 엮어낸 영화가 <햄넷>이다.
셰익스피어는 실제로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그 아들의 이름은 햄넷으로 11세의 어린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그 외 가족사는 상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그렇기에 영화 <햄넷>은 셰익스피어와 그의 아들 햄넷(Hamnet)의 이름이 <햄릿(Hamlet)>과 유사하다는 점으로부터 시작된 소설 『햄넷』(2020)을 바탕으로 한 가상의 이야기다.
흥미로운 건 희대의 극작가 셰익스피어와 그의 명작 <햄릿>의 탄생기라는 소재를 가지고 영화는 아내인 아녜스를 중심으로 전개된다는 점이다. 윌이라고 애칭으로 불리던 남편의 본명인 ‘윌리엄 셰익스피어’라는 이름은 영화의 후반에 들어서야 등장한다. 따라서 영화 정보를 제대로 찾아보지 않고 간 이로서는 해당 장면에 들어서야 드디어 윌이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맞았음을 깨닫게 되고, 뒤이어 해당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이 비극에 빠져들게 한다.
셰익스피어의 극 <햄릿>은 아버지를 잃은 왕자 햄릿이 타락한 어머니와 아버지를 독살한 숙부에 대한 증오, 위기를 마주한 나라, 자신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한 연인 오필리아에 대한 죄책감과 슬픔 속에서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는 이야기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명대사를 남긴 희대의 비극이기도 하다. 그런 작품을 영화 <햄넷>은 전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영화 <햄넷>은 중후반부까지 가족의 삶을 중점적으로 그린다. 연인의 시작으로부터 가족의 탄생과 찰나처럼 지나간 포근한 삶, 뒤이어 드리워진 기나긴 죽음을 담는다. 영화 초반 묘하게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던 숲 속 나무 아래의 어두운 굴, 고요를 깨는 풀벌레 소리, 일정하지 못하게 떨어지는 빗소리가 영화 전반에 스산함을 더한다. 아름다우나 어딘가 불안하고, 따뜻하다가도 이내 서늘하게 만든다. 영화 내내 관객을 불안하게 만들던 숲 속 나무 아래의 어두운 굴은 이내 영화 속 <햄릿> 극의 무대 위 벽에 난 문, 삶과 죽음의 경계가 되어 영화 속 가족의 삶이 <햄릿>을 탄생시켰음을 보여준다. 그렇게 <햄릿>은 전혀 다른 이야기로 다가온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가혹한 운명의 화살을 맞고도 죽은 듯 참아야 하는가.
아니면 성난 파도처럼 밀려드는 재앙과 싸워 물리쳐야 하는가.
- <햄릿>에서 -
영화와 같은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없겠으나, 셰익스피어는 분명 아들을 잃는 비극을 살아냈다. 그리고 4대 비극과 5대 희극을 탄생시켰다. 왜 인간의 삶에는 늘 희극과 비극이 함께할까. 왜 빛에는 늘 어둠이 따르는 것일까. 그렇게 영화는 제시 버클리(아내 아녜스 역)를 통해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슬픔을 쏟아냄으로써 삶의 비극에 한탄하게 만들다가도 이내 그가 극 <햄릿>을 통해 삶의 빛을 찾게 한다.
영화 <햄넷>에서 셰익스피어는 극 <햄릿>을 탄생시킴으로써 아들 햄넷의 죽음을 살아낸다. 예술은 셰익스피어와 그녀의 아내가 어둠으로부터 살아남을 기회를, 햄넷을 햄릿으로서 살아있게 할 기회를 주었다. 인간은 삶의 고통을 예술로써 승화함으로써 예술가가 되고, 그렇게 탄생한 예술을 통해 또 다른 이들이 치유받는다. 영화 속에서는 그렇게 셰익스피어가 고통으로 탄생시킨 <햄릿>을 통해 아내가 셰익스피어의 슬픔을 이해하고 마침내 아들과의 이별을 온전히 받아들이게 된다.
‘삶이 어려울 때는 이를 극복하기 위한 이야기를 만나게 된다’라고 믿는다. 그렇기에 우연히 만난 영화 속 이야기에서 삶을 살아낼 용기를 얻고, 다른 누군가에게 필요한 영화가 닿을 수 있기를 바라며 영화를 글로 쓴다. 그렇게 과거의 내가 쓴 글이 때로는 미래의 내게 닿기도 하고 말이다. 그렇게 영화 속 이야기가 우리의 삶 속 희극은 더욱 빛나게 하기를, 비극은 서서히 떠나보낼 수 있게 돕기를 바란다.
영화 <햄넷 Hamnet> (2026)
감독 클로이 자오
출연 제시 버클리, 폴 메스칼
* 궁금하실 분들을 위해 추가하자면 위에서 언급한 해당 영화의 노미네이트와 수상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 제98회 아카데미 시상식 8개 부분(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각색상, 캐스팅상, 미술상, 의상상, 음악상) 노미네이트, 제83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 2개 부문(작품상, 여우주연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