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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묻지마대학생 Oct 04. 2023

타고난 목적이란 증명할 수 없다.

# 인생의 목적성 # 타고난 게 중요할 거란 생각을 버려

나는 대학생이다. 지금껏 배웠던 것에 크게 감흥을 느끼지 못했던 대학생이다. 내가 공부했던 것으로 진로를 설계할 줄 모르는 대학생이다. 전공 서적 속 개념들은 종종 내게 세상을 바라보는 흥미로운 관점을 제시해 줬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나는 지금까지 보고 듣고 미약하게 익힌 지식이나 아이디어들을 재료로 이야기를 써나갈 것이다. 내 이야기는 사실과 거짓을 증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과학적 글쓰기가 아닌 소설에 가까울 것이다. 나의 글을 읽을 누군가에게 재밌게 읽으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딱 거기까지만 바란다. 나는 남에게 무엇을 떳떳하게 설명할 만큼 아는 것이 많지 않다.

 



 요즘 내가 단단히 꽂혀 생각했던 문제가 있는데 누구나 생각해 봤을 법한 '사람은 타고난 목적이 있는가?'이다.

'인생의 목적성'이라고 부를만한 이 문제에 대해 나름 생각하며 알게 된 점은 이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반드시 짚고 넘어갈 부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바로


사람이 어떤 목적을 타고나는지 혼자서는 밝힐 수 없다는 점이다.
 

 만약 혼자서 인생을 설계한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 사람이 자신의 계획대로 움직였고 알맞게 성취했다면 그 사람은 목적대로 살아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본인이 인생에 부여한 목적이 타고난 목적이란 보장은 없다. 아무리 세세하게 자신의 바람과 염원을 담아 목적을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그 목적이 이뤄지길 타고난 것이란 증명은 불가능하다.


 인생의 목적성을 밝히기 위해선 누군가가 필요하다. 정확히는 나 이외에도 내가 살아왔던 삶과 똑같은 살아온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 누군가와 함께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논의했을 때 공통적으로 단 하나의 삶의 목적이 있음을 알게 된다면 비로소 그것을 본인이 타고난 인생의 목적이라고 확증할 수 있다. 왜냐면 나와 같은 삶을 살았던 모든 사람들에겐 앞으로 두 가지 이상의 목적이 존재하지 않다는 것이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미래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과거에도 단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살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로서 목적이 선택의 영역이 아닌 타고남의 영역이란 뜻과 동일하단 걸 밝힐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찾고자 하는 이상적인 누군가가 존재하더라도 그를 어떻게 찾을 것이며 그가 나와 같은 삶을 살았다는 걸 확인해야 한다는 문제가 남아있다. 세상에 많고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정말 운 좋게도 그 사람을 만났고 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에게 지난날들을 이야기해 달라고 부탁해 볼까? 좋다. 내게 그에게 아무런 정보를 밝히지 않은 채 그의 인생 얘기를 잠자코 듣는다고 가정해 보자. 듣다 보니 놀랍게도 내가 살아온 삶과 동일한 과정을 밟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그에게 어떤 말을 해야 그 역시 내가 그와 같은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을까? 단순히 "와! 저도 당신과 동일한 삶을 살았어요!"라고 확신에 찬 듯이 대답하면 될까? 그가 나의 속내를 꿰뚫어 볼 수 있는 눈이 있다면 가능하다. 그랬다면 그는 내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나의 마음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허무맹랑한 소리이고 이미 그의 정보를 알고 있는 이상 나는 얼마든지 그의 이야기를 알맞게 편집하여 그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만들어 낼 수 있기에 그에게 신뢰를 주기엔 적절하지 않다.

 

 앞선 방법이 부적합했던 이유는 나와 그가 각자에 대한 정보를 밝히는 과정이 동시에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어느 시점 이후부턴 둘 사이에 정보의 불균형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서로 종이에 자신의 인생에 대한 글을 작성하고 이를 동시에 교환하면 된다. 물론 태어나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생사를 빠짐없이 서로 적는 건 가능하지 않다. 사람에겐 누구나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홀로 간직하고 있는 기억이 있을 것이다. 이것과 함께 대체로 일관성 있는 삶의 이야기를 최대한 적어낸다면 서로가 동일한 삶을 살았으리라 신뢰할만할 것이다.




 이제 서로를 애타게 찾던 두 사람은 그들이 그토록 알길 원했던 인생의 타고난 목적이 있는지 혹은 없는지를 밝힐 수 있을까? 이 둘이 만나기 위해 매우 이상적인 상황만 생각했던 것을 차치하고 말이다.


나의 대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내가 이렇게 대답할 수 있는 이유는 단순하다. 동일한 인생을 살아온 두 사람은 서로 동일한 사고방식을 가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본인들이 서로에게 앞으로의 삶의 계획이나 목적이랍시고 대답하는 것이 설령 아무런 타고남이 없고 삶의 과정에서 제조한 것에 불과하더라도 둘의 대답은 동일할 수밖에 없다. 둘은 신나 할 것이다. "삶에는 타고난 목적이란 게 있었던 거야!" 어쩌면 그들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하지 못한 채 본인들의 그 타고난 인생이란 걸 소중히 여겨 힘차게 살아간다면 그것이야 말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들의 행위는 거울 보고 말하기에 불과하다.


 문제는 원점으로 돌아왔다. 혼자서는 인생의 타고난 목적을 논할 수 없어 나와 동일한 삶을 살아온 누군가를 찾다고 운 좋게 만났다 하더라도 결국은 혼자 생각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슬을 깰 수 없다면 우리는 아무런 답도 얻을 수 없다.


그리고 단언컨대, 사슬은 끊을 수 없을 것이다.




 위의 생각들이 내가 도달한 자그마한 결론이다. 사슬을 끊을 수 없다니. 부정적으로 들리는 이 결론은 내 머릿속 구석에 엎어져 누워있어 빈둥대지 않지만은 않았다. 고맙게도 내가 또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도록 권장해 주었던 것이다.


인생의 타고난 목적을 굳이 문제 삼지 말자. 타고난 목적이 있든 그렇지 않든.


 왜냐면 나는 죽기 직전까지도 나의 생명이 꺼지지 않도록 부단히 에너지를 주입해 주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끊임없이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생명을 가진 존재는 안타깝게도 언제까지고 정적인 상태로 머물 수는 없다. 살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짓이 불가피하다면 나는 내가 가급적이면 목적을 가지고 행동하길 원한다. 그러니 목적이 타고났는지 아닌지는 남은 인생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다.


 무언가를 타고나야지만 좋아할 것인가? 무언가를 타고났다고 인정받아야만 만족할 것인가? 나는 내가 원하는 만큼 타고나지는 않았기에 앞으로 그 빈자리를 악착같이 만들어 가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이를 알고 있으니 내가 할 일은 정해졌다. 이제는 그만 놓아주자. 인생의 사슬이니 운명이니 하는 달콤하기도 씁쓸하기도 하지만 내 눈엔 보이지 않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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