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묻지마대학생 Oct 04. 2023

사람은 환생할 수 없다.

# 이원론 # 유물론 # 로지스틱 곡선 # 영혼 # 환생

 고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배우는 대부분의 것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내가 이 과목만큼은 다음 시간이 기다려진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윤리와 사상'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세상을 바라보는 독특한 관점에 관심이 많았다. 반대로 나는 보통 사람들이 평생에 걸쳐하는 고민에는 관심이 없었는데 예컨대 진로, 돈, 안정적인 삶 같은 것이다. 이런 것의 중요성을 내가 더 이상 캐묻지 않을 만큼 합당한 증거를 들어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는 어른들이 없어서였을까. 내 눈엔 제대로 알지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이것이 맞다는 식의 주장들이 세상에 많이도 퍼져있다는 걸 어릴 적부터 직감했던 것 같다. 이제 와서 돌이켜 보면 '윤리와 사상'을 재밌어했던 것도 참 나답다고 생각한다. 철학자들이 자연과 사회와 인간들 내부에서 벌어지는 자그마한 현상이나 사건들도 호기심이란 돋보기로 크게 확대하여 보며 아주 자잘한 부분까지도 나름의 의견을 덧대는 모습이 나는 재밌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도 세상과 인간을 보는 여러 사상에 나의 호기심은 유지되었다. 그러던 차 최근 나는 오래전부터 다양한 의견이 제시 돼왔던 한 논제를 접하게 됐는데 바로 영혼의 존재에 대한 문제이다.




 우리는 육체를 자신의 것으로 소유한 채로 살아간다. 그리고 우리는 생각하고 느끼고 심지어는 자기 자신에 대해 인지할 수도 있다. 사람의 특이한 성질 중 하나가 의식을 가진다는 점인데 이덕에 자신이 '직접' 육체를 움직인다고 여길 수 있고 자신이 '직접' 생각하고 있다고 여길 수 있다. 우리는 행위자인 동시에 스스로에 대한 관찰자인 셈이다. 이 지점에서 질문 하나를 던질 수 있다.


몸을 다스리고 생각을 통제하지만 몸과는 독립적인 영혼이 존재하진 않을까?


 이런 질문은 자연스럽다. 왜냐면 자연현상을 원인과 결과로 해석하려는 역학적 사고가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바람이 불기 때문에 바람개비가 돌아간다. 중력이 있기에 돌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이런 식의 논리를 사람에게 적용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영혼이 있기에 몸과 생각을 통제할 수 있다.


 그러나 명제가 의미 있기 위해서는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밝혀낼 필요가 있다. 16세기 철학자 데카르트는 사람을 서로 독립적인 영혼과 육체로 분리하여 생각하는 이원론을 주장했고 동시대의 철학자 토마스 홉스는 정신은 육체의 작용이며 영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유물론을 주장했다. 당시 각자 나름의 주장에는 근거가 있었는데 오늘날의 과학은 뇌의 1000억 뉴런의 상호작용이 인간의 복잡한 정신을 만든다는 쪽으로 의견을 굳히는 것 같다. 즉, 영혼은 육체의 작용으로 생성되는 종속적인 개념이라는 것이다.


 나는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영혼의 근원이 육체를 구성하는 세포 단위의 상호작용이라고 하더라도 내가 경험하는 세계는 세포의 존재를 망각할 만큼 거시적이다. 이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의 탄생 과정이 배아의 세포 분열이었지만 그곳에 나의 정신은 없었다. 그러다가 세상에 나왔을 어린 나는 어느 순간 말 그대로 정신을 차렸을 것이다. 살아있는 동안의 나의 세계는 나의 정신이 관측하는 바로 그 세계이며 나의 세계는 유일하다. 그런 내가 죽음을 맞이하고 육체가 제 기능을 하지 않아 과학이 말하는 대로 정신 기능이 소멸된다면 나의 유일했던 세계는 없어진다고? 이는 이해하기 쉽지 않다. 내가 아는 세상이 실은 살아있는 날 동안에만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한시적이라는 생각. 돌연 무서움을 느낀다.


 여러 종교들은 '사후'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사후 세계가 되었든 환생이 되었든 내 정신은 소멸되지 않고 언젠가 또 다른 세상을 마주할 수 있으리란 가능성을 남겨둔다. 이는 위안을 주는 동시에 나를 영혼에 대해 좀 더 고민하도록 만들었다.


 과학은 검증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한 답만 제시할 수 있다. 문제 삼을 수 있는 대상이 물리적으로 측정 가능한 속성을 가져야 하며 그 대상을 측정할 기기가 존재해야 한다. 정신의 근원에 대해서는 밝혀냈다고 하더라도 죽음 이후의 정신의 행방에 대해선 무엇도 밝힐 수 없다. 그러니 측정 불가능하다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영혼에 대한 생각을 끝낼 순 없었다.


 나는 '사후'의 개념에서 파생되는 환생에 주목했다. 사람은 정말 환생 가능한가? 구체적으론 과학이 말하는 정신의 기원과 사후 영혼의 행방을 '환생'으로 매끄럽게 연결할 수 있을까?이다. 환생 가능성에 대해 탐구하여 영혼의 존재를 알고자 했다.




 자연 속 개체들은 서로 무리를 지어 개체군을 이루고 개체군은 자연을 이용하여 지속적으로 번식하여 개체수를 증가시킨다. 사람 역시 다른 생물들의 방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자연현상엔 숨겨진 법칙이 있고 개체군의 성장과 관련된 주요 변인들을 설정하여 이를 수학적인 방식으로 모델링한 것이 있는데 이를 개체군의 생장곡선(로지스틱 곡선)이라고 한다.


개체군의 생장곡선(로지스틱 곡선)


 어느 종의 한 세대의 개체군의 크기가 100이라고 가정해 보자. 단순하게 개체 각각이 한 번의 번식으로 새로운 개체 하나를 만든다고 하면 다음 세대의 개체군의 크기는 200이 되고 그다음은 400, 800, 1600,... 의 식으로 지수적으로 개체군의 크기가 급증할 것이다. 이것이 그림의 이론 상의 생장 곡선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실제 자연에서는 개체군이 머무는 공간의 제약, 자원의 제약 등 환경적 요인에 의해 개체군의 성장이 제한된다. 이런 환경 저항에 의해 실제 개체군의 크기는 무한하게 증가하지 않고 새로 태어난 개체만큼 기존의 개체들이 죽는 시점에 도달하여 개체군의 크기가 일정하게 유지된다.


 이는 지극히 생태계를 단순화한 이론이기 때문에 사람의 경우에 완벽하게 적용할 순 없지만 한 가지 사실을 얻을 수는 있는데, 어떤 재앙이 닥치지 않는 한 인류는 증가하면 증가했지 감소하진 않을 것이란 사실이다.


 이 부분에서 환생에 대한 문제가 발생한다.




어떤 영혼이 환생할 것인가?


 처음 시점에는 두 사람이 존재했고 다음 시점에는 네 사람이 존재한다고 가정해 보자. 이 가정이 합당한 이유는 개체군의 생장곡선에 따르면 번식 이후 다음 세대의 사람의 수가 전 세대보다 적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처음 두 사람에겐 각각 하나의 영혼씩 존재하여 총 2개의 영혼이 존재한다. 다음 시점의 네 사람을 위해선 총 4개의 영혼이 마련되어야 한다. 이미 마련되어 있는 영혼은 2개이기 때문에 적어도 2개 분량의 영혼은 새로 만들어져야 하는데 영혼의 탄생은 육체에서 기원할 수 있으므로 새로운 영혼이 만들어지는 건 문제 되지 않는다.


 그러나 새로운 영혼이 반드시 2개만 만들어져야 할 이유는 없으므로 3개의 영혼이 새로 만들어진 상황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때 기존의 영혼은 2개인데 영혼이 깃들 육체는 하나뿐이므로 처음의 두 영혼 중 어떤 영혼이 환생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발생한다.


 위 상황처럼 개체군이 잘 성장하는 상황에도 영혼의 수는 살아있는 사람의 수보다 항상 많거나 같은데 천재지변이 발생하여 인구가 급감하여 영혼이 살아있는 사람보다 훨씬 많아질 수도 있다. 만약 영혼이 무작위로 선발되어 환생한다고 생각한다면 어떤 영혼이 환생할 가능성은 그때그때의 영혼과 살아있는 사람의 비율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정말 웃긴 얘기이다. 환생이 복불복이라니. 사람은 죽고 나면 다시 태어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애매모호한 결론이 환생의 본질이라면 맥이 빠진다. 가령 영혼이 존재하더라도 새롭게 태어나지 못한다면 그것이 내게 무슨 의미일지는 아직 와닿지 않는다.


 또한 과거는 현재보다 더욱 사람이 적다고 예상할 수 있으므로 현재의 영혼이 항상 과거의 살아있던 사람보다 더욱 많을 것이며 따라서 영혼이 과거로 회귀하여 환생하는 것은 더 어려울 것이다. 환생은 미래지향적이란 것도 덤으로 알게 됐다.



 

어떤 영혼이 유달리 잘 환생할 수 있다면 이거는 영혼의 입장에서 불공정한 걸까? 인간으로 태어나 별 고민을 다 하는 것 같다. 인간일 때 쌓은 덕이 높을수록 다음 생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다던 얘기를 어디선가 들었던 것만 같은데 도덕이란 게 인간의 산물이니 어쩌면 환생 역시도 참 인간중심적이란 생각이 든다. 자연은 인간에게 무심한 반면에 말이다.


 환생하지 못하더라도 영혼들만의 독자적인 세계에서의 생활이란 게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크게 염두하진 않을 것 같다.  다음의 삶이 있다고 한들 나의 모든 게 오롯이 내가 발 딛고 서있는 이곳에서 이루어졌지 않은가. 절대적일 것이라 생각했던 영혼의 존재가 운빨타는 환생 가능성에 의해 금이 가는 것만 같다. 근데 금이 좀 가면 어떤가. 살아있는 우리에게 환생은 정말 중요한 문제일까? 도대체 무엇을 원하길래 보이지도 않는 다음 생에 빠져있는가. 나는 환생 따윈 필요 없을 만큼 멋진 현생을 만들길 소망한다.


사람은 환생할 수 없다. 그렇게 믿고 살아가련다.

매거진의 이전글 타고난 목적이란 증명할 수 없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