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똥구리(5)-완결

by 돌돌이

왕권이 약하고 노쇠한 왕이 다스리는 나라에선 기사에게 전권을 위임함과 동시에 왕이 자멸하는 스토리를 수없이 봤다. 나는 무너진 왕국의 힘없는 왕이고, 녀석은 대권을 뺏으려는 기사다. 하지만 기사는 공을 세우고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다. 기사는 바퀴벌레를 몰아냈으며, 내가 밤에 화장실 가는 것을 가능케 했고, 배고픔을 느끼게 하고 식사량을 늘리게 했다. 잠과 현실의 차이를 명확하게 느끼게 해줬을 뿐 아니라, 밥을 먹고 누워 있는 일상에서 관찰과 대응이라는 일을 하게 만든 것이다. 영화에서 왕은 무능력하고 권력욕에 가득 찬 폭군으로 묘사되며 결국은 축출되어 백성들은 자유와 기쁨의 춤을 춘다.


녀석의 이름은 ‘시발’로 지었다. 내가 살면서 가장 많이 들어온 욕이자 표현이다. 그는 종종 ‘시발 년 놈 들’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는데 대부분은 시발년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여러 수많은 욕들을 사용했지만, 그 표현은 나를 대변하기 위해 존재하는 욕이었다. 그는 여러 가지로 변형해서 욕을 했는데, 내가 알고 있는 50살의 남자가 쓰는 이 찰진 욕들은, 그만의 전매특허였다. 욕을 찰지게 구사하는 사람은, 삶을 옹골차게 살아왔다나 뭐 다나? 사진을 찍기 위해 기다리던 양복 입은 구청장은 어떠한 시발도 입에 내지 않았지만 옆에 서있던 사람들은 내가 30분간 매 타작과 욕을 듣고 나서 짓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구청장의 옆에 있던 여자사람은 표정으로 ‘시발’을 뱉었고 구청장도 내가 악수를 하는 순간에 아주 잠깐이지만 얼굴에서 ‘시발’을 볼 수 있었다. 부러운 녀석을 봐도, 기분이 더러울 때도, 힘들고 지쳤을 때도 ‘시발’이라는 표현만큼 알맞은 것은 없다. 일상의 분노와 내 안에 있는 폭력성을 드러내면서도, 자조 섞인 한마디는 바로 ‘시발’인 것이다. 녀석이 년인지 놈인지는 알 수 없기에 그냥 '시발'로 결정했다. 내가 이렇게 이름을 새기고 호칭으로 불러 준다면 녀석은 어떻게 반응할까?


시발이 나타난 지 13일째 되던 날, 녀석이 내 다리를 밀기 시작한 지 일주일이 되던 날이다. 나는 녀석에게 말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매주 1번, 국가에 내가 살아있음을 확인시켜 주기 위해 ‘네’라는 대답을 하는 것으로 내 조음기관이 정상작동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평소에 발성을 하지 않았도 대화도 가능하고 목소리도 나온다는 것도 알고 있다.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직접 단어를 선택하고, 질문을 하고, 말을 이끌어야 한다는 점에서 부담이 되긴 했다. 수없이 머릿속으로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을 생각하면서도 뱉지 못했던 말이 있었다. 매 타작을 하던 그와, 이러한 사달이 나게 한 어머니란 사람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정말 나라는 존재를 두고 떠나면서 그가 친부가 아님을 꼭 밝히고 갔어야 했는지. 그녀가 도망간 이후로도 속죄를 할 기회는 충분했다. 날 두고 떠났으니 어렴풋 돌아올 거라는 희망도 있었다. 그리고 신문 1면을 장식했을 때도 그녀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병원에 있을 때에도 말은 하지 않았다. 말은 때가 있지만 그때가 어긋나면서 예상외의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입안에서만 맴돌던 그 말을 깨어난 날에 나도 모르게 뱉어버렸다. 그리고 그 말은 그대로 신문에 내 사진과 함께 실렸다.


[시발, 왜 날 떠밀었어요?]


말을 뱉자마자 시발은 밀던 자신의 다리를 조심스레 내려놓고 내 눈을 쳐다봤다. 이렇게 즉각적으로 반응이 올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녀석은 내 눈에다가 자신의 눈가를 고정시켰다. 성인 남성도 30분을 신나게 두들기다 보면, 한 겨울에도 땀이 나고 나가떨어진다. 하물며 하루 내내 온몸으로 나를 밀고 있던 시발의 고됨은 어떨까? 녀석이 나를 쳐다보는데 가만히 누워 있을 순 없었다. 양반자세를 하고 그 눈빛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았다. 녀석은 다시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쳐다보았고 나 또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대상을 쳐다보지 않고도 살아가는 데엔 문제가 없다. 무언가를 피하지 않고 마주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자신의 심연을 보여 줄 수 있는 사람만이 상대를 마주할 수 있다.


그가 나를 때릴 때마다 어떤 느낌이었을까? 무언가를 때려 본 기억이 없기에, 공감을 할 수가 없다. 나는 아이를 가진 적도 없고, 기른 적도 없으며, 청소년을 이제 시작하는 아이였다. 그녀가 있을 때도 그가 폭력을 써 왔지만, 기절할 때 까진 때리지 않았다. 그녀가 떠나고 나서부터, 자신을 쳐다보지 않는 것이 얼마나 굴욕적이고 화가 나는 행동인지를, 그는 더 큰 폭력으로 답해주었다. 난 그를 볼 용기가 없다. 아버지라고 명명했던 그 사람의 빈 껍데기를 보고 나서부터, 마주함은 폭력보다 더 무서운 것이었다. 자신의 바닥을 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와, 이러한 고통에 맞설 자신이 없던 나는, 공존할 수 없었다. 그의 심연을 보다 보면 나라는 존재를 잊는다. 맞는 것은 쉽다. 사실 따위는 중요치 않다. 그 뒤에 따라올 진실이 더 두려운 법이다.


시발은 천천히 자신의 앞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녀석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해야 할 것만 같았다. 녀석은 알아차리기라도 하듯이 내 손바닥 위로 올라왔다. 나는 그대로 손을 내 눈높이에 맞췄다. 녀석과 나는 이제 같은 눈높이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손을 내밀지 않았더라면 녀석과 이렇게 같은 위치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변화는 두려움을 수반하지만 내가 주체가 되지 못하면 그 어느 것도 얻지 못한다. 남이 만들어 놓은 틀에선 그 틀에 맞게 짓이겨질 뿐이다. 내가 묻지 않고 회피했던 그 순간은, 그가 만들어놓은 틀에 부합하는 행동이었다. 그는 내가 물어볼까 봐 겁을 내고 있었다. 난 알고 있었다. 내가 입을 열면 그가 무너져 내릴 거라는 사실도. 그가 나를 때리는 것도 진실의 위험에서 보호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를 실컷 두들긴 다음엔 울면서 미안하다며 연거푸 나를 안았다. 아무 말 없이,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는 것이 그에게 했었던 유일한 대답이었다.


시발이 사라지고 난 뒤, 딱 하나 바뀐 것이 있다. 마주함을 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는 것은 그에게 할 수 있었던 위로이지, 나를 위한 위로가 아니었다.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도, 누군가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일도 피하지 않겠다. 매번 떠 밀려왔었지만, 녀석이 했었던 것처럼, 이번엔 나도 밀어 보기로 했다. 앞발로, 뒷발로, 머리와 몸으로 밀다가, 밀리지 않으면 배를 까뒤집으면 그만이다. 순간을 살아간 녀석에게 후회는 없다.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주하고 뒷걸음치지 않았다는 것. 앞으로 있을 그 마주함에 대해 물어뜯어서라도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것까지. 나를 떠밀어왔던 수많은 이들에게 나 또한 밀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다.


아침이 온다. 밀어붙일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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